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1세의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뒤를 이어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PCC) 총서기 직을 거쳐 2003년 3월 국가주석직에 올랐다. 그리고 올 9월 19일 78세의 장쩌민 전 중앙군사위 주석의 전격사임으로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맡으면서 당•정•군 총 3개 직책에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됐다.
후 주석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인물로 중국 내에서 ‘서민의 벗’같은 지도자로 입지를 굳혀가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도 외교 강자의 이미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중국공산지도자 제 4세대의 후는 당을 현대화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큰 목표로 삼고 있다. 또 상하이협력기구의 정상회담을 위해 유라시아 국가들을 순방하고, APEC정상회의에 앞서 남미 순방을 하는 등 제 3세계국가들과의 유대를 돈독히 해오며 미국의 일방주의에 견제역할을 했다. 한편, 지난 11월 21일 아태경제협력체(APEC) 참석차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회담했을 때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는 직격탄을 날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멀리서 친구가 오니 이 기쁨을 어찌하리오(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라는 식의 틀에 박힌 외교적 언사만 늘어놓을 뿐 핵심 논지를 잘 드러내지 않는 중국의 여타 지도자들과 다르다. 후 주석은 세계 정상들과 만나서 경직되지 않은 미소 속에서 자기 논지를 솔직하고 정확히 전달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도 한껏 발휘하고 있다.
한편, 후진타오의 이런 ‘실리주의 노선’에 대해 홍콩 링난대학의 폴 해리스 정치학자는 “후는 ‘지킬앤하이드’의 두 인물과 같이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피눈물도 없이 강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개혁적 인물이다”라고 묘사했다. 그의 출생지는 공식적으로는 중국 동부의 안휘성 지씨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후는 1959년∼1964년 중국정치지도자들의 가장 큰 양성소인 북경 칭화대학교에서 수력관련 기술자가 되기위한 과정을 밟았으며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인 리유용칭을 만났다. 현재 둘사이에 아들 딸 하나씩을 두고있다. 1964년 친화대에서 고위직을 맡고있었으나 1966년 문화혁명 초기시절 사임했다. 그 후 1968년부터 북서부의 간쑤성으로 보내져 댐건설 기술자로 근무하다 지방건설위원회 비서직을 맡는다.
1982년 전국청년공산연맹에서 활동하고 43세에 간쑤성에서 지방에서 가장 젊은 당서기가된다. 1988년 말 후는 티벳 당서기를 맡았으며 1989년 3월에 있은 티벳 독립시위에 강경히 대응했다. 이로써 그는 후요방 총서기가 시작한 10년간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1992년 핵심권부인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1997년 덩의 죽음도 그의 승승장구를 막지 못했다.
이지혜, 황은하 리포터 hislight@naeil.com
후 주석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인물로 중국 내에서 ‘서민의 벗’같은 지도자로 입지를 굳혀가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도 외교 강자의 이미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중국공산지도자 제 4세대의 후는 당을 현대화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큰 목표로 삼고 있다. 또 상하이협력기구의 정상회담을 위해 유라시아 국가들을 순방하고, APEC정상회의에 앞서 남미 순방을 하는 등 제 3세계국가들과의 유대를 돈독히 해오며 미국의 일방주의에 견제역할을 했다. 한편, 지난 11월 21일 아태경제협력체(APEC) 참석차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회담했을 때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는 직격탄을 날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멀리서 친구가 오니 이 기쁨을 어찌하리오(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라는 식의 틀에 박힌 외교적 언사만 늘어놓을 뿐 핵심 논지를 잘 드러내지 않는 중국의 여타 지도자들과 다르다. 후 주석은 세계 정상들과 만나서 경직되지 않은 미소 속에서 자기 논지를 솔직하고 정확히 전달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도 한껏 발휘하고 있다.
한편, 후진타오의 이런 ‘실리주의 노선’에 대해 홍콩 링난대학의 폴 해리스 정치학자는 “후는 ‘지킬앤하이드’의 두 인물과 같이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피눈물도 없이 강경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개혁적 인물이다”라고 묘사했다. 그의 출생지는 공식적으로는 중국 동부의 안휘성 지씨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후는 1959년∼1964년 중국정치지도자들의 가장 큰 양성소인 북경 칭화대학교에서 수력관련 기술자가 되기위한 과정을 밟았으며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인 리유용칭을 만났다. 현재 둘사이에 아들 딸 하나씩을 두고있다. 1964년 친화대에서 고위직을 맡고있었으나 1966년 문화혁명 초기시절 사임했다. 그 후 1968년부터 북서부의 간쑤성으로 보내져 댐건설 기술자로 근무하다 지방건설위원회 비서직을 맡는다.
1982년 전국청년공산연맹에서 활동하고 43세에 간쑤성에서 지방에서 가장 젊은 당서기가된다. 1988년 말 후는 티벳 당서기를 맡았으며 1989년 3월에 있은 티벳 독립시위에 강경히 대응했다. 이로써 그는 후요방 총서기가 시작한 10년간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1992년 핵심권부인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1997년 덩의 죽음도 그의 승승장구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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