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모택동주의-프라찬다주의 주의 만세!’ 모택동주의 네팔 공산당 반란군은 외친다. 프라찬다는 모택동주의 네팔 공산당(CPN-M) 총수 푸쉬파 다할의 가칭이다. 이들에 의해 ‘민중전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96년 2월이다. 반란군은 수도 카트만두에서 300km 떨어진 롤파(Rolpa)지역을 공격했다. 공격목표는 입헌군주제를 뒤집는 것이었다. 반란 시작부터 2003년 말까지 약 8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네팔 비정부기구 Insec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1/3은 모택동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2/3은 국가군에 죽임을 당했다. “모택동주의자들의 폭력은 정확한 목표물을 대상으로 매우 선택적이고 계획적이다” 고 카트만두의 국제적십자사는 말한다.
극심한 빈곤으로 인한 게릴라 봉기
2003년 광신적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급성장은 네팔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천연자원이 전무한 이 국가는 국민의 71%가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살고 있으며 80%의 인구가 농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있다. “연 2.2%의 농업성장률로는 부족하다”고 카트만두 주재, 아시아 개발은행의 로랑 샤제 전문가는 설명한다. “농민들은 대부분 1/3헥타르의 토지도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네팔사회 내 불평등의 골은 매우 깊다. 국가 전체 소득의 46.5%가 인구 10%의 손에 돌아간다. 반면 수십만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사람들은 강가에서 자갈을 깨 하루 1/2달러를 받고 팔아 생계를 연명한다.
아동노동은 일반화 된 상태다. 네팔 비정부기구 CWIN에 다르면 12만7천명의 아동들이 한달에 채 4달러도 못되는 돈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있다. CWIN측은 “90%의 경우가 통계에서 빠져있다”고 실상을 설명했다. 초등교육 외에 보건, 교육은 모두 유료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치품은 꿈도 못꿀 일이다. 그 결과 네팔인 3명중 2명은 문맹이고 매 2시간마다 여성들이 출산중 죽어간다. 국가예산 중 25% 이상이 네팔 이민자들이 해외에서 보낸 돈으로, 50%가 국제사회의 원조로 조달된다.
부정부패와 허울좋은 의회민주주의
부정부패 또한 만연화 돼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국제사회의 지원 중 단 3%만이 제대로 전달되고 나머지는 빼돌려진다. 엘리트들은 카스트제의 위계질서에 집착하고 사회의 최대 약자들을 걱정하는데 무감각하다. 일반시민들은 나라라면 신물이 난다. 농노제 폐지가 이뤄진 것은 2000년 7월에서였다. 22만6천명의 카마이야스, 즉 반 노예 상태의 농부들과 가족들이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사회적 차후 대책마련 조치없이 이루어진 농노제 폐지로 카마이야스들을 집과 일터를 모두 잃고 길로 나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3년 7월 통과된 예산의결은 이들에게 1년에 1/2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치열한 투쟁끝에 1990년 자리잡은 의회민주주의로 표현의 자유가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는 지역 유지들의 득세와, 부정부패, 카스트나 인종에 따른 차별, 고리, 전횡 등 봉건제적 관행을 인정했다.
14년만에 정부가 바뀐것만도 13번. 2002년 10월부터 기아넨드라(Gyanendra) 왕은 의회를 유명무실화하고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주무르고있다. “보수 엘리트들은 좌파 조차도 전통적 구조와 사회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국가의 통제가 전무한 상황에서 선거는 무의미하다”고 네팔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농촌지역에서 국가의 존재를 느낄수 있는 것은 사회보장제도가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 세금징수와 부패한 경찰들의 가혹행위, 2001년 6월 학살이후 권좌에 오른 권위적이고 인기없는 기아넨드라 왕이 그려져있는 지폐를 통해서다.
2003년 7월 7일 군 통제하에 있는 도시 고라히에서 군주제 기념식이 있었을 때 이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은 한명도 없을 정도다.
