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은 가깝고 이념은 멀다’

정치는 집중, 경제는 분산 … 全人代, 조화사회 구현 내세워

지역내일 2005-03-25 (수정 2005-04-01 오전 8:34:14)
세계 경제는 초기 산업자본주의를 훌쩍 뛰어넘어 기왕의 분석 틀로는 예측이나 설명이 어려운 구조로 변화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나머지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전 세계가 단일 시장 경제로 편입되는 과정은 과거 시민혁명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시장 경제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높아지고 있다. 본지는 시장 경제의 위상 변화와 그에 따른 한국 경제와 노사의 대응 방식을,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대륙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이 스탈린식 5개년계획을 따르다 실패하자,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혁명적 열기로 경제를 일으키려 했다. 그렇게 해서 1958년 마오의 현지지도하에 중국 전역에 걸쳐 이른바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오가 ''공산주의 에덴동산''이라 부른 인민공사는 수십만 농가를 하나의 생산단위라는 명목 하에 집단 거주시켰고, 숟가락을 포함한 모든 사적 소유물을 접수했으며, 밥솥을 포함한 대부분의 쇠붙이를 제련소로 보냈다.

졸지에 살림이 거덜 났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조직적인 태업으로 저항했다. 대대로 이어졌던 농지 경작이 사라지고 기상이변까지 겹치면서 기근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중국사 전문가인 벤자민 양은 자신의 책에서 중국의 보고서를 빌어 ‘이후 3년간 진행된 대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어림잡아 3000만명’이라 적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주석 마오와 당 서기인 덩샤오핑은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그러나 마오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덩은 혼란에 빠졌다. 대약진운동을 반대하던 숱한 간부들이 숙청당했고, 결국 저우언라이(주은래) 등의 주도로 이 운동은 3년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마오는 과오를 인정하는 대신 더 큰 운동을 준비했는데 그것이 문화대혁명이다. 일찌감치 마오의 불신을 산 까닭에, 덩은 문혁 기간인 69년 이른바 하방(下防)이라는 유배길에 올랐다.
그렇지만 마오는 당내의 모든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이면 어김없이 덩을 찾았고, 그 덕에 덩은 73년 하방을 끝내고 마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어 문혁의 마감이 임박한 1975년 마오는 병중인 저우언라이 대신 부총리인 덩에게 당과 정부를 맡겼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4%였는데 그해 성장률은 11.9%로 뛰었다. 이듬해 4인방의 음모로 덩이 다시 실각하자, 성장률은 1.7%로 되돌아갔다.
마오가 사망한 당다음 해인 1977년 국무원 총리에 복귀한 덩은 본격적으로 경제를 이끌었다. 이전 20년간 중국의 일인당 연평균 곡물 생산량 증가율은 0.2%였다. 그러나 그해 이후 6년 동안 증가율은 3.8%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육류생산량은 1.7%에서 9%로, 면화는 0.6%에서 17.5%로 증가했다.
실용주의를 반대하던 화궈펑이 실각하고 덩이 당을 장악한 때는 1981년. 덩은 먼저 자오쯔양이 시도한 ''농업생산책임제''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농촌개혁의 불을 지폈다. 이듬해에는 대약진운동의 산물인 인민공사, 생산연대, 생산소조 등을 한꺼번에 철폐하고 대신 시장원리에 기반을 둔 농지법 개정을 추진했다. 농민들은 50년대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기른 곡물을 당당하게 팔 수 있었다.

