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부터 매주 수요일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시리즈를 시작합니다.총 25회에 걸칠 이 연재는 우리사회 서민직업인의 일과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살핀 보고서가 될것입니다
그의 휴대폰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는 번번이 엇갈렸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일하는 백철금속은 주한미군 쿠니 사격장으로 유명한 매향리에 있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평균 600~700회에 달하는 폭격 훈련을 견디다 못해 전 주민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던 바로 그곳.
“군사보호구역이라 휴대폰 통화가 어려워요. 진짜 괴로운 건 폭음이죠. 처음에 숙소에서 잘 때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한 시고 두 시고 폭격 시작되면 놀래서 일어나고. 잠깐잠깐 쪽잠을 자다가 그냥 출근하는 거죠. 이젠 면역이 돼서 괜찮아요. 니들은 폭격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잘란다….”
‘나는 잘란다’에 실린 구성진 가락이 녹록치 않은 그의 이력을 말해주는 듯한데, 말갛게 웃는 얼굴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백철금속은 녹이 슬지 않는 철, 스테인리스 제강 회사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주로 자동차나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로 팔려나간다. 작업 현장을 보여 주겠다며 회사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현석 씨의 어깨에 파스가 붙어 있다.
“아, 이거요? 30킬로짜리 마대를 들어 올렸는데 근육이 놀랬나 봐요.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며 그가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고철더미가 작은 산을 이룬 백철금속 정문 안마당. 노란 크레인 한 대가 부지런히 고철 마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저 고철들을 압축해서 유도로에 넣고 16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가열하면 펄펄 끓는 쇳물이 돼요. 그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니켈, 크롬 등의 성분을 첨가하는 정련 작업(AOD)이 바로 제가 하는 일이죠.”
박현석 씨(28세)는 쇳물을 정련하는 부서 화이트메탈의 중고참. 30대 동료들이 많은 현장에선 다소 ‘어린 축’에 들지만, 95년부터 줄곧 금속일을 해 온 탓에 이젠 ‘현장만 딱 보면 척 하고 감이 잡히는’ 베테랑이다.
기본 작업은 컴퓨터로 처리하지만 현장에서 수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전기로 크레인을 불러서 정련이 끝난 150톤짜리 래들(쇳물을 담는 용기)을 다음 공정인 연주에 보내는 일, 쇳물의 온도를 체크하고 올려주는 일, 쇳물의 녹이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코크스나 생석회 마대를 던져 넣는 일까지 모두 AOD에서 처리해야 한다. 무거운 마대를 휙휙 던져 넣다가 박현석 씨처럼 근육이 상하기도 한다. 철강업계에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쇳물의 온도를 1700도까지 끌어올린 다음에 10분 동안 재빨리 일을 해치워야 돼요. 온도가 1620도 이하로 떨어지면 다음 공정(연주)에서 주조를 못하거든요. 쇳물이 나오다가 그냥 막혀 버려요. 그러면 LF라고 해서 우리가 다시 온도를 올려 줘요.”
연주에서 뽑아내는 빌릿(Billet)의 무게는 무려 1톤. 시뻘건 불기둥이 내뿜는 열기가 후끈하다. 이 거대하고 육중한 빌릿은 압연과 가공 과정을 거쳐 갖가지 규격의 스테인리스 환봉으로 완성된다.
박현석 씨가 백철금속에 입사한 것은 1999년.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니려고 중간에 잠시 퇴사했다가 재입사한 기간을 빼도, 이 공장에서 근무한 햇수만 4년이 넘는다. 94년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직업전문학교 금속과 1년 과정을 수료한 그는 금속주조 금속재료 기능사 자격증을 차례로 거머쥐었다. 그 후 순수하게 금속 일에만 매달려온 세월이 8년. 첫 직장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열처리 공장이었다.
“뿌레카(breaker, 포크레인 굴삭기)라고 아세요? 차타고 가다 보면 도로 땅땅땅 하고 깨잖아요. 그 장비 일체를 가공하고 열처리하는 곳이에요.”
월급 120만원에 보너스 400프로. 당시로서 나쁘지 않은 대우였지만 일이 너무나 고됐다. 고3 때 허리 36을 입을 만큼 ‘등빨’이 좋았던 체격은 졸아붙을 대로 졸아붙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날씬한 체격으로 변했다. “솔직히 되게 힘들었어요. 일하다 코피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죽어라 하니까 차차 일이 몸에 익데요.”
폼나게’ 살고 싶은 스무 살 나이, 그는 왜 남들이 3D 업종이라 부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곳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을까.