게다가 네팔 정부는 국제금융기구의 유도로 1992년부터 신자유주의 민영화과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나마 드물었던 공공서비스 마저 사라졌다. 식수와 치안이 시장의 손에 맡겨졌다. 아주 단기간의 경제적 호기 이후 새로운 소비자층이 생겨났다면 부정부패로 첫 투자자들은 네팔 시장을 등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가 폭력을 동원해 사회상황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92년부터 관찰자들은 ‘빛나는 오솔길’을 예로들며 네팔이 페루식 시나리오처럼 진행될 것을 예고했다. “카트만두의 부유층은 모택동주의자들의 공포만을 상기시키고 정작 그들이 튼튼한 사회적 기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남아시아인권포럼(SAHRF)의 회원이자 영국잡지 프론트라인 기자인 리타 만차다는 말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백이면 백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력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라고 진보 주간지 스포트라이트의 리말 마다브 쿠마르 국장은 지적했다.
모택동주의 공산게릴라들의 무력봉기
모택동주의 공산게릴라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단어는 ‘개발’이다. 그들은 의사와 도로, 다리, 전기, 수력발전 댐, 수확된 곡식 수출을 원한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은닉처에서 만난 공산당 간부들은 카스트상 낮은 신분의 젊은이들로 도시에서 교육을 받고 부패와 민영화 그리고 관광이 창출하는 부를 목격한 사람들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무장 투쟁에서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를 엿봤다. 가진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자리를 치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쿠크리를 가지고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다음 죽은 경찰의 무기를 들었다”고 루쿰 마을의 늙은 농부 야다브닌 회상했다. ‘인민전쟁’은 7년전 시작됐다. 현재 총 2천3백한 인구중 1천만이 ‘해방된’ 네팔에서 살고있다. 카트만두 언론은 중국과 대만과 마찬가지로 네팔에서도 ‘1국 2체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무력봉기는 절대적으로 국내적 차원에서 발발한 것이다. 인도나 중국으로부터의 어떠한 도움은 없었다. 유일한 외부로부터의 지지는 영국에 본부를 둔 모택동주의 지지자기구인 국제혁명운동(MRI)으로부터였다. MRI는 벵갈의 낙살리스트 게릴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터키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 공산당 같은 나머지 ‘빛나는 오솔길’들을 통합하는 조직이다.
MRI는 모택동주의 네팔 공산당(CPN-M)에게 투표를 거부하고 당국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도록 유도했다. 카트만두 주재 서방 대사관 무관은 모택동주의자 간부들이 인도에서 낙살리스트로부터, 페루의 공산 민병대 ‘빛나는 오솔길’로부터 훈련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또 네팔에는 퇴역 영국정예군 용병 구르카스, 전 유엔군 등 전쟁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 많다. 이들은 게릴라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반란은 지역 유지들을 공포에 떨게 하거나 죽이고 그나마 드문 국가시설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반란군들은 국가권력의 빈자리를 ‘참여시민’위원회(사미티)로 매웠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생활과, 부차적으로 밀고를 조장했다. 반란군에게 먹을 것을 주지않는 열렬 반대파와 정보원, 그리고 농민은 구타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공무원들과, 상인, 그리고 심지어는 비정부기구 마저 갈취를 당하는 상화이다. 모택동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당간부들은 교육이주는 사회적 혜택과 무기가 주는 공포와 명백한 사회적 실현을 결합해 문맹에다 무기력한 농민들을에게 혁명의 혜택을 설득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복잡한 문제들에 간단한 대답을 제시한다”고 인권보호 NGO, Insec의 수보드 라지 피야쿠렐 회장은 한숨을 내쉰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자들은 당신들이 필요하고 당신들은 그들이 필요치않다. 그들을 내 쫓아라. 그리고 만약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들을 죽여라”고 말한다.
