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의 30년 후
임재경 (언론인)
올해에 각종 회년(回年)이 겹치는 것은 익히 아는 대로다. 을사 국치 1백주년, 광복 60주년, 한일 협정 40주년….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난 한달 동안 내가 직접 나갔던 모임만을 꼽아 보아도 두 차례인데 <자유언론 투쟁="" 30주년="">과 <민통련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그것이다. 원래 회년(jubilee, 어원은 라틴어의 annus jubeleus로서 환호하는 해라는 의미)의 뜻은 이민족의 박해를 받아오던 유대인들이 꿈에 그리던 고토 가나안에 귀환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25년, 50년(60년), 75년마다 축전을 벌이는데서 유래했다. 수 십 세기 전 유대인들이 정한 행사인 터라 왜 첫 번째 회년을 25년으로 삼았는지는 지금 여기서 딱히 집어내기 어려우나 인간의 생물적 망각 조건을 뛰어 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망각의 절대 시간은 대체로 세대(20-30년)인데 유년이나 성년이거나 간에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뇌리에 각인된 고난이 아니면 그 절실함을 잊기 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치욕·피압박으로 얼룩진 한세기
2005년에 우리가 각종 회년을 집중적으로 맞이하는 것은 지난 한 세기(3-4세대)동안 우리의 역사가 치욕과 피압박으로 얼룩졌으며, 거기에 대항하는 민족과 민중의 투쟁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던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각종 회년들이 간직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정신이 국민에게 올바로 전해지고 있는 가를 생각할 때 한편 부끄럽고 한편 통분함을 금할 길이 없다. 특히 ‘사법살인’의 대명사가 된 <인혁당 사건(30주년)="">의 경우는 거대 언론매체들의 의도적인 외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랑스러운 저항정신의 자산을 망각의 저쪽으로 내팽개치지 않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세칭 인혁당 사건은 1972년 유신 쿠데타로 민주주의의 뼈대인 보통선거제도를 파괴한 박정희가 대학생을 비롯한 양심세력의 저항을 극한적 폭력으로 탄압하겠다는 엄포였다. 박정희의 초법적 폭력기관인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학생운동 실천가 1백 40여명을 구속하며 이른바 “민천학련 소속의 대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인혁당 재건위의 하부조직”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 각본대로 법원(군법회의)은 일사천리로 재판 놀음을 진행하여 수십명을 중형에, 그리고 도예종 여정남 등 8명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의 내란음모죄를 걸어 사형에 처했다. 당시 외국의 저명한 인권단체는 처형 소식을 접하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평했다. 국내에서도 명민한 관측자들은 애당초 중정의 발표내용을 믿지 않았다. 여하튼간에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02년 9월 대한민국 정부가 위촉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 등의 방법으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런데도 2년 반이 지나도록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판결이 있은 지 20시간 만에 돌이킬 수 없는 극형을 집행한 30년 전의 허둥대던 사법살인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인혁당 사건="">을 재심하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겠다는 것일까.
우연하게도 가톨릭교회의 과거 허물까지도 공개적으로 참회한 용기로 널리 추앙을 받아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이 거행된 4월 8일은 30년 전 그날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수난의 날로 기록된다. 30년전 그날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영결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영구를 옮기려던 30대의 가냘픈 체구의 함세웅 신부를 밀치고 일단의 기관원들은 8명의 시신을 화장장으로 옮겼다. 유족의 항의에 아랑곳없이 원혼의 육체를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많은 관계자들은 당시의 이 폭거가 ‘정치성을 띤 집단행동’(합동 영결미사) 저지에 단순히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문 흔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라 믿고 있다.