“아버님이 농기계 만지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되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지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직업전문학교에서 기술을 배워가지고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고 좀 있으니까 IMF가 딱 터진 거예요. 기업 연쇄부도가 나고 대학생들 취직을 하네 못하네 하는 걸 보니까 대학보다는 그냥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제일 낫겠더라구요.”
‘안정된 생활’이 그의 삶에서 중요한 미덕이 된 것은 성장기에 두 번의 혹독한 경험을 치른 후부터다. 전라도 무안에서 태어난 그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부유한 농가의 장손이었다. 알부자로 소문난 그의 집에는 콤바인, 이앙기, 트랙터 등 없는 농기계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연히 노름에 손을 대면서 그의 가족은 ‘돈’도 ‘갈퀴’도 다 잃어버렸다.
또 한 번의 위기는 고등학교 입학 직후에 찾아왔다. 오토바이를 몰고 약국에 가다가 신호대기 중에 택시에 치였는데, 21미터를 날아간 그는 한 달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일곱 번의 대수술을 거쳐 가까스로 이어붙인 오른쪽 쇄골은 왼쪽 것보다 현저히 짧다. 목숨을 앗아갈 뻔한 ‘약국 앞 그 자리’를 잊고 싶어 집도 학교도 성남으로 옮겼다.
불은 강철을 단련시키고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던가. 성장기의 아픈 경험은 현석 씨를 일찍 철들게 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른생활 사나이’. 일할 때 몸 사리지 않고, 이유 없이 결근하는 일이 없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도 회식 날은 제일 바쁘다. 술 취한 동료들을 집까지 안전하게 ''수송''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어울려 탁구나 볼링을 치는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소중한 일과다. “회사에서 탁구 치면 제가 다 이겨요. 초등학교 때 탁구선수였거든요.”
그의 월급은 기본급 88만 원에 제 수당을 합해서 2백만 원 선. 1주일에 70시간 가까이 일하고, 한 달의 반은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는 8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머리띠를 동여매기도 했다. 회사는 소사장제를 도입했다.
“부서마다 별개의 사업체처럼 세무사를 두고 임금이며 세금을 따로 처리하니 회사로서도 이득이죠. 하지만 큰 불편사항은 없어요. 회사에서 알아서 대우를 잘 해주는 편이니까요.”
박현석 씨는 노후 장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라인 작업''의 특성상 기계 하나가 고장 나면 전체 부서가 일을 멈추게 되는데 낡아빠진 기계를 적당히 보수해서 쓰고 또 쓸 뿐이다.
“80명의 금속과 동기들 중에 전공 살려서 금속 일 하는 사람은 저 하나예요. 그만큼 힘들단 애기죠. 옛날에는 3D 업종이라 했잖아요. 하지만 경기도 어려운데 그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일합니까. 다행히 저한테는 이 금속 일이 맞는 거 같아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호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기술은 못 배워요. 솔직히 요즘 기술 없으면 누가 쓰기나 하나요.”
베테랑 일꾼으로서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성실성은 그의 큰 자산이다. 그 자부심과 경험을 밑천으로 한 십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내 장사’를 하고 싶다는 박현석 씨. 십년 후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는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이 돼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오빠 같은 사람 없어요”
지난 봄, 치과 조무사로 일하는 오인영(25세) 씨와 결혼한 박현석 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직은 따로 분가할 형편이 못된다. 부모님이 빌라를 구입하면서 대출한 돈을 갚는 데 그의 월급이 통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와이프한테 미안하지요. 제 상황을 이해해 주니까 너무 고맙고요. 앞으로 2년만 고생하면 빚은 다 해결돼요. 분가하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거예요. 우선 양가 부모님들 해외여행부터 시켜 드리려고요.”
‘성실한 거 하나 믿고’ 결혼했다는 인영 씨는 ‘암만 주변을 둘러봐도 오빠 같은 사람 없더라’는 말로 남편을 추켜세운다. “오빠 1주일 용돈이 2만 원인데요. 쓸 일이 없다고 그것도 맨날 남겨 와요. 아무리 피곤해도 한 달에 두 번은 꼭꼭 친정에 가서 자고요.”
그 자분자분한 설명에 귀 기울이노라면 ‘이런 남자를 안 믿고 누굴 믿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영 씨의 월급은 120만 원. 나중에 전셋집이라도 장만하기 위해 약간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축하고 있다.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은 있느냐는 질문에, “침대에 누워서 하지요!” 하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선한 눈매며 수줍은 웃음이 오누이처럼 닮은 부부. 그들의 착한 꿈이 알찬 결실을 맺을 그 날을 기대해 본다.