“게릴라들은 1만에서 1만2천명의 전투원들과 1만5천명의 통합단계에 있는 민병대로 구성돼있다”고 전직 정부 교섭자인 N.S. 푼 중령은 말했다. 강제로 징집된 청소년이 많은 반면, 게릴라들은 아동 소년병들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의욕이 없고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7만7천명 경찰과 4만5천명의 군사들에 맞서 작전지를 잘 알고 기동력있는 게릴라들은 승리를 거듭하고있다.
극심한 빈곤으로 인한 게릴라 봉기
2003년 광신적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급성장은 네팔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천연자원이 전무한 이 국가는 국민의 71%가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살고 있으며 80%의 인구가 농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있다. “연 2.2%의 농업성장률로는 부족하다”고 카트만두 주재, 아시아 개발은행의 로랑 샤제 전문가는 설명한다. “농민들은 대부분 1/3헥타르의 토지도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네팔사회 내 불평등의 골은 매우 깊다. 국가 전체 소득의 46.5%가 인구 10%의 손에 돌아간다. 반면 수십만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사람들은 강가에서 자갈을 깨 하루 1/2달러를 받고 팔아 생계를 연명한다.
아동노동은 일반화 된 상태다. 네팔 비정부기구 CWIN에 다르면 12만7천명의 아동들이 한달에 채 4달러도 못되는 돈을 받으며 착취당하고 있다. CWIN측은 “90%의 경우가 통계에서 빠져있다”고 실상을 설명했다. 초등교육 외에 보건, 교육은 모두 유료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치품은 꿈도 못꿀 일이다. 그 결과 네팔인 3명중 2명은 문맹이고 매 2시간마다 여성들이 출산중 죽어간다. 국가예산 중 25% 이상이 네팔 이민자들이 해외에서 보낸 돈으로, 50%가 국제사회의 원조로 조달된다.
부정부패와 허울좋은 의회민주주의
부정부패 또한 만연화 돼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국제사회의 지원 중 단 3%만이 제대로 전달되고 나머지는 빼돌려진다. 엘리트들은 카스트제의 위계질서에 집착하고 사회의 최대 약자들을 걱정하는데 무감각하다. 일반시민들은 나라라면 신물이 난다. 농노제 폐지가 이뤄진 것은 2000년 7월에서였다. 22만6천명의 카마이야스, 즉 반 노예 상태의 농부들과 가족들이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사회적 차후 대책마련 조치없이 이루어진 농노제 폐지로 카마이야스들을 집과 일터를 모두 잃고 길로 나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3년 7월 통과된 예산의결은 이들에게 1년에 1/2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치열한 투쟁끝에 1990년 자리잡은 의회민주주의로 표현의 자유가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는 지역 유지들의 득세와, 부정부패, 카스트나 인종에 따른 차별, 고리, 전횡 등 봉건제적 관행을 인정했다.
14년만에 정부가 바뀐것만도 13번. 2002년 10월부터 기아넨드라(Gyanendra) 왕은 의회를 유명무실화하고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주무르고있다. “보수 엘리트들은 좌파 조차도 전통적 구조와 사회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국가의 통제가 전무한 상황에서 선거는 무의미하다”고 네팔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농촌지역에서 국가의 존재를 느낄수 있는 것은 사회보장제도가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 세금징수와 부패한 경찰들의 가혹행위, 2001년 6월 학살이후 권좌에 오른 권위적이고 인기없는 기아넨드라 왕이 그려져있는 지폐를 통해서다.
2003년 7월 7일 군 통제하에 있는 도시 고라히에서 군주제 기념식이 있었을 때 이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은 한명도 없을 정도다.
