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인 과장에겐 스물한 살 난 아들이 있다.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할 때 그는 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까지 만나고서야 원서를 쓸 수 있었다. “공부도 잘하는 애를 왜 공고에 보내려느냐”며 마감날까지 원서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대학갈 생각밖에 안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겁니다. 똑똑한 애들이 산업 현장에 가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아들의 입학과 함께 집도 직장이 있는 거제도에서 부산의 아들 학교 바로 코앞으로 옮겼다. “제대로 기술을 익히려면 촌음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2학년 때 아들을 ‘그 분야에선 알아주는’ 그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역시 학교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써야했다. “지도교사가 기술이 영 별로여서 정말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옮겼죠.”
정밀기기를 전공한 아들 조진영씨는 작년에 전국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 수상자는 금오공대나 산업기술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이 있는데, 그는 이번에도 세태와는 다른 길을 아들에게 권했다. 진영씨는 올해 삼성중공업에 기능직사원으로 입사했다. 신입사원 중에 병역 미필자는 진영씨가 유일했다. 그만큼 진영씨의 ‘기술’을 인정해준 것이다.
다른 길이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사회적으로 그리 대접받는 분야도 아닌 길로 주저 없이 아들을 이끄는 일은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살아온 방식에 대한 태산 같은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전북 위도가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정읍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수업료를 제때 못내 교무실로 숱하게 불려다니다 내린 결정이었다. 영등포역에 내리자 사방 천지가 모집공고였으나 나이가 어려선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고향친구의 소개로 “미아리 25번 종점” 근처에 있던 나전칠기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연탄 가는 일’이었다. 칠을 마르게 하기 위해 밤새 연탄을 활활 태우고 꺼지지 않게 갈아대야 했다. “옥상에 올라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근데 기술자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더라고요. ‘왕’이 따로 없어요. 그래서 결심을 했죠. 기술을 배우자.”
상경 6개월쯤 지난 다음 집에다 편지를 보냈더니 아버지가 올라와 성남에서 공장에 다니던 누나와 함께 있으라며 그를 그곳에서 끌어냈고, 그는 가방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 학원을 다녔다.
“한다면 하는 못된 성격”에다 “손재주를 타고 난” 그는 짧은 기간에 재단사까지 올랐고, 저녁엔 학원에서 중장비 운전기술이며 자동차 정비기술 등을 익혔다. 그러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기술이 영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배달원이 툭 던져놓고 간 신문에서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리직업전문학교의 학생 모집 공고였다. 4시쯤 일을 끝내고 밥도 못 먹고 학원으로 내달리던 그를 위해 밥을 차려주던 맘씨 고운 사장님 부부는 그가 떠난다고 하자 아들을 보내는 양 눈물을 흘리며 붙잡았다. “월급을 더 주겠다”고도 하고 “운전을 배워 내 차를 몰아라”고도 했지만 “기술다운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를 막지는 못했다. 81년 3월 이리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업배관과정을 수료한 뒤 82년 7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기능직 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24년째인 현재 조성인씨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기술연수원 과장이다. 기술연수원은 기능직 사원의 기술훈련, 대졸 신입사원 교육, 외국어 및 정보화교육, 다기능화 교육, 사내 기능경기대회 등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는 기능과 관련된 교육을 총괄하는 한편 대졸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도 한다. 작년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의 한 부문으로 신설된 ‘산업체 근로자 기능경기대회’에 선수들을 이끌고 참여하여 종합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연수원 김병영 원장이 귀띔해 준 바에 따르면 그는 별명이 ‘독종’이다.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요, “한번 한다 하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관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입사했던 그가 1급 자격증을 딸 때의 일화가 그가 얼마나 ‘독종’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는 휴일이면 직업전문학교 시절 그를 아꼈던 선생님을 찾아가 일종의 ‘과외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로선 거금이었던 60만원을 들여 배관 장비를 아파트 뒷베란다에 설치해놓고 혼자 실습을 했다. 최선을 다해 악착같이 배우려는 자세, “원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낮이고 밤이고 매달리는” 근면함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주었다.