진정한 화해위해 진실 밝혀야
‘殺人者 死’라는 형벌의 기본 원리에 집착한다면 사법살인의 주모자와 그 공범 및 종범들은 형벌의 기본원리에 따라 단죄하는 것이 백번 옳다. 그러나 모든 형벌에는 시효가 있는 것이거늘 30년전에 저지른 사법살인의 잘못을 고색창연한 형벌 원리대로 결판내자고 우긴다면 모든 국민이 화목하게 살기 바라는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요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는 노력은 한시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중인 독일은 화해를 위해 과거청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또 실천했다. 독일 개신교의 평신도회 회장을 역임하고 전후 최고의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바이츠체커 전대통령은 “오늘과 내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인혁당>의문사>인혁당>민통련>자유언론>
임재경 (언론인)
올해에 각종 회년(回年)이 겹치는 것은 익히 아는 대로다. 을사 국치 1백주년, 광복 60주년, 한일 협정 40주년….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난 한달 동안 내가 직접 나갔던 모임만을 꼽아 보아도 두 차례인데 <자유언론 투쟁="" 30주년="">과 <민통련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그것이다. 원래 회년(jubilee, 어원은 라틴어의 annus jubeleus로서 환호하는 해라는 의미)의 뜻은 이민족의 박해를 받아오던 유대인들이 꿈에 그리던 고토 가나안에 귀환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25년, 50년(60년), 75년마다 축전을 벌이는데서 유래했다. 수 십 세기 전 유대인들이 정한 행사인 터라 왜 첫 번째 회년을 25년으로 삼았는지는 지금 여기서 딱히 집어내기 어려우나 인간의 생물적 망각 조건을 뛰어 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다. 망각의 절대 시간은 대체로 세대(20-30년)인데 유년이나 성년이거나 간에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뇌리에 각인된 고난이 아니면 그 절실함을 잊기 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치욕·피압박으로 얼룩진 한세기
2005년에 우리가 각종 회년을 집중적으로 맞이하는 것은 지난 한 세기(3-4세대)동안 우리의 역사가 치욕과 피압박으로 얼룩졌으며, 거기에 대항하는 민족과 민중의 투쟁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던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각종 회년들이 간직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정신이 국민에게 올바로 전해지고 있는 가를 생각할 때 한편 부끄럽고 한편 통분함을 금할 길이 없다. 특히 ‘사법살인’의 대명사가 된 <인혁당 사건(30주년)="">의 경우는 거대 언론매체들의 의도적인 외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랑스러운 저항정신의 자산을 망각의 저쪽으로 내팽개치지 않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세칭 인혁당 사건은 1972년 유신 쿠데타로 민주주의의 뼈대인 보통선거제도를 파괴한 박정희가 대학생을 비롯한 양심세력의 저항을 극한적 폭력으로 탄압하겠다는 엄포였다. 박정희의 초법적 폭력기관인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학생운동 실천가 1백 40여명을 구속하며 이른바 “민천학련 소속의 대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인혁당 재건위의 하부조직”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 각본대로 법원(군법회의)은 일사천리로 재판 놀음을 진행하여 수십명을 중형에, 그리고 도예종 여정남 등 8명을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의 내란음모죄를 걸어 사형에 처했다. 당시 외국의 저명한 인권단체는 처형 소식을 접하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평했다. 국내에서도 명민한 관측자들은 애당초 중정의 발표내용을 믿지 않았다. 여하튼간에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02년 9월 대한민국 정부가 위촉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 등의 방법으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런데도 2년 반이 지나도록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판결이 있은 지 20시간 만에 돌이킬 수 없는 극형을 집행한 30년 전의 허둥대던 사법살인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인혁당 사건="">을 재심하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겠다는 것일까.
우연하게도 가톨릭교회의 과거 허물까지도 공개적으로 참회한 용기로 널리 추앙을 받아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이 거행된 4월 8일은 30년 전 그날 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수난의 날로 기록된다. 30년전 그날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영결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영구를 옮기려던 30대의 가냘픈 체구의 함세웅 신부를 밀치고 일단의 기관원들은 8명의 시신을 화장장으로 옮겼다. 유족의 항의에 아랑곳없이 원혼의 육체를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많은 관계자들은 당시의 이 폭거가 ‘정치성을 띤 집단행동’(합동 영결미사) 저지에 단순히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문 흔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라 믿고 있다.
진정한 화해위해 진실 밝혀야
‘殺人者 死’라는 형벌의 기본 원리에 집착한다면 사법살인의 주모자와 그 공범 및 종범들은 형벌의 기본원리에 따라 단죄하는 것이 백번 옳다. 그러나 모든 형벌에는 시효가 있는 것이거늘 30년전에 저지른 사법살인의 잘못을 고색창연한 형벌 원리대로 결판내자고 우긴다면 모든 국민이 화목하게 살기 바라는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요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는 노력은 한시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중인 독일은 화해를 위해 과거청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또 실천했다. 독일 개신교의 평신도회 회장을 역임하고 전후 최고의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바이츠체커 전대통령은 “오늘과 내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인혁당>의문사>인혁당>민통련>자유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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