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의 베일에 가려있던 중국의 대국외교정책이 여론외교, 국민외교로 바뀌어가고 있다. 3월19일, 외교부부장조리인 선궈팡(沈國放)은 “신문부 안에 새로운 부서를 설립하며, 부서의 이름은 공중외교처(公衆外交處)”라고 공식 선언했다. 공중외교란 여론외교·국민외교(Public Diplomacy)를 지칭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이 기사는="" 주간료망동방을="" 요약함="">
지난 수십년간, 중국의 국가외교는 베일에 싸인 비밀 자체였다. 한 외교관은 “외교는 극소수의 비밀스런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의 일이다. 외교란 이해할 수 있는 사업을 집행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수외교 전담자들은 국민이 그 사정을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았으며, 알게 되면 오히려 더 외교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 현대화 사업의 추진과 함께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외교의 비밀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비밀외교의 베일을 벗는 것은 글로벌화 시대 중국의 정치 지도자와 대중의 공통된 바람이고 자발적인 선택이다.
‘역사의 진보는 사소한 사건이 누적되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중국외교관들과 학자들은 믿는다. 그들은 공중외교처의 설립을 바로 역사진보의 전형적인 ‘사소한 사건’으로 여기며, 개방적 외교의 제도화 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외교의 베일이 벗겨지기까지 여러가지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1998년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문 때, 중국 당국은 클린턴의 기자회견과 북경대에서의 방문 연설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2003년 11월5일, 외교부 전 부장이며 외교 담당 부총리였던 첸치천은 ‘외교10대기록’이라는 책을 펴내어 중요한 외교 활동의 배후를 밝혔다.
2003년 12월23일, 외교부 부장 리자오싱과 국민들 사이에 온라인대화가 이뤄졌다. 이는 중국 사상 외교부 부장과 국민간의 첫 온라인 교류였으며 2만7천여 네티즌들이 참여했다.
2004년 1월16일, 외교부는 국내외에 외교부에서 보존해오던 1만여부의 건국이래 진귀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그 중 다수는 극비문서들이었다.
2004년 1월26일, 중국 중앙TV방송국은 3개채널을 통해 후진타오 국가 주석의 프랑스 공식방문뉴스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중국 국가 원수의 외교 방문에 대한 생방송은 중국 사상 처음이다.
이런 ‘사소한 사건’의 흐름 속에 중국 외교의 신비한 베일은 서서히 벗겨지게 되었다.
네티즌은 “과거 중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부서였던 외교부가 오늘에 이르러 가장 개방적인 부서가 되었다”고 인정했다.
중국에서의 여론외교의 사명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여론외교를 추진하는 국가로서 매년 여론외교에 10억달러의 거액을 투자한다. 미국 여론외교의 주요목표는 세계를 향한 미국 이미지의 마케팅이다.
학문적으로는 여론외교는 보다 대외관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거론되지만, 중국의 여론외교는 중국내부지향성이 선명하다. 즉, 국가의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기 위한 데 더 목적이 있다.
중국외교부가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2003년, 외교부 고급간부는 전국 각지에서 20여회의 국제 정세관련 보고를 했다.
이런 내향적 특징은 중국사회에 ‘외교신비시대’가 누적시킨 부정적 경험을 소화하고, 글로벌화 시대에 어긋난 사고와 행동을 개혁하기 위해 국민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과 맞물려 있다.
중국 외교부의 관계자들은 매일같이 웹서핑을 통해 여론의 관심과 수요를 신속히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론외교가 성공하려면 국민여론의 수요를 잘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황은하 리포터 enhalisa@hanmail.net
여론외교(Public Diplomacy, 공공외교) : ‘정치가와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외교로서, 정통 외교경로를 통해 이뤄지는’전통외교와 달리 ‘정부, 사회조직과 개인이 외교에 관한 여론에 영향을 주며, 나아가 상대 정부와의 외교적 결단과 외교활동에 영향을 주는 방식’을 여론외교라고 하며, 이는 전통외교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공공 여론에 영향을 줌으로써 정식 외교관계에서 달성할 수 없는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1965년 미국 터프츠대 법학·외교학부의 에드먼드 글리온 학장이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다. 지난해 한국에서 이라크파병정책을 결정할 때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외교전문가의 말을 들어 신속히 결단할 것을 촉구한 반면, 다른 일부에서는 국민여론에 기대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결정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후자가 여론외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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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년간, 중국의 국가외교는 베일에 싸인 비밀 자체였다. 한 외교관은 “외교는 극소수의 비밀스런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의 일이다. 외교란 이해할 수 있는 사업을 집행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수외교 전담자들은 국민이 그 사정을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았으며, 알게 되면 오히려 더 외교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 현대화 사업의 추진과 함께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외교의 비밀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비밀외교의 베일을 벗는 것은 글로벌화 시대 중국의 정치 지도자와 대중의 공통된 바람이고 자발적인 선택이다.