/김기선 객원기자·사진 백지순
그의 휴대폰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는 번번이 엇갈렸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일하는 백철금속은 주한미군 쿠니 사격장으로 유명한 매향리에 있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평균 600~700회에 달하는 폭격 훈련을 견디다 못해 전 주민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던 바로 그곳.
“군사보호구역이라 휴대폰 통화가 어려워요. 진짜 괴로운 건 폭음이죠. 처음에 숙소에서 잘 때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한 시고 두 시고 폭격 시작되면 놀래서 일어나고. 잠깐잠깐 쪽잠을 자다가 그냥 출근하는 거죠. 이젠 면역이 돼서 괜찮아요. 니들은 폭격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잘란다….”
‘나는 잘란다’에 실린 구성진 가락이 녹록치 않은 그의 이력을 말해주는 듯한데, 말갛게 웃는 얼굴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백철금속은 녹이 슬지 않는 철, 스테인리스 제강 회사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주로 자동차나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로 팔려나간다. 작업 현장을 보여 주겠다며 회사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현석 씨의 어깨에 파스가 붙어 있다.
“아, 이거요? 30킬로짜리 마대를 들어 올렸는데 근육이 놀랬나 봐요.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며 그가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고철더미가 작은 산을 이룬 백철금속 정문 안마당. 노란 크레인 한 대가 부지런히 고철 마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저 고철들을 압축해서 유도로에 넣고 16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가열하면 펄펄 끓는 쇳물이 돼요. 그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니켈, 크롬 등의 성분을 첨가하는 정련 작업(AOD)이 바로 제가 하는 일이죠.”
박현석 씨(28세)는 쇳물을 정련하는 부서 화이트메탈의 중고참. 30대 동료들이 많은 현장에선 다소 ‘어린 축’에 들지만, 95년부터 줄곧 금속일을 해 온 탓에 이젠 ‘현장만 딱 보면 척 하고 감이 잡히는’ 베테랑이다.
기본 작업은 컴퓨터로 처리하지만 현장에서 수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전기로 크레인을 불러서 정련이 끝난 150톤짜리 래들(쇳물을 담는 용기)을 다음 공정인 연주에 보내는 일, 쇳물의 온도를 체크하고 올려주는 일, 쇳물의 녹이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코크스나 생석회 마대를 던져 넣는 일까지 모두 AOD에서 처리해야 한다. 무거운 마대를 휙휙 던져 넣다가 박현석 씨처럼 근육이 상하기도 한다. 철강업계에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쇳물의 온도를 1700도까지 끌어올린 다음에 10분 동안 재빨리 일을 해치워야 돼요. 온도가 1620도 이하로 떨어지면 다음 공정(연주)에서 주조를 못하거든요. 쇳물이 나오다가 그냥 막혀 버려요. 그러면 LF라고 해서 우리가 다시 온도를 올려 줘요.”
연주에서 뽑아내는 빌릿(Billet)의 무게는 무려 1톤. 시뻘건 불기둥이 내뿜는 열기가 후끈하다. 이 거대하고 육중한 빌릿은 압연과 가공 과정을 거쳐 갖가지 규격의 스테인리스 환봉으로 완성된다.
박현석 씨가 백철금속에 입사한 것은 1999년.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니려고 중간에 잠시 퇴사했다가 재입사한 기간을 빼도, 이 공장에서 근무한 햇수만 4년이 넘는다. 94년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인천직업전문학교 금속과 1년 과정을 수료한 그는 금속주조 금속재료 기능사 자격증을 차례로 거머쥐었다. 그 후 순수하게 금속 일에만 매달려온 세월이 8년. 첫 직장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열처리 공장이었다.
“뿌레카(breaker, 포크레인 굴삭기)라고 아세요? 차타고 가다 보면 도로 땅땅땅 하고 깨잖아요. 그 장비 일체를 가공하고 열처리하는 곳이에요.”
월급 120만원에 보너스 400프로. 당시로서 나쁘지 않은 대우였지만 일이 너무나 고됐다. 고3 때 허리 36을 입을 만큼 ‘등빨’이 좋았던 체격은 졸아붙을 대로 졸아붙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날씬한 체격으로 변했다. “솔직히 되게 힘들었어요. 일하다 코피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죽어라 하니까 차차 일이 몸에 익데요.”
폼나게’ 살고 싶은 스무 살 나이, 그는 왜 남들이 3D 업종이라 부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곳을 첫 직장으로 선택했을까.
