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 희망의 조건 ② ‘새 삶’ 뜻 있는 곳에 길 있다] 17년 경력이 백지로 … 키보드 대신 용접기 잡고 ‘새출발’

지역내일 2013-02-05
컴퓨터 전문가에서 용접기술자 된 박영수씨 … "전세자금 마련부터 다시 시작, 앞만 볼 것"

강력범죄로 인해 국민들의 불안이 커졌다. 범죄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결국 출소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다시 살아가야 한다. 해마다 170여만 건의 크고 작은 범죄가 벌어지고, 매년 14만명 이상이 죗값을 치르고 사회로 돌아온다. <내일신문>은 '새 삶'과 '재범'의 기로에 선 출소자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잡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4회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 주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셨어요. 실수를 반복하지 않되 이미 한 것을 자꾸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죠.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않을 겁니다."

용접 기술자 박영수(40·가명)씨는 한때 유능한 IT전문가였다. 20대 초반에 국내에서 내로라는 유명 콘텐츠 제작사에 입사, 17년을 근무했다. 승진을 거듭해 직접 관리 직원만 30여명인 고위 관리직까지 올라갔다.

◆꼬리잡힌 '한탕의 유혹' = 박씨가 범죄의 유혹에 빠진 것은 금융위기 무렵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였다.

당시 회사는 직원 월급을 몇 달씩 지급하지 못할 지경까지 갔다. 그는 아래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주기 위해 편법을 썼다.

아직 하지 않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처럼 보고해 8000만원 가량의 자재비 등을 지급받고 이를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이번엔 모자란 회사 돈을 채울 방법이 문제였다. 박씨는 지인으로부터 현금지급기(ATM), 컴퓨터 등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은행돈을 빼내는 수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엔 알려지지 않은, 은행 IT기술의 허점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박씨는 이 방법으로 모자란 회사 돈을 손쉽게 채워 넣었고 '완전범죄'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한 번 선을 넘자 욕심이 커졌다. 적은 돈이든 큰 돈이든 한 번 훔친 이상 차라리 끝을 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팔자를 한 방에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마취제처럼 양심과 두려움을 둔하게 만들었다.

박씨는 여러 개의 대포통장을 만들어 은행으로부터 빼낸 돈을 나눠넣었다. 금액만 수십억 원에 이르렀다. 해외로 달아날 준비도 했다. 혹시 붙잡히더라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면 돈만큼은 챙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사망은 예상보다 빨리 좁혀졌다. 박씨는 결국 경찰에 꼬리가 잡혔다.

처음에는 버텼다. 어떤 수법으로 범행했는지 털어놓으면 정상참작 하겠다는 수사관의 말도 귓등으로 흘렸다.

◆'대단히 잘못됐다' 늦은 깨달음 = 검사는 그에게 7년형을 구형했다. 판결은 계속 연기됐다. 박씨는 유치장에서 매일 아침 피의자들이 대기하는 이른바 '비둘기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늦은 밤에야 들어가는 나날을 보냈다.

유치장은 더 고역이었다. 차라리 읽을 책이 있던 비둘기장이 나았다. 동일한 죄목으로 한 방에 모인 '동료'들 중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없었다. TV에서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방송해도 욕을 하는 사람, 바깥에서는 금방 알 수 있는 일로 언쟁을 벌이는 사람, 자신의 범행을 무용담으로 터무니없이 부풀리는 사람을 보며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 싶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보내면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질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다 한들 무의미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은행 시스템의 맹점은 무엇이었는지, 드러나지 않은 대포통장은 얼마나 되는지 모두 진술했다. 빼돌렸던 돈은 모두 돌려주고, 집도 팔아치웠다.

법원은 항소심에서 그에게 2년형을 선고했다.

박씨는 동생을 통해 연로한 아버지에게 "한동안 해외출장을 가서 뵙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인사를 전했다.

◆옛 동료 외면, 영치금 도둑맞기도 = 2년이 흘러 출소했다. 주머니에는 교도소에서 봉투를 붙이며 번 영치금 30만원이 전부였다.

고향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귀국선물'은 커녕 수척해진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일 자신이 없었다.

당장 숙식과 일자리가 급했다. 옛 직장 동료들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업계에 소문이 다 나버려 돌아갈 자리는 없었다. 한동안 찜질방을 전전했지만 얼마 안 되는 영치금마저 누군가 훔쳐가 오래가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출소자를 위한 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지난 5월 막연한 희망으로 인천 법무보호복지공단을 찾았다.

당시 공단은 출소자를 상대로 특수용접 교육훈련생을 모집 중이었다. 국비가 지원돼 교육비는 무료였고 훈련수당도 지급됐다.

키보드, 마우스를 만지던 손으로 그라인더와 용접기를 잡으니 무거웠다. 철판을 갈 때 튀는 쇳가루는 따갑고, 용접불꽃으로 눈이 따가웠다.

처음엔 재능 있다고 칭찬도 들었지만 이론에 익숙하던 머리로 반복식 실무교육을 소화하려니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래도 박씨는 난생 처음 해 보는 용접 일을 하루 6시간씩 3개월간 열심히 배웠다.

특수용접은 사설 학원에서 같은 과정을 익히려면 120시간에 200만원이나 줘야 하는 비싼 기술이다. 무엇보다 출소자라는 신분이 멍에가 되지 않는 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첫 월급 받고 찾은 고향 = 그를 눈여겨 본 공단에서는 일자리를 소개해 줬다. 나이 지긋하고 용접경험이 풍부한 대선배들이 그를 맞았다. 초보 용접기사가 '한 사람 몫'을 하는 데는 3개월 정도 걸렸다.

박씨는 지난해 7월 첫 월급을 받았다. 100만원은 적금을 넣고 나머지 돈으로 과일세트 한 바구니 사서 처음으로 고향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박씨는 더 이상 잘나가던 옛 시절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 앞의 일에만 전념할 거라고 했다. 우선은 열심히 돈을 모아 전셋집을 장만, 독립하는 게 목표다.

그는 "만약 아무 대책 없이 길거리에서 새 인생을 살아야 했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며 "머물 곳과 새 일을 배울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인천 공단에서 용접교육을 배운 사람은 박씨를 포함해 71명이다. 이 중 61명이 수료했고 43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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