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할 정도로 문화강국, 과학강국이었음에도 아직도 책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번듯한 책박물관이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평생을 책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으로서 선조들에게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언젠가 미국 전 부통령 엘 고어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서양은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해 많은 책을 쉽고 값싸게 출판해 사람들을 계몽시켰다. 그 결과 역사를 혁명적으로 발전시켰고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한국은 구텐베르그보다 일찍 금속활자를 발명하고도 그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화봉책박물관’(www.rarebook.co.kr, 02-734-6071)을 개관한 여승구 관장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평생을 ‘고루한’ 고문서와 고서적을 찾아 돌아다니며 보내온 여 관장이 사재를 털어 ‘책박물관’을 낸 이유도 금속활자를 만든 선조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워야 한다는 그만의 ‘사명감’ 때문이다.
지난 10월 15일 개관해 ‘세계에서 제일 큰 책, 세계에서 제일 작은 책’ 기획전을 열고 있는 화봉책박물관 여승구 관장은 “지금이라도 국가가 나서서 번듯한 책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돋우었다.
책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는가
19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고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을 계기로 책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군생활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50여년간 책과 더불어 살았다. 박물관을 낸 이후 감회를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책이 생활 자체였기 때문에 솔직히 특별한 감회가 없다.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책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나는 책냄새를 맡을 수 없다.
지금까지 외국서적 수입, 중간유통, 서점 운영, 출판사 대표, 잡지 발행인, 책 수집 등 책에 관한 한 안해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모두 실패했다. 고서수집에 빠져 돈 버는 일에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새 책을 팔아 헌책을 샀으니 장사꾼으로서는 낙제점 아닌가.
박물관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
책방을 하던 지난 82년 3월에 ‘서울 북페어’ 행사를 열었다. 이게 아마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번째 북페어였던 것 같다. 당시 많은 언론에 이 행사가 크게 소개됐다.
이때 기사를 보고 당시 학원강사를 하던 사람이 찾아와 정지용·김기림 시집의 초판권과 현대소설 초판본 200여권을 팔아달라고 해 이 책들을 구입한 게 계기라면 계기다. 북페어를 통해 ‘한국문학작품 초판본 전시회’를 연 이후 이 책들을 팔려고 경매에 내놓았을 즈음 우연히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밥을 먹다가 ‘이 기회에 책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이 말이 그대로 씨가 됐다.
소장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책박물관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 고활자본 고판화본 문학서적 교과서 고지도 불경·성경 등 경전 영화포스터 등 오래된 출판물은 무엇이든 모았다. 모은 출판물들은 각각 그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두 빠지면 안되는 것들이다. 당연히 나에게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
특히 소장품중에는 춘향전만 340여점이고 천로역정도 100여점에 달한다. 전세계에서 출간된 춘향전을 모두 수집하고 싶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개관기념전을 위한 ‘세상에서 제일 큰 책, 세상에서 제일 작은 책’을 비롯해 이런 저런 모양과 종류의 책 9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서고에는 10만여점의 출판물들이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 책 못지않게 이선희 사진이 들어있는 80년대판 ‘포켓가요’ 도 모두 역사적 산물이다.
책을 수집하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다.
언젠가 1892년에 파리에서 나온 불어판 춘향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 센강가 작은 고서점 골목을 이잡듯 뒤진 적이 있다. 김옥균 암살 저격수인 홍종우가 파리 박물관으로 도망쳐 프랑스 사람과 함께 번역해 만든 책이다. 결국 프랑스에까지 갔다 구하지 못한 책을 우리나라에서 구했을 때 기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또 오사카에서 천로역정을 구해가지고 돌아올 때 밀수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집 필사본을 구해가지고 돌아오다 들뜬 나머지 택시에 지갑을 놓고 나와 굶으며 돌아다녔던 기억도 난다.
요즘 출판계가 극심한 불황인데.
요즘 우리나라 출판물중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은 물론 우리끼리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것이 없다. 제대로된 책은 불황도 이길 수 있다. 참 가슴아픈 일이다.
출판이라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사업으로만 볼 수도 없고 그만큼 출판인들에게 사명감과 품위를 요구한다.
항상 어려울수록 기본을 생각하고 원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가의 장래는 교육에 있고 교육의 중심은 대학이다. 그리고 대학의 수준을 대표하는 곳은 도서관이다.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은 ‘제일 안좋은 도서관’ 아닌가. 80년대 일본 ‘강담사’라는 출판사를 가본 적이 있다. 어지간한 한국자료를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불황을 견디는 힘은 이런데서 나온다고 본다. 특히 인문학과 철학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화가 그만큼 허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적으로 이같은 부분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박물관을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가.
오래 할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다. 갖고만 있으면 글자 그대로 ‘서랍속의 책’밖에 되지 않는다.
소장품을 가지고 연구해야 오래된 책이 현재에서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민족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당대 최고의 창조적 발상과 최고의 기술, 최고의 문화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한세기 뒤늦게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이로인해 책이 대중화되면서 민중이 계몽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문예부흥,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세계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는 세계를 바꾼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한국은 고전을 현대로 소화하는 공정이 부족했다. 짧은 시간 급격한 발전을 꾀하면서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난 경제성장과 효율화를 가져왔지만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일본은 고서점만 2000여개에 달한다. 이중 도쿄에만 1000여개가 몰려 있다. 물론 고객이 있으니 유지가 되는 것이다. 일본 고서점을 보면 일본사람들이 학문적으로 깊고 넓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고서점이 없다. 고작 인사동과 청계천의 헌책방이 전부다.