“한 10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느 날 사무직으로 발령을 내주더군요. 그런데 발령받은 데가 어디냐 하면 외국에서 오는 ‘서비스 엔지니어’ 담당 업무였어요. 배 지을 때 외국회사의 기계를 쓰면 그 회사에서 현지 기술지도차 엔지니어들이 와요. 그 사람들 일정 챙기고 비용 계산해 주고 그런 일이었는데, 아이구, 온갖 나라에서 온갖 말로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일 잘하고 있다가 전화 오면 화장실 가는 척 도망을 갔어요. 보다 못한 과장님이 공부하시던 책을 건네주시더라고요. 민병철 생활영어 6권짜리 세트.” 그는 그걸 통째로 달달 외웠다.
“요즘 대졸 신입사원 교육할 때 제가 그래요. ‘너희들 토익 700점 자랑하는데, 나랑 외국에 한번 같이 가서 내기해 볼까? 너네는 밥 굶어도 나는 안 굶는다.’” 그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물론 ‘민병철 생활영어’ 실력 때문이 아니다. 한번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았던, 17살 때부터 투지와 성실성 하나로 살아오면서 닦은 내공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도 그를 두렵게 하거나 주저하게 만들지 못한다. 아프리카 오지에 던져놓아도 그는 ‘바디 랭귀지’ 하나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놈이 어디서 무슨 말로 전화를 하려나” 걱정하며 영어와 씨름하는 동안 이 불도저 같은 사나이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기술연수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연수원은 당시만 해도 저 같은 사람이 올 데가 아니었죠. 엘리트들이 오는 곳이었지. 근데 ‘직업훈련기본법’에 따라 1급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실기교사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걸 가진 사람이 사내에 저밖에 없었습니다.”
90년 11월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독하게 배운 사람이니 독하게 가르칠밖에. 연수생들은 그를 만나면 멀리 피해 다녔고, 기능대회 출전자들은 ‘지옥훈련’을 받아야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만으로 ‘군기’가 잡힙니까? 실력으로 딱 보여주니까 잔소리 들어도 암말 못하죠.” 자신이 가르친 사람이 훗날 누군가에게 “너, 누구한테 배웠어?”라는 질문을 받고 “조아무개한테 배웠다”고 대답할 때, 자랑스럽고 떳떳할 수 있는 것, 그게 그의 가장 큰 목표요 보람이다.
그는 각종 기능훈련 관련 업무로 일년의 삼분의 일쯤 국내외로 출장을 다닌다. 전국기능경기대회 배관부문 심사위원장 일, 국제 기능대회 출전 선수 선발 및 교육도 그가 하고 있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심사위원들이 대개 대학 교수들입니다. 현장 경험이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말 중에 경험상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저는 도서관을 가든 서점을 가든 그날 밤 안으로 확인을 합니다. 과학기술은 머리로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기능은 손기술입니다. 과학기술자는 5%만 있으면 됩니다. 그걸 산업현장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인이 없으면 생산이 안 되고, 나라가 부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심사에 있어서도 그는 ‘얄짤없다.’‘규정’과 ‘도면’에 따라, 정해진 채점 항목에 따라 철저히 원칙을 지킨다. 이런저런 인맥으로 부탁이 들어와도 칼같이 자르기 때문에 “삼성 과장이 그렇게 대단하냐?”는 말도 듣는다.
그는 “자신의 값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나를 한번 써 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교육한다. 또한 눈물 섞인 밥을 먹으며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기에 “이해 못할 일”도 많다. “저는 실업자나 노숙자,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맘만 있으면 일자리가 왜 없습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왜 못합니까? 교회에서 이거 저거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잘 이해가 안 됩디다. 기도할 시간에 자기 몸으로 노력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몰인정한 ‘독종’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집나간 아들을 찾아 영등포 역 일대에 전단을 붙이고 다녔던 아버지, 없는 시간 쪼개 자신을 가르쳐 주었던 직업전문학교 시절의 은사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은 목포기능대 교수로 있는데, 그는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꽃다발을 들고 은사를 찾아간다.)
“제가 정말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교도소로 교육을 가끔 가는데, 참 딱해요.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습니다. 한순간 실수로 그렇게 되는데 출소 이후가 중요해요. 돈 없으니 도둑질하고, 하던 놈이 또 하고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출소한 사람들 무료로 기술 가르쳐 주는 연수원을 세우고 싶어요. 로또 당첨되면 할 수 있을까요?” 그는 테니스, 스킨스쿠버, 윈드서핑을 즐기는 스포츠광이기 하다. 마지막으로 그의 ‘귀여운’ 비밀 하나! 그는 운전면허를 열세번째만에 땄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그런데 그는 2학년 때 아들을 ‘그 분야에선 알아주는’ 그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역시 학교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써야했다. “지도교사가 기술이 영 별로여서 정말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옮겼죠.”
