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가을 개봉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영화 ‘이탈리안 잡’에는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샤를리즈 테론 못지않게 눈길을 끈 출연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초소형 스포츠카 미니쿠퍼이다.
163마력, 최고시속 218km로 LA의 복잡한 도로와 지하도를 종횡무진하다 하수구까지 날렵하게 통과하는 3대의 미니를 보고 탄성을 자아낸 관객이라면, 이 차에 대한 궁금증이 한 번 쯤은 일었을 법하다.
작지만 위대한 차로 불리는 미니는 1959년 영국 로버사가 발표한 뒤 서민과 귀족을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차종의 하나로 손꼽혔고, 1999년말 ''포드 모델 T''에 이어 20세기의 자동차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로버 미니, 포드 미니, BMW 미니
그런데 미니는 그 인기만큼이나 기구한 팔자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 차의 주인이 영국의 오스틴, 모리스, 로버 등 이러저러한 회사에서 미국 포드로, 마침내 독일 BMW의 독립 브랜드로 남게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영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때 세계의 굴뚝이라 불리던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 기계공업의 발원지인 이 나라는 당연 자동차산업의 원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국에 고유의 자동차산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자동차회사는 시장의 규모를 고려한 외국자본이 불가피하게 유지하는 중이고, 주요부품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되기 때문이다.
영국 자동차업계는 전통적인 자유경쟁 원리에 충실하게 군소회사가 난립한 상태로 출발했다. 적어도 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는 이러한 구조가 문제되지 않아서, 당시 영국은 세계 1위의 자동차 수출국이었고 미국에 이어 최대 생산국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전후 마샬 플랜이 가동되어 유럽재건이 진행되고 한국전쟁 특수를 거치며 일본 자동차업계가 부활하자 사정은 변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동차 산업을 기간산업으로 간주하여 이른바 정부 지원 하에 독과점체제를 유도한 데 비해, 영국은 자유경쟁 체제를 계속 고집하여 포드나 폴크스바겐에 대항할 만한 대형업체는 나타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 외국 자동차들이 추격을 시작하면서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먼저 생산성에서 영국 업계는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 세계가 포드주의 시스템으로 무장한 지 오래고, 거기다 일본에서는 도요타나 혼다가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때까지도 도제(개수임금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고, 작업장에서는 상급노조보다 현장위원(Shop Steward)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생산성이 현장의 결정에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영국 내에서도 영국차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유경쟁 원리상 당연했다.
다급해진 영국 정부는 외국업체에 대항할 대형업체가 필요함을 깨닫고 국내 메이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로써 1966년 BMC와 재규어를 합친 BMH가, 이듬해 로버와 이랜드를 중심으로 한 LMC가 만들어졌고, 1968년 이들이 합친 단일 자동차그룹 BLMC가 탄생했다.
정부, 통합 회사 금융자본에 맡겨
BLMC의 당면과제는 업체들의 장점을 모아 경쟁력 있는 통합으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위공장마다 얽히고설킨 노동조합 정파와 지역주민들의 이해에 부딪혀 공장 통합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지역간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 정부까지 공장부지 선정에 개입했다.
그 결과 기존 공장은 어색한 짜깁기 상태로 남게 되고, 신설 공장은 인프라도 채 갖추어지지 못한 낙후 지역에 세워진다. 단일그룹의 이점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한 기업만이 남아 외국 업체의 공세를 막아야 하니 자동차산업의 리스크만 높인 셈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제조업을 사양산업으로 치부한 영국 정부의 금융 중심 정책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통합을 주도하면서도 산업보호 입법에는 무관심했고, 더욱이 BLMC를 금융자본에 넘겼다. 이 산업에 필수적인 장기적 투자기회를 정부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매번 정책을 갈아 치우는 바람에 BLMC는 유명한 ‘서다가다(Stop-Go)’ 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출범 6년만인 1974년 판매부진 속에 오일쇼크가 겹치자 BLMC는 파산에 몰렸고, 정부는 급히 진상조사를 벌인 뒤 회사의 공기업화를 결정했고 사명도 BL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BL의 실적이 나아지지 않자 그 원인을 노사관계에서 찾은 정부는 에드워즈라는 반노조주의자를 회장으로 파견했다. 그때부터 영국 자동차업계 전체가 경영진의 공격과 노조의 반격으로 이어지는 충돌의 역사로 점철되어, 1980~86년 사이 17만4895명이 정리해고로, 5만5305명이 조기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났다.
이처럼 의도한 대로 노조를 잠재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거기 매몰되는 바람에, BL의 경영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 회사가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정부 투자 때문이었다. 실적이 이를 보여준다. 오일쇼크 전인 1973년 2600만파운드이던 순익은 1982년 2억300만파운드의 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 2억9300만파운드의 순손실로 둔갑해 있었다.