이제부터라도 문화유산으로서의 책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 특히 이런 일은 개인이 하기 어렵다. 국가 등 큰 조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기꺼이 내 임무를 넘길 것이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언젠가 미국 전 부통령 엘 고어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서양은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해 많은 책을 쉽고 값싸게 출판해 사람들을 계몽시켰다. 그 결과 역사를 혁명적으로 발전시켰고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한국은 구텐베르그보다 일찍 금속활자를 발명하고도 그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화봉책박물관’(www.rarebook.co.kr, 02-734-6071)을 개관한 여승구 관장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평생을 ‘고루한’ 고문서와 고서적을 찾아 돌아다니며 보내온 여 관장이 사재를 털어 ‘책박물관’을 낸 이유도 금속활자를 만든 선조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워야 한다는 그만의 ‘사명감’ 때문이다.
지난 10월 15일 개관해 ‘세계에서 제일 큰 책, 세계에서 제일 작은 책’ 기획전을 열고 있는 화봉책박물관 여승구 관장은 “지금이라도 국가가 나서서 번듯한 책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돋우었다.
책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는가
19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고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을 계기로 책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군생활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50여년간 책과 더불어 살았다. 박물관을 낸 이후 감회를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책이 생활 자체였기 때문에 솔직히 특별한 감회가 없다.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책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나는 책냄새를 맡을 수 없다.
지금까지 외국서적 수입, 중간유통, 서점 운영, 출판사 대표, 잡지 발행인, 책 수집 등 책에 관한 한 안해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모두 실패했다. 고서수집에 빠져 돈 버는 일에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새 책을 팔아 헌책을 샀으니 장사꾼으로서는 낙제점 아닌가.
박물관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
책방을 하던 지난 82년 3월에 ‘서울 북페어’ 행사를 열었다. 이게 아마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번째 북페어였던 것 같다. 당시 많은 언론에 이 행사가 크게 소개됐다.
이때 기사를 보고 당시 학원강사를 하던 사람이 찾아와 정지용·김기림 시집의 초판권과 현대소설 초판본 200여권을 팔아달라고 해 이 책들을 구입한 게 계기라면 계기다. 북페어를 통해 ‘한국문학작품 초판본 전시회’를 연 이후 이 책들을 팔려고 경매에 내놓았을 즈음 우연히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밥을 먹다가 ‘이 기회에 책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 이 말이 그대로 씨가 됐다.
소장품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책박물관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 고활자본 고판화본 문학서적 교과서 고지도 불경·성경 등 경전 영화포스터 등 오래된 출판물은 무엇이든 모았다. 모은 출판물들은 각각 그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두 빠지면 안되는 것들이다. 당연히 나에게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
특히 소장품중에는 춘향전만 340여점이고 천로역정도 100여점에 달한다. 전세계에서 출간된 춘향전을 모두 수집하고 싶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개관기념전을 위한 ‘세상에서 제일 큰 책, 세상에서 제일 작은 책’을 비롯해 이런 저런 모양과 종류의 책 9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서고에는 10만여점의 출판물들이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 책 못지않게 이선희 사진이 들어있는 80년대판 ‘포켓가요’ 도 모두 역사적 산물이다.
책을 수집하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다.
언젠가 1892년에 파리에서 나온 불어판 춘향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 센강가 작은 고서점 골목을 이잡듯 뒤진 적이 있다. 김옥균 암살 저격수인 홍종우가 파리 박물관으로 도망쳐 프랑스 사람과 함께 번역해 만든 책이다. 결국 프랑스에까지 갔다 구하지 못한 책을 우리나라에서 구했을 때 기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또 오사카에서 천로역정을 구해가지고 돌아올 때 밀수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집 필사본을 구해가지고 돌아오다 들뜬 나머지 택시에 지갑을 놓고 나와 굶으며 돌아다녔던 기억도 난다.
요즘 출판계가 극심한 불황인데.
요즘 우리나라 출판물중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은 물론 우리끼리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것이 없다. 제대로된 책은 불황도 이길 수 있다. 참 가슴아픈 일이다.
출판이라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사업으로만 볼 수도 없고 그만큼 출판인들에게 사명감과 품위를 요구한다.
항상 어려울수록 기본을 생각하고 원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가의 장래는 교육에 있고 교육의 중심은 대학이다. 그리고 대학의 수준을 대표하는 곳은 도서관이다.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은 ‘제일 안좋은 도서관’ 아닌가. 80년대 일본 ‘강담사’라는 출판사를 가본 적이 있다. 어지간한 한국자료를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불황을 견디는 힘은 이런데서 나온다고 본다. 특히 인문학과 철학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화가 그만큼 허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적으로 이같은 부분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박물관을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가.
오래 할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다. 갖고만 있으면 글자 그대로 ‘서랍속의 책’밖에 되지 않는다.
소장품을 가지고 연구해야 오래된 책이 현재에서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민족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당대 최고의 창조적 발상과 최고의 기술, 최고의 문화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다.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한세기 뒤늦게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이로인해 책이 대중화되면서 민중이 계몽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문예부흥,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세계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는 세계를 바꾼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한국은 고전을 현대로 소화하는 공정이 부족했다. 짧은 시간 급격한 발전을 꾀하면서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난 경제성장과 효율화를 가져왔지만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일본은 고서점만 2000여개에 달한다. 이중 도쿄에만 1000여개가 몰려 있다. 물론 고객이 있으니 유지가 되는 것이다. 일본 고서점을 보면 일본사람들이 학문적으로 깊고 넓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고서점이 없다. 고작 인사동과 청계천의 헌책방이 전부다.
이제부터라도 문화유산으로서의 책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 특히 이런 일은 개인이 하기 어렵다. 국가 등 큰 조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기꺼이 내 임무를 넘길 것이다.
/장유진 기자 yjch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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