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이 낫다
남난희/학고재/9800원
남난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여성 산악인이다.
84년 76일 동안 태백산맥을 단독으로(그것도 1월 1일부터 3월 16일까지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동계 산행이었다) 종주했고, 86년에는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에 올랐다.
89년에는 남자들도 힘들다고 고개를 내젓던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두차례나 올랐고, 90년 대 들어서는 백두대간 종주산행으로 우리나라에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이란 큰 산줄기가 있음을 널리 알렸다.
그랬던 그가 “낮은 산이 낫다”는 책을 냈다. 제목부터 첫 번째 책인 ‘하얀 능선에 서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칠십육 일 동안 내내
한겨울 백두대간을 혼자 걸었다
그때가 스물일곱
세상은 놀랐고 나는 울었다
여자나이 스물아홉에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에 올랐다
세상은 놀랐고 나는 외로웠다
삼십대 한가운데서
욕망의 산을 내려왔다 …
산 후배들이 디자인한 책 표지에 나오는 글이다.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이 책의 화두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가 버린 산은 ‘에베레스트’로 대표되는 욕망의 산이다.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알피니즘이다. 정산 정복(?)을 고집하는 등정주의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등정주의가 그를 버렸다. 그는 막대한 지원금이 들어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원정대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아예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여성들만의 등반대는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고, 그는 여성들만의 등반을 고집했다.
에베레스트를 버리고 그가 얻은 산은 ‘지리산’이다. 서른 여덟 떠꺼머리 산 총각을 만나 아이를 낳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그 이후의 일을 다룬다. 청학동 삼성궁 아래 ‘백두대간’이란 찻집을 열고 봄이면 쌍계사 계곡 화개골에서 야생 녹차를 만들기 시작했던 이야기, 정선 동강변에서 자연학교를 꾸렸던 이야기, 엄청난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다 떠내려보내고 다시 지리산 자락으로 돌아온 이야기까지 저자 특유의 부드럽고 친근한 필체가 잔잔하게 빛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또 하나의 산은 ‘기범이’이다. 이제 스님이 된 아이 아버지와 헤어진 후 혼자서 기른 11살짜리 아들, 기범이는 그에게 ‘애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같은 존재로 자랐다.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온 지난해부터 그는 ‘된장’을 담는다. 많이 담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딱 10가마. 된장 담는 일은 정선에서 제대로 배웠는데,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아무 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기다리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다고 한다. 또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 참 좋단다.
이쯤 되면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듯하다. ‘오르기 위한 산’(登山)을 버린 그가 이제 ‘산 속에 들어간’(入山) 경지에 이른 것일까.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남난희/학고재/9800원
남난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여성 산악인이다.
84년 76일 동안 태백산맥을 단독으로(그것도 1월 1일부터 3월 16일까지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동계 산행이었다) 종주했고, 86년에는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에 올랐다.
89년에는 남자들도 힘들다고 고개를 내젓던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두차례나 올랐고, 90년 대 들어서는 백두대간 종주산행으로 우리나라에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이란 큰 산줄기가 있음을 널리 알렸다.
그랬던 그가 “낮은 산이 낫다”는 책을 냈다. 제목부터 첫 번째 책인 ‘하얀 능선에 서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칠십육 일 동안 내내
한겨울 백두대간을 혼자 걸었다
그때가 스물일곱
세상은 놀랐고 나는 울었다
여자나이 스물아홉에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에 올랐다
세상은 놀랐고 나는 외로웠다
삼십대 한가운데서
욕망의 산을 내려왔다 …
산 후배들이 디자인한 책 표지에 나오는 글이다.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이 책의 화두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가 버린 산은 ‘에베레스트’로 대표되는 욕망의 산이다.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알피니즘이다. 정산 정복(?)을 고집하는 등정주의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등정주의가 그를 버렸다. 그는 막대한 지원금이 들어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원정대장이었다. 그랬던 그가 아예 명단에서 빠져버렸다. ‘여성들만의 등반대는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고, 그는 여성들만의 등반을 고집했다.
에베레스트를 버리고 그가 얻은 산은 ‘지리산’이다. 서른 여덟 떠꺼머리 산 총각을 만나 아이를 낳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그 이후의 일을 다룬다. 청학동 삼성궁 아래 ‘백두대간’이란 찻집을 열고 봄이면 쌍계사 계곡 화개골에서 야생 녹차를 만들기 시작했던 이야기, 정선 동강변에서 자연학교를 꾸렸던 이야기, 엄청난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다 떠내려보내고 다시 지리산 자락으로 돌아온 이야기까지 저자 특유의 부드럽고 친근한 필체가 잔잔하게 빛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또 하나의 산은 ‘기범이’이다. 이제 스님이 된 아이 아버지와 헤어진 후 혼자서 기른 11살짜리 아들, 기범이는 그에게 ‘애인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같은 존재로 자랐다.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온 지난해부터 그는 ‘된장’을 담는다. 많이 담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딱 10가마. 된장 담는 일은 정선에서 제대로 배웠는데,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아무 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기다리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다고 한다. 또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 참 좋단다.
이쯤 되면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듯하다. ‘오르기 위한 산’(登山)을 버린 그가 이제 ‘산 속에 들어간’(入山) 경지에 이른 것일까.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