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시의 길쭉한 지형을 관통하듯 흐르는 황지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시커먼 탄광 폐수가 흘러 ‘죽음의 하천’이라 불렸다.
장성동 태백중앙병원이 우뚝 서 있는 곳이 바로 이 황지천변이다. 1930년대 장성갱이 개발된 이후 한때는 전국 석탄 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으나, 석탄 산업이 몰락하면서 을씨년스런 폐광촌이 돼 버린 이곳 장성에는 광부들은 간 데 없고 늙고 병든 환자들만 병원에 누워 있다.
수십 년 동안 가파른 지하 갱도에서 석탄가루를 들이마시며 석탄을 캤던 이들이 앓는 병명은 ‘진폐증’. 장기간에 걸쳐 유해한 먼지를 들이마신 사람에게 생기는 만성 폐질환이다.
“광산에서 근무한 사람들한테 주로 발생하는 일종의 직업병이죠. 거의가 폐광을 했고 몇 개의 탄광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실제로 광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아요. 하지만, 과거에 분진에 노출됐던 환자들 때문에 앞으로 15년에서 20년까지는 진폐 환자가 계속 있을 거예요.”
산재의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 진료과장 홍성노 씨(55세)의 말이다. 호흡기내과 중에서도 결핵을 전공한 그가 광산촌의 진폐증 환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97년 5월. 경기도 파주에서 6년 동안 내과 의원을 하다 잠시 쉬던 중 ‘의사를 구할 동안만이라도 잠시 도와 달라’는 대학선배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산재의료관리원 정선병원에 발을 들여놓은 후 8년 동안 진폐증 환자들을 돌봐 왔다.
개업의로서 일반 환자들만 진료하다가 진폐증 환자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아찔한 충격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슴 사진을 딱 보고서 ‘아, 이런 사람도 숨을 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런 환자들만 지금 8년째 보고 있는 거잖아요. 너무 안 된 거야. 환자 본인들만 힘든 게 아니라 가정환경도 아주 열악해요.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해 줄 게 별로 없다는 거예요. 폐조직이란 건 한번 기능을 상실하고 조직이 파괴되면 원상회복이 힘들거든요. 만성, 진행성, 불가역성이 진폐의 특성이에요. 계속 악화돼요.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야. 입원 치료라고 해 봐야 환자들이 편히 숨 쉴 수 있게 도와주고, 폐렴 같은 합병증이나 진폐 이외의 다른 질환을 치료하는 정도인 거죠. 치료해서 낫는 병이라면야 정말 얼마나 좋겠어요?”
전국의 진폐 환자의 숫자는 대략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근로복지공단은 3~4만, 전국진폐재해자협회에서는 10만으로 추산) 그러나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치유와 요양, 의료 재활을 위해 설립된 산재의료관리원의 치료 혜택을 받는 환자는 전체 진폐 환자의 약 50% 정도. 그 중 입원 환자는 3500명에 불과하다.
“태백중앙병원의 입원 환자는 350명으로, 전국에서 진폐 환자가 제일 많은 곳이에요.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체 진폐 환자들의 수에 비해 실지로 혜택 받는 환자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입원해서 치료받는 환자들은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환자들이죠. 병원비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고, 광산에서 근무할 때 받던 월급의 70%가 휴업급여 명목으로 매달 나오니까요.”
진폐 환자들이 입원 치료를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다. 일단 진폐증이 1형(진폐의 정도와 상태를 나타내는 전문용어) 이상이 돼야 하고, 폐결핵, 폐암 등 진폐증으로 인한 9가지 합병증이 있어야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진폐증이 아무리 심해도 합병증이 없으면 입원이 안 된다. 폐암도 다른 장기에서 전이된 폐암은 합병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환자들 사이에서는 ‘빨리 합병증이 생기는 것이 소원’이라는 끔찍한 농담이 돌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폐결핵 판정이 돼 가지고 입원을 했어요. 이런 환자들은 기침은 좀 나지만 한 2주 약 먹으면 전염성도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많이 좋아지거든. 한 6개월 입원해 있다가 결핵이 치료되면 퇴원해도 돼요. 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노동을 해도 무방한 환자들도 있어요. 반면에, 합병증이 없어서 집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이들도 있어요. 물론 산재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까 이런 제약이 온 거 같은데, 이렇게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중증 진폐 환자들은 합병증에 상관없이 요양을 시키고, 단순 합병증으로 입원한 사람들은 합병증이 소실되면 치료 종결 내지 통원으로 유도를 해 줬으면 하는 게 진폐 진료하는 의사들의 공통된 바람입니다.”
진폐 환자들이 사망했을 경우 국가에서 2억에 가까운 유족 보상금이 나온다. 물론 진폐 환자라 해도 대장암이나 위암, 간암, 간경화 같은 병으로 사망하면 진폐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금이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들은 암이 발병해도 쉬쉬 하며 병원 측에 그 사실을 숨긴다. 어차피 진폐가 불치의 병이라면 남은 가족들이라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암이 확인되면 환자들한테 큰 병원에 가서 항암치료도 하고 방사선 치료도 받으라고 권하죠. 근데 적극적인 치료를 안 해요. 환자들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돈 때문에. 혹 하더라도 의료보험으로 안 해요. 조회하면 과거 진료기록이 쫙 나오기 때문에. 참 가슴 아프죠.”