정밀기기를 전공한 아들 조진영씨는 작년에 전국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금메달 수상자는 금오공대나 산업기술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이 있는데, 그는 이번에도 세태와는 다른 길을 아들에게 권했다. 진영씨는 올해 삼성중공업에 기능직사원으로 입사했다. 신입사원 중에 병역 미필자는 진영씨가 유일했다. 그만큼 진영씨의 ‘기술’을 인정해준 것이다.
다른 길이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사회적으로 그리 대접받는 분야도 아닌 길로 주저 없이 아들을 이끄는 일은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살아온 방식에 대한 태산 같은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전북 위도가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정읍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수업료를 제때 못내 교무실로 숱하게 불려다니다 내린 결정이었다. 영등포역에 내리자 사방 천지가 모집공고였으나 나이가 어려선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고향친구의 소개로 “미아리 25번 종점” 근처에 있던 나전칠기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연탄 가는 일’이었다. 칠을 마르게 하기 위해 밤새 연탄을 활활 태우고 꺼지지 않게 갈아대야 했다. “옥상에 올라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근데 기술자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더라고요. ‘왕’이 따로 없어요. 그래서 결심을 했죠. 기술을 배우자.”
상경 6개월쯤 지난 다음 집에다 편지를 보냈더니 아버지가 올라와 성남에서 공장에 다니던 누나와 함께 있으라며 그를 그곳에서 끌어냈고, 그는 가방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 학원을 다녔다.
“한다면 하는 못된 성격”에다 “손재주를 타고 난” 그는 짧은 기간에 재단사까지 올랐고, 저녁엔 학원에서 중장비 운전기술이며 자동차 정비기술 등을 익혔다. 그러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기술이 영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배달원이 툭 던져놓고 간 신문에서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리직업전문학교의 학생 모집 공고였다. 4시쯤 일을 끝내고 밥도 못 먹고 학원으로 내달리던 그를 위해 밥을 차려주던 맘씨 고운 사장님 부부는 그가 떠난다고 하자 아들을 보내는 양 눈물을 흘리며 붙잡았다. “월급을 더 주겠다”고도 하고 “운전을 배워 내 차를 몰아라”고도 했지만 “기술다운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를 막지는 못했다. 81년 3월 이리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업배관과정을 수료한 뒤 82년 7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기능직 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24년째인 현재 조성인씨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기술연수원 과장이다. 기술연수원은 기능직 사원의 기술훈련, 대졸 신입사원 교육, 외국어 및 정보화교육, 다기능화 교육, 사내 기능경기대회 등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는 기능과 관련된 교육을 총괄하는 한편 대졸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도 한다. 작년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의 한 부문으로 신설된 ‘산업체 근로자 기능경기대회’에 선수들을 이끌고 참여하여 종합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연수원 김병영 원장이 귀띔해 준 바에 따르면 그는 별명이 ‘독종’이다.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요, “한번 한다 하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관기능사 2급 자격증을 가지고 입사했던 그가 1급 자격증을 딸 때의 일화가 그가 얼마나 ‘독종’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는 휴일이면 직업전문학교 시절 그를 아꼈던 선생님을 찾아가 일종의 ‘과외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로선 거금이었던 60만원을 들여 배관 장비를 아파트 뒷베란다에 설치해놓고 혼자 실습을 했다. 최선을 다해 악착같이 배우려는 자세, “원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낮이고 밤이고 매달리는” 근면함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주었다.
“한 10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느 날 사무직으로 발령을 내주더군요. 그런데 발령받은 데가 어디냐 하면 외국에서 오는 ‘서비스 엔지니어’ 담당 업무였어요. 배 지을 때 외국회사의 기계를 쓰면 그 회사에서 현지 기술지도차 엔지니어들이 와요. 그 사람들 일정 챙기고 비용 계산해 주고 그런 일이었는데, 아이구, 온갖 나라에서 온갖 말로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일 잘하고 있다가 전화 오면 화장실 가는 척 도망을 갔어요. 보다 못한 과장님이 공부하시던 책을 건네주시더라고요. 민병철 생활영어 6권짜리 세트.” 그는 그걸 통째로 달달 외웠다.