거듭된 매각, 남은 것은 껍데기뿐
오일쇼크 결과 외국을 따르거나 자동차산업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영국 정부는 1975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신사유람단은 일본 도요타나 혼다의 탁월한 생산방식에 경탄한 바 있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1979년 BL과 혼다의 제휴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BL은 외형상 소생하는 듯했으나 실은 대부분의 인기차종이 혼다에서 설계한 차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차의 판매만 늘어났다. 제휴 전인 77~81년 사이 0.4%에 불과하던 일본 수입차의 점유율 증가폭이 제휴 뒤인 85-90년 사이 4.4%나 늘어난 반면, BL의 내수 점유율은 72년 58%에서 합작 후인 86년 31.6%로 무섭게 떨어졌다. 일본에 뒤통수 맞았다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미 BL은 소생불가능 상태였다.
1979년 실정을 거듭한 노동당의 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되자, 이어 집권한 보수당의 대처 총리는 애물단지가 된 자동차산업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984년 정부는 BL에서 재규어를 떼어 내 팔았고, 이어 버스, 대형트럭, 부품사업부문 등을 차례로 팔아치웠다. 영국 자동차를 대표하던 이 회사는 단 2년만에 승용차와 4륜차만 남은 로버사로 축소되었고, 대처 정부는 거기서 손을 털었다.
자생력을 상실한 반쪽 회사 로버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1988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회사는 브리티쉬에어로스페이스(BAe)에 매각되었다. 항공산업 확장의 일부로 합병을 추진했던 BAe는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자 다시 회사를 독일의 BMW에 팔아버렸다. BMW 경영진은 혼다방식 철폐를 로버 수술의 1차 과제로 두었는데, 결과는 로버를 영국시장에서 버티게 한 마지막 동력을 제거한 셈이 되었다. 로버의 서툰 변신에는 로버사 직원들도, 나아가 영국 소비자들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6년 뒤 BMW는 로버를 포기하고 투자사인 알케미에 넘겨 원금을 건지려 했는데, 노조를 포함한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영국 산자부장관까지 나서는 통에 방침을 바꾸어 분리매각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최대 공장인 롱브리지를 MG 로버라는 이름으로 지역주민이 인수하고, 랜드로버를 포드가 인수하는 것으로 매각은 종료되었다. 영국자동차산업이 국가대표에서 지역대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BMW의 독립브랜드로 남아 영국에서 생산된 유일한 차종이 바로 ‘미니’였다.
/ 김선태 기자 kst@naeil.com
163마력, 최고시속 218km로 LA의 복잡한 도로와 지하도를 종횡무진하다 하수구까지 날렵하게 통과하는 3대의 미니를 보고 탄성을 자아낸 관객이라면, 이 차에 대한 궁금증이 한 번 쯤은 일었을 법하다.
작지만 위대한 차로 불리는 미니는 1959년 영국 로버사가 발표한 뒤 서민과 귀족을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차종의 하나로 손꼽혔고, 1999년말 ''포드 모델 T''에 이어 20세기의 자동차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로버 미니, 포드 미니, BMW 미니
그런데 미니는 그 인기만큼이나 기구한 팔자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 차의 주인이 영국의 오스틴, 모리스, 로버 등 이러저러한 회사에서 미국 포드로, 마침내 독일 BMW의 독립 브랜드로 남게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영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때 세계의 굴뚝이라 불리던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 기계공업의 발원지인 이 나라는 당연 자동차산업의 원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국에 고유의 자동차산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자동차회사는 시장의 규모를 고려한 외국자본이 불가피하게 유지하는 중이고, 주요부품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되기 때문이다.
영국 자동차업계는 전통적인 자유경쟁 원리에 충실하게 군소회사가 난립한 상태로 출발했다. 적어도 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는 이러한 구조가 문제되지 않아서, 당시 영국은 세계 1위의 자동차 수출국이었고 미국에 이어 최대 생산국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전후 마샬 플랜이 가동되어 유럽재건이 진행되고 한국전쟁 특수를 거치며 일본 자동차업계가 부활하자 사정은 변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동차 산업을 기간산업으로 간주하여 이른바 정부 지원 하에 독과점체제를 유도한 데 비해, 영국은 자유경쟁 체제를 계속 고집하여 포드나 폴크스바겐에 대항할 만한 대형업체는 나타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 외국 자동차들이 추격을 시작하면서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먼저 생산성에서 영국 업계는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 세계가 포드주의 시스템으로 무장한 지 오래고, 거기다 일본에서는 도요타나 혼다가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때까지도 도제(개수임금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고, 작업장에서는 상급노조보다 현장위원(Shop Steward)들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생산성이 현장의 결정에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영국 내에서도 영국차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유경쟁 원리상 당연했다.