“아버님이 농기계 만지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되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지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직업전문학교에서 기술을 배워가지고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고 좀 있으니까 IMF가 딱 터진 거예요. 기업 연쇄부도가 나고 대학생들 취직을 하네 못하네 하는 걸 보니까 대학보다는 그냥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는 게 제일 낫겠더라구요.”
‘안정된 생활’이 그의 삶에서 중요한 미덕이 된 것은 성장기에 두 번의 혹독한 경험을 치른 후부터다. 전라도 무안에서 태어난 그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부유한 농가의 장손이었다. 알부자로 소문난 그의 집에는 콤바인, 이앙기, 트랙터 등 없는 농기계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연히 노름에 손을 대면서 그의 가족은 ‘돈’도 ‘갈퀴’도 다 잃어버렸다.
또 한 번의 위기는 고등학교 입학 직후에 찾아왔다. 오토바이를 몰고 약국에 가다가 신호대기 중에 택시에 치였는데, 21미터를 날아간 그는 한 달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일곱 번의 대수술을 거쳐 가까스로 이어붙인 오른쪽 쇄골은 왼쪽 것보다 현저히 짧다. 목숨을 앗아갈 뻔한 ‘약국 앞 그 자리’를 잊고 싶어 집도 학교도 성남으로 옮겼다.
불은 강철을 단련시키고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던가. 성장기의 아픈 경험은 현석 씨를 일찍 철들게 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른생활 사나이’. 일할 때 몸 사리지 않고, 이유 없이 결근하는 일이 없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도 회식 날은 제일 바쁘다. 술 취한 동료들을 집까지 안전하게 ''수송''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동료들과 어울려 탁구나 볼링을 치는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소중한 일과다. “회사에서 탁구 치면 제가 다 이겨요. 초등학교 때 탁구선수였거든요.”
그의 월급은 기본급 88만 원에 제 수당을 합해서 2백만 원 선. 1주일에 70시간 가까이 일하고, 한 달의 반은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는 8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머리띠를 동여매기도 했다. 회사는 소사장제를 도입했다.
“부서마다 별개의 사업체처럼 세무사를 두고 임금이며 세금을 따로 처리하니 회사로서도 이득이죠. 하지만 큰 불편사항은 없어요. 회사에서 알아서 대우를 잘 해주는 편이니까요.”
박현석 씨는 노후 장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라인 작업''의 특성상 기계 하나가 고장 나면 전체 부서가 일을 멈추게 되는데 낡아빠진 기계를 적당히 보수해서 쓰고 또 쓸 뿐이다.
“80명의 금속과 동기들 중에 전공 살려서 금속 일 하는 사람은 저 하나예요. 그만큼 힘들단 애기죠. 옛날에는 3D 업종이라 했잖아요. 하지만 경기도 어려운데 그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일합니까. 다행히 저한테는 이 금속 일이 맞는 거 같아요.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호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기술은 못 배워요. 솔직히 요즘 기술 없으면 누가 쓰기나 하나요.”
베테랑 일꾼으로서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성실성은 그의 큰 자산이다. 그 자부심과 경험을 밑천으로 한 십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내 장사’를 하고 싶다는 박현석 씨. 십년 후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는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이 돼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사람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오빠 같은 사람 없어요”
지난 봄, 치과 조무사로 일하는 오인영(25세) 씨와 결혼한 박현석 씨는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직은 따로 분가할 형편이 못된다. 부모님이 빌라를 구입하면서 대출한 돈을 갚는 데 그의 월급이 통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와이프한테 미안하지요. 제 상황을 이해해 주니까 너무 고맙고요. 앞으로 2년만 고생하면 빚은 다 해결돼요. 분가하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거예요. 우선 양가 부모님들 해외여행부터 시켜 드리려고요.”
‘성실한 거 하나 믿고’ 결혼했다는 인영 씨는 ‘암만 주변을 둘러봐도 오빠 같은 사람 없더라’는 말로 남편을 추켜세운다. “오빠 1주일 용돈이 2만 원인데요. 쓸 일이 없다고 그것도 맨날 남겨 와요. 아무리 피곤해도 한 달에 두 번은 꼭꼭 친정에 가서 자고요.”
그 자분자분한 설명에 귀 기울이노라면 ‘이런 남자를 안 믿고 누굴 믿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영 씨의 월급은 120만 원. 나중에 전셋집이라도 장만하기 위해 약간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축하고 있다.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은 있느냐는 질문에, “침대에 누워서 하지요!” 하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선한 눈매며 수줍은 웃음이 오누이처럼 닮은 부부. 그들의 착한 꿈이 알찬 결실을 맺을 그 날을 기대해 본다.
/김기선 객원기자·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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