게다가 네팔 정부는 국제금융기구의 유도로 1992년부터 신자유주의 민영화과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나마 드물었던 공공서비스 마저 사라졌다. 식수와 치안이 시장의 손에 맡겨졌다. 아주 단기간의 경제적 호기 이후 새로운 소비자층이 생겨났다면 부정부패로 첫 투자자들은 네팔 시장을 등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가 폭력을 동원해 사회상황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92년부터 관찰자들은 ‘빛나는 오솔길’을 예로들며 네팔이 페루식 시나리오처럼 진행될 것을 예고했다. “카트만두의 부유층은 모택동주의자들의 공포만을 상기시키고 정작 그들이 튼튼한 사회적 기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남아시아인권포럼(SAHRF)의 회원이자 영국잡지 프론트라인 기자인 리타 만차다는 말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백이면 백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력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다”라고 진보 주간지 스포트라이트의 리말 마다브 쿠마르 국장은 지적했다.
모택동주의 공산게릴라들의 무력봉기
모택동주의 공산게릴라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단어는 ‘개발’이다. 그들은 의사와 도로, 다리, 전기, 수력발전 댐, 수확된 곡식 수출을 원한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은닉처에서 만난 공산당 간부들은 카스트상 낮은 신분의 젊은이들로 도시에서 교육을 받고 부패와 민영화 그리고 관광이 창출하는 부를 목격한 사람들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무장 투쟁에서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를 엿봤다. 가진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자리를 치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쿠크리를 가지고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다음 죽은 경찰의 무기를 들었다”고 루쿰 마을의 늙은 농부 야다브닌 회상했다. ‘인민전쟁’은 7년전 시작됐다. 현재 총 2천3백한 인구중 1천만이 ‘해방된’ 네팔에서 살고있다. 카트만두 언론은 중국과 대만과 마찬가지로 네팔에서도 ‘1국 2체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무력봉기는 절대적으로 국내적 차원에서 발발한 것이다. 인도나 중국으로부터의 어떠한 도움은 없었다. 유일한 외부로부터의 지지는 영국에 본부를 둔 모택동주의 지지자기구인 국제혁명운동(MRI)으로부터였다. MRI는 벵갈의 낙살리스트 게릴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터키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 공산당 같은 나머지 ‘빛나는 오솔길’들을 통합하는 조직이다.
MRI는 모택동주의 네팔 공산당(CPN-M)에게 투표를 거부하고 당국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도록 유도했다. 카트만두 주재 서방 대사관 무관은 모택동주의자 간부들이 인도에서 낙살리스트로부터, 페루의 공산 민병대 ‘빛나는 오솔길’로부터 훈련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또 네팔에는 퇴역 영국정예군 용병 구르카스, 전 유엔군 등 전쟁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 많다. 이들은 게릴라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반란은 지역 유지들을 공포에 떨게 하거나 죽이고 그나마 드문 국가시설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반란군들은 국가권력의 빈자리를 ‘참여시민’위원회(사미티)로 매웠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생활과, 부차적으로 밀고를 조장했다. 반란군에게 먹을 것을 주지않는 열렬 반대파와 정보원, 그리고 농민은 구타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공무원들과, 상인, 그리고 심지어는 비정부기구 마저 갈취를 당하는 상화이다. 모택동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당간부들은 교육이주는 사회적 혜택과 무기가 주는 공포와 명백한 사회적 실현을 결합해 문맹에다 무기력한 농민들을에게 혁명의 혜택을 설득했다. “모택동주의자들은 복잡한 문제들에 간단한 대답을 제시한다”고 인권보호 NGO, Insec의 수보드 라지 피야쿠렐 회장은 한숨을 내쉰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자들은 당신들이 필요하고 당신들은 그들이 필요치않다. 그들을 내 쫓아라. 그리고 만약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들을 죽여라”고 말한다.
“게릴라들은 1만에서 1만2천명의 전투원들과 1만5천명의 통합단계에 있는 민병대로 구성돼있다”고 전직 정부 교섭자인 N.S. 푼 중령은 말했다. 강제로 징집된 청소년이 많은 반면, 게릴라들은 아동 소년병들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의욕이 없고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7만7천명 경찰과 4만5천명의 군사들에 맞서 작전지를 잘 알고 기동력있는 게릴라들은 승리를 거듭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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