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중국은 1979년부터 선전, 주하이 등에 경제특구를 설립했는데, 84년 2월 이들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온 덩은 특구를 연안 도시와 인근 섬으로 대폭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이전의 특구가 무역에 주력했다면 이제부터는 외자유치와 도시개발에 주력할 참이었다. 중국 사회가 본격적인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해부터 중국 경제는 고속 성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덩은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덩은 한 공개 심포지엄에서 자신이 경제학 분야에 문외한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덩은 중국의 무엇이 잘못되어 있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누구에게 일을 맡겨야 할 지 알았다. 덩이 일관되게 내린 지시는 한 가지, “개혁개방을 더욱 힘 있게 추진할 것”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는 사회주의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러한 명료함과 단호함에 힘입어 공산당은 농촌개혁에서 도시개혁으로 당력을 순조롭게 이행시켰고, 60만 핵심 관료 중 20만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윽고 덩이 일선에서 물러날 즈음, 시장경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덩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 이래 20년간 중국 경제는 연평균 9.6% 씩 성장했고, 그 열기는 여전히 수그러들 줄 모른다.
중국 경제는 2003년에 9.1%의 성장률과 1인당 GDP 1090달러를 달성했다(1000달러를 중국의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4700달러). 더불어 지난 19일 국무원 산하 발전연구센터는 중국이 2010년까지 연평균 8%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유지, 1인당 GDP 1700달러를 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2위이며, 해외직접투자 유치 금액은 2002년부터 1위로 올라섰다.
경제 분야만큼이나 덩이 외교 분야에서 일으킨 변화도 크다. 마오가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부른 반면 덩은 미국을 배우라고 아들을 내보냈다. 덩의 지도하에 79년에는 미국과, 92년에는 한국과 각각 국교를 수립했는데, 경제개혁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인 덩이 외교정책에서 지극히 신중하다는 점은 서방 인사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특히 대미관계에서 그러했는데, 그가 평소 건넨 “단호하게 대처하고 재주껏 이용하라”는 말은 이후 중국의 대미정책에 지침이 될 정도였다.
1992년 남순강화를 마치고 개혁개방을 더욱 촉구할 당시, 덩은 중국의 일반 외교 노선을 스물네 자 방침으로 정리한 바 있다. 그중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인용한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韜光養晦)”, 이 경구는 경제적 성취에 자만하지 말고 초강대국이 될 때까지 실력을 키우라는 당부로 이해된다. 이 해 제14차 당 대회에서 공산당은 비로소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공식 노선으로 채택했다.
덩 사후 시장경제는 맹렬하게 확대되어 이제는 비중 면에서 사회주의 부문을 압도한다. 1978년까지만 해도 거의 존재하지 않던 민간 기업이 전체 기업의 65%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대개 기간산업에 속한다. 향진기업법에 따라 성장한 농촌 사기업은 2115만개를 초과, 방대한 농촌 인구를 시장으로 흡수했다.
사회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시장경제는 공식 경제체제이고 사유제산제는 헌법으로 보장되며, 기업가는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다. 정치의 집중과 경제의 분산은 중국인들에게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덩에서 후진타오에 이르는 당 수뇌부는 이를 일관되게 강화해 왔다. 지난 3월에 열린 제10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全人代)는 경제의 측면에서 보면 시장경제의 성과를 과시하고, 그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를 예측하고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 현 주석은 이 대회에서 ‘과학적 발전관’과 이에 기초한 순환경제 발전, 조화 사회 건설, 창조 대국 건설이라는 3대 과제를 내놓았다. 그중 중국 공산당이 향후의 진로와 관련하여 가장 중시하는 대목은 어디일까? 이에 관해 베이징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진징이 소장은 “한마디로 조화사회의 구현 여부”라고 잘라 말한다.
덩샤오핑 이후 장기간의 고도성장이 중국을 샤오캉(小强, 사회주의 초기 단계의 복지사회를 의미) 사회로 이끌었다면, 이제는 그로 인해 벌어질 사회적 갈등을 대비하고 치유하는 데 당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 소장은 이 갈등의 진원이 시장경제로부터 올 것이라는 우려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시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구에서 겪었던 시장의 폐해를, 서구와 다른 정치 체제로써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시장경제에 고유한 경기 순환과 실업의 문제에서 빈부격차와 지역간 불균형 발전에 이르기까지, 공산당이 당면한 문제는 결국 당의 운명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하지만 자신감도 크다.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으로 알려진 꾸이저우성 서기 출신이며 일찍 덩에게 발탁되어 개혁개방에 앞장 서 왔다. 그동안 동남부 연안에 집중된 시장경제를 국토 전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포부는 그가 아니면 품기 어렵다는 것이 진 소장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장원리에 입각한 경제체제 앞에 놓인,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복권 전인 1980년에 이미 덩이 “사회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사상해방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서 그의 고심을 살필 수 있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건, 장기적으로 시장경제는 점점 더 많은 대중을 포섭할 것이며, 때문에 당의 통제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체제에게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당의 지도력을 의미하며, 현 지도부는 덩샤오핑의 후견 아래 큰 마지막 지도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 중국 지도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하나, 기존의 사회주의 사상을 등소평 사상으로 대체하고 그로부터 시장경제와 부합하는 사회주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뿐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과연 그런 방식으로 당 이념을 대체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에 관해 낙관하는 입장은, 중화인 특유의 대륙적 기질을 근거로 든다. 중국인들이 잘 아는 이야기가 있다. 마오쩌둥은 서방 외교관을 만나면 자신의 조상들에 관해 자랑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공자(孔子)를 ''최고의 철학자''라 불렀다는 것이다. 중화사상 안에 모두 하나라는 뜻이다.
거꾸로 당 자체도 시장경제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최근 중국 국무원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자가 한국 제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한 관리가 서슴없이 답했다. “삼성 애니콜로 전화하고, LG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현대 쏘나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베이징 시내에 얼마든지 있다.”
사회주의 이념이 어떻게 변하든, 그 기치 하에 중국인들을 이끌고 가려면 전제가 따른다. 그것은 덩이 말한 대로 ‘50년, 100년, 생산력을 차질 없이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시장경제의 확대를 가속화시킨다. 우리가 후진타오 체제의 조화사회 구현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글·사진 김선태 기자 ks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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