‘역사의 진보는 사소한 사건이 누적되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중국외교관들과 학자들은 믿는다. 그들은 공중외교처의 설립을 바로 역사진보의 전형적인 ‘사소한 사건’으로 여기며, 개방적 외교의 제도화 단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외교의 베일이 벗겨지기까지 여러가지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1998년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문 때, 중국 당국은 클린턴의 기자회견과 북경대에서의 방문 연설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2003년 11월5일, 외교부 전 부장이며 외교 담당 부총리였던 첸치천은 ‘외교10대기록’이라는 책을 펴내어 중요한 외교 활동의 배후를 밝혔다.
2003년 12월23일, 외교부 부장 리자오싱과 국민들 사이에 온라인대화가 이뤄졌다. 이는 중국 사상 외교부 부장과 국민간의 첫 온라인 교류였으며 2만7천여 네티즌들이 참여했다.
2004년 1월16일, 외교부는 국내외에 외교부에서 보존해오던 1만여부의 건국이래 진귀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그 중 다수는 극비문서들이었다.
2004년 1월26일, 중국 중앙TV방송국은 3개채널을 통해 후진타오 국가 주석의 프랑스 공식방문뉴스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중국 국가 원수의 외교 방문에 대한 생방송은 중국 사상 처음이다.
이런 ‘사소한 사건’의 흐름 속에 중국 외교의 신비한 베일은 서서히 벗겨지게 되었다.
네티즌은 “과거 중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부서였던 외교부가 오늘에 이르러 가장 개방적인 부서가 되었다”고 인정했다.
중국에서의 여론외교의 사명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여론외교를 추진하는 국가로서 매년 여론외교에 10억달러의 거액을 투자한다. 미국 여론외교의 주요목표는 세계를 향한 미국 이미지의 마케팅이다.
학문적으로는 여론외교는 보다 대외관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거론되지만, 중국의 여론외교는 중국내부지향성이 선명하다. 즉, 국가의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기 위한 데 더 목적이 있다.
중국외교부가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2003년, 외교부 고급간부는 전국 각지에서 20여회의 국제 정세관련 보고를 했다.
이런 내향적 특징은 중국사회에 ‘외교신비시대’가 누적시킨 부정적 경험을 소화하고, 글로벌화 시대에 어긋난 사고와 행동을 개혁하기 위해 국민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과 맞물려 있다.
중국 외교부의 관계자들은 매일같이 웹서핑을 통해 여론의 관심과 수요를 신속히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론외교가 성공하려면 국민여론의 수요를 잘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황은하 리포터 enhalisa@hanmail.net
여론외교(Public Diplomacy, 공공외교) : ‘정치가와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외교로서, 정통 외교경로를 통해 이뤄지는’전통외교와 달리 ‘정부, 사회조직과 개인이 외교에 관한 여론에 영향을 주며, 나아가 상대 정부와의 외교적 결단과 외교활동에 영향을 주는 방식’을 여론외교라고 하며, 이는 전통외교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공공 여론에 영향을 줌으로써 정식 외교관계에서 달성할 수 없는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1965년 미국 터프츠대 법학·외교학부의 에드먼드 글리온 학장이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다. 지난해 한국에서 이라크파병정책을 결정할 때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외교전문가의 말을 들어 신속히 결단할 것을 촉구한 반면, 다른 일부에서는 국민여론에 기대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결정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후자가 여론외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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