“요즘 대졸 신입사원 교육할 때 제가 그래요. ‘너희들 토익 700점 자랑하는데, 나랑 외국에 한번 같이 가서 내기해 볼까? 너네는 밥 굶어도 나는 안 굶는다.’” 그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물론 ‘민병철 생활영어’ 실력 때문이 아니다. 한번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았던, 17살 때부터 투지와 성실성 하나로 살아오면서 닦은 내공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도 그를 두렵게 하거나 주저하게 만들지 못한다. 아프리카 오지에 던져놓아도 그는 ‘바디 랭귀지’ 하나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놈이 어디서 무슨 말로 전화를 하려나” 걱정하며 영어와 씨름하는 동안 이 불도저 같은 사나이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기술연수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연수원은 당시만 해도 저 같은 사람이 올 데가 아니었죠. 엘리트들이 오는 곳이었지. 근데 ‘직업훈련기본법’에 따라 1급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실기교사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걸 가진 사람이 사내에 저밖에 없었습니다.”
90년 11월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독하게 배운 사람이니 독하게 가르칠밖에. 연수생들은 그를 만나면 멀리 피해 다녔고, 기능대회 출전자들은 ‘지옥훈련’을 받아야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만으로 ‘군기’가 잡힙니까? 실력으로 딱 보여주니까 잔소리 들어도 암말 못하죠.” 자신이 가르친 사람이 훗날 누군가에게 “너, 누구한테 배웠어?”라는 질문을 받고 “조아무개한테 배웠다”고 대답할 때, 자랑스럽고 떳떳할 수 있는 것, 그게 그의 가장 큰 목표요 보람이다.
그는 각종 기능훈련 관련 업무로 일년의 삼분의 일쯤 국내외로 출장을 다닌다. 전국기능경기대회 배관부문 심사위원장 일, 국제 기능대회 출전 선수 선발 및 교육도 그가 하고 있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심사위원들이 대개 대학 교수들입니다. 현장 경험이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말 중에 경험상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저는 도서관을 가든 서점을 가든 그날 밤 안으로 확인을 합니다. 과학기술은 머리로 하지만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기능은 손기술입니다. 과학기술자는 5%만 있으면 됩니다. 그걸 산업현장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인이 없으면 생산이 안 되고, 나라가 부강해질 수가 없습니다.” 심사에 있어서도 그는 ‘얄짤없다.’‘규정’과 ‘도면’에 따라, 정해진 채점 항목에 따라 철저히 원칙을 지킨다. 이런저런 인맥으로 부탁이 들어와도 칼같이 자르기 때문에 “삼성 과장이 그렇게 대단하냐?”는 말도 듣는다.
그는 “자신의 값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나를 한번 써 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교육한다. 또한 눈물 섞인 밥을 먹으며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기에 “이해 못할 일”도 많다. “저는 실업자나 노숙자,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맘만 있으면 일자리가 왜 없습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왜 못합니까? 교회에서 이거 저거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잘 이해가 안 됩디다. 기도할 시간에 자기 몸으로 노력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몰인정한 ‘독종’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집나간 아들을 찾아 영등포 역 일대에 전단을 붙이고 다녔던 아버지, 없는 시간 쪼개 자신을 가르쳐 주었던 직업전문학교 시절의 은사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은 목포기능대 교수로 있는데, 그는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꽃다발을 들고 은사를 찾아간다.)
“제가 정말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교도소로 교육을 가끔 가는데, 참 딱해요.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습니다. 한순간 실수로 그렇게 되는데 출소 이후가 중요해요. 돈 없으니 도둑질하고, 하던 놈이 또 하고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출소한 사람들 무료로 기술 가르쳐 주는 연수원을 세우고 싶어요. 로또 당첨되면 할 수 있을까요?” 그는 테니스, 스킨스쿠버, 윈드서핑을 즐기는 스포츠광이기 하다. 마지막으로 그의 ‘귀여운’ 비밀 하나! 그는 운전면허를 열세번째만에 땄다.
/글 유시주·사진 백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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