다급해진 영국 정부는 외국업체에 대항할 대형업체가 필요함을 깨닫고 국내 메이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로써 1966년 BMC와 재규어를 합친 BMH가, 이듬해 로버와 이랜드를 중심으로 한 LMC가 만들어졌고, 1968년 이들이 합친 단일 자동차그룹 BLMC가 탄생했다.
정부, 통합 회사 금융자본에 맡겨
BLMC의 당면과제는 업체들의 장점을 모아 경쟁력 있는 통합으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위공장마다 얽히고설킨 노동조합 정파와 지역주민들의 이해에 부딪혀 공장 통합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지역간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 정부까지 공장부지 선정에 개입했다.
그 결과 기존 공장은 어색한 짜깁기 상태로 남게 되고, 신설 공장은 인프라도 채 갖추어지지 못한 낙후 지역에 세워진다. 단일그룹의 이점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한 기업만이 남아 외국 업체의 공세를 막아야 하니 자동차산업의 리스크만 높인 셈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제조업을 사양산업으로 치부한 영국 정부의 금융 중심 정책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통합을 주도하면서도 산업보호 입법에는 무관심했고, 더욱이 BLMC를 금융자본에 넘겼다. 이 산업에 필수적인 장기적 투자기회를 정부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매번 정책을 갈아 치우는 바람에 BLMC는 유명한 ‘서다가다(Stop-Go)’ 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출범 6년만인 1974년 판매부진 속에 오일쇼크가 겹치자 BLMC는 파산에 몰렸고, 정부는 급히 진상조사를 벌인 뒤 회사의 공기업화를 결정했고 사명도 BL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BL의 실적이 나아지지 않자 그 원인을 노사관계에서 찾은 정부는 에드워즈라는 반노조주의자를 회장으로 파견했다. 그때부터 영국 자동차업계 전체가 경영진의 공격과 노조의 반격으로 이어지는 충돌의 역사로 점철되어, 1980~86년 사이 17만4895명이 정리해고로, 5만5305명이 조기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났다.
이처럼 의도한 대로 노조를 잠재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거기 매몰되는 바람에, BL의 경영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 회사가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정부 투자 때문이었다. 실적이 이를 보여준다. 오일쇼크 전인 1973년 2600만파운드이던 순익은 1982년 2억300만파운드의 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 2억9300만파운드의 순손실로 둔갑해 있었다.
거듭된 매각, 남은 것은 껍데기뿐
오일쇼크 결과 외국을 따르거나 자동차산업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영국 정부는 1975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신사유람단은 일본 도요타나 혼다의 탁월한 생산방식에 경탄한 바 있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1979년 BL과 혼다의 제휴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BL은 외형상 소생하는 듯했으나 실은 대부분의 인기차종이 혼다에서 설계한 차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차의 판매만 늘어났다. 제휴 전인 77~81년 사이 0.4%에 불과하던 일본 수입차의 점유율 증가폭이 제휴 뒤인 85-90년 사이 4.4%나 늘어난 반면, BL의 내수 점유율은 72년 58%에서 합작 후인 86년 31.6%로 무섭게 떨어졌다. 일본에 뒤통수 맞았다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미 BL은 소생불가능 상태였다.
1979년 실정을 거듭한 노동당의 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되자, 이어 집권한 보수당의 대처 총리는 애물단지가 된 자동차산업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984년 정부는 BL에서 재규어를 떼어 내 팔았고, 이어 버스, 대형트럭, 부품사업부문 등을 차례로 팔아치웠다. 영국 자동차를 대표하던 이 회사는 단 2년만에 승용차와 4륜차만 남은 로버사로 축소되었고, 대처 정부는 거기서 손을 털었다.
자생력을 상실한 반쪽 회사 로버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1988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회사는 브리티쉬에어로스페이스(BAe)에 매각되었다. 항공산업 확장의 일부로 합병을 추진했던 BAe는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자 다시 회사를 독일의 BMW에 팔아버렸다. BMW 경영진은 혼다방식 철폐를 로버 수술의 1차 과제로 두었는데, 결과는 로버를 영국시장에서 버티게 한 마지막 동력을 제거한 셈이 되었다. 로버의 서툰 변신에는 로버사 직원들도, 나아가 영국 소비자들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6년 뒤 BMW는 로버를 포기하고 투자사인 알케미에 넘겨 원금을 건지려 했는데, 노조를 포함한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영국 산자부장관까지 나서는 통에 방침을 바꾸어 분리매각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최대 공장인 롱브리지를 MG 로버라는 이름으로 지역주민이 인수하고, 랜드로버를 포드가 인수하는 것으로 매각은 종료되었다. 영국자동차산업이 국가대표에서 지역대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BMW의 독립브랜드로 남아 영국에서 생산된 유일한 차종이 바로 ‘미니’였다.
/ 김선태 기자 ks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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