한글의 조형적 특징을 현대 감각으로 재구성
오피니언 리더들은 제품 한두가지 이상 지녀
"1990년대 중반, 충남대학교에서 '디자인과 생활'이라는 교양 강의를 맡았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디자인의 암흑시대였는데, '한국 브랜드를 키워야 한다', '한국문화를 기초로 독창성을 지니면 세계화도 가능하다'고 강조했죠. 그러자 강의를 듣던 의대생·공대생들이 전공을 바꿔 (디자인학과로)편입을 해오는 거예요. 가슴이 뜨끔했지만 도전의식과 책임감이 용솟음쳤죠."
한글의 조형적 특징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해 넥타이·스카프·핸드백·지갑·벨트 등을 디자인해 판매하는 이건만 대표의 이야기다.
이 대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컨설팅그룹 (주)이건만AnF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2000년 제자 2명과 함께 1800만원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엔 무모한 도전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존만(Geonman)이라는 발음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는 지적부터 개인이름을 딴 브랜드를 성장시키기 어렵다는 애정 어린 충고도 잇따랐다. 디자인소재로 한글을 택한 점도 이 대표를 아끼는 사람들에겐 걱정거리였다. 시장창출의 한계를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한글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녀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아름답다", "처음부터 명품은 없다. 샤넬이나 에르메스도 시작할 때는 무명브랜드였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이다.
이 대표는 "디자이너는 요리사 같아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아무리 건강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손님들이 먹지 않고, 또 맛이 있더라도 불량식품이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만들 듯 디자인도 품질좋고 멋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이 회사 디자이너들은 한달에 디자인 1~2건을 완성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 일반 디자이너들이 하루에 1~2건씩 내놓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 결과 이건만 넥타이는 국립박물관의 문화상품으로 개발돼 팔렸고, 다른 상품도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으로 납품됐다. 지금은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인천공항에 버젓이 입점한 한국산 명품으로 떠올랐다.
특히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서는 이건만 브랜드 제품을 한두 가지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면 패션 감각이 없는 사람, 시대에 뒤쳐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글 모노그램(문자들이 얽혀있는 문양)의 다양성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높인다.
지난 2009년에는 '이건만AnF 재팬'을 설립, 해외진출의 첫 시동을 걸었다.
이 회사는 그해 일본 신주쿠에 직영매장을 개장했고, 올 2월에는 일본 토브백화점에 입점했다. 일본 지사에서는 고객대상 한국어 강좌도 개설, NHK 아나운서까지 와서 강의를 듣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국내 디자인산업의 마중물(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 역할을 하고 싶다.징검다리도 3개까지는 놓고 싶다"고 말했다.
개울에 징검다리가 1~2개만 있으면 언제 길을 건너나 막막하지만 3개 정도되면 건널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그는 디자이너 개개인의 노력과 함께 정부,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도 당부했다.
"얼마전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부터 '백스트라'·'산타마리아 로벨라' 브랜드 런칭 파티에 초청받았다"며 "수공예 브랜드 제품이 국내 첫 판매되는 것을 기념해 마련한 자리"라고 했다.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정부부처까지 자국의 브랜드 성공을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한다는 부러움 가득한 이야기였다.
한편 이 대표는 지난해 추석 '희망넥타이'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넥타이를 공동모금회에 기부하고, 판매 수익금은 저소득층 자녀 학비 지원에 쓴 것.
그는 "재능의 대부분은 사회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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