태백중앙병원에서 진폐증 환자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홍성노 씨를 포함해서 모두 세 사람. 입원 환자 350명 중에서 홍성노 씨가 담당하는 환자는 150명. 우리나라 종합병원 의사들이 담당하는 환자수가 평균 20~30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심각한 격무가 아닐 수 없다.
힘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출근을 앞당길 수밖에 도리가 없다. 홍성노 씨는 매일 아침 7시면 병원에 출근하고, 7시 10분부터는 어김없이 각 병동을 돌며 입원 환자들의 상태를 살핀다. 무슨 일이 있어도 9시까지는 회진을 끝내야 한다. 9시부터는 외래 환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50명 전후한 환자들을 진료하노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병원 사택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 질 때도 되었으련만, 아침에 일어나 부인 주희애 씨(50세)가 챙겨 준 선식을 먹을 때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몹시도 그립다. 처음 정선에 내려올 때는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도 벌써 고3, 고2가 되었다. 근무가 있는 평일에는 직원들과 회식을 하거나 태백산 등지로 산행을 나가기도 하지만 금요일 진료만 마치면 만사 제쳐놓고 서울에 올라간다.
“기러기아빠죠 뭐. 그래도 작년부터 주5일 근무가 시행되면서는 여건이 조금 나아졌어요. 토요일, 일요일 만 이틀은 온전히 쉴 수 있으니까.”
때로 불만에 찬 환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환자들의 가쁜 호흡을 느끼며 착잡해하기도 하지만, 구름 사이에서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반짝’ 하는 기쁜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진폐 환자들이 겪는 호흡곤란증에서 최고로 위급한 상황을 호흡부전증이라고 하거든요. 이런 환자들은 인공호흡기를 걸어야지 그냥 놔두면 대부분 사망해요.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작동시키면 생존률이 참 안 좋아요. 열 명이면 반 이상은 사망을 하죠. 나머지 한 20~30%가 원래대로 회복이 돼요. 그 회복의 순간, 환자가 딱 깨어나면 굉장히 마음이 좋죠. 아, 내가 이렇게 해서 살아났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병원에서 의사를 구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고 내려온 홍성노 씨가 8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이 진폐 환자들의 벗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 그는 구태여 언제까지 이 병원에 머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후배가 나타나면 물러나야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먹을 뿐이다. 번듯하게 살아가는 다른 의사들처럼 개업의 꿈을 꾸지도 않는다. ‘진료’를 넘어선 ‘사업’은 자기 체질에 맞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해요. 지금 우리나라 진폐 환자에 대한 표준진료지침이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태백, 동해, 정선 3개 병원의 데이터만이라도 한번 정리를 해서 표준진료지침이 될 만한 걸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지금 자료를 조금씩 모으고 있어요. 그래야 나중에 후배 의사들이 오더라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짧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진폐 환자들과 보낸 의사로서 어떤 족적을 남기고픈 희망이랄까요.”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산재의료관리원은 어떤 곳?
전국 9개 병원과 1개 재활공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산재의료관리원은 전국 3700여 병상을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공의료기관으로 산재 환자 치료와 재활을 도맡아 왔다. 산재의료관리원은 그간 지역별 특성에 맞는 전문화병원을 추구하며 특화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안산중앙병원과 동해병원은 진폐전문병동을 증축해 진폐환자 집중치료·요양을 하고 있고, 인천중앙병원은 전문센터를 설치하여 의료재활분야에서 민간의료기관보다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산재의료관리원은 앞으로 산재 환자에 대한 적정 진료 보장과 근로자 복지 중심의 경영으로 공공성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재활전문산재병원을 건립하여 산재 의료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공공의료의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재활전문치료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며, 산재전문종합병원을 설립, 완전한 산재의료체계를 확립하여 우수 산업의료인력 확보, 산재의료서비스 질 개선, 산업의학 발전을 도모할 예정이다.(문의 : 02) 2165-7000)
장성동 태백중앙병원이 우뚝 서 있는 곳이 바로 이 황지천변이다. 1930년대 장성갱이 개발된 이후 한때는 전국 석탄 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으나, 석탄 산업이 몰락하면서 을씨년스런 폐광촌이 돼 버린 이곳 장성에는 광부들은 간 데 없고 늙고 병든 환자들만 병원에 누워 있다.
수십 년 동안 가파른 지하 갱도에서 석탄가루를 들이마시며 석탄을 캤던 이들이 앓는 병명은 ‘진폐증’. 장기간에 걸쳐 유해한 먼지를 들이마신 사람에게 생기는 만성 폐질환이다.
“광산에서 근무한 사람들한테 주로 발생하는 일종의 직업병이죠. 거의가 폐광을 했고 몇 개의 탄광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실제로 광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아요. 하지만, 과거에 분진에 노출됐던 환자들 때문에 앞으로 15년에서 20년까지는 진폐 환자가 계속 있을 거예요.”
산재의료관리원 태백중앙병원 진료과장 홍성노 씨(55세)의 말이다. 호흡기내과 중에서도 결핵을 전공한 그가 광산촌의 진폐증 환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97년 5월. 경기도 파주에서 6년 동안 내과 의원을 하다 잠시 쉬던 중 ‘의사를 구할 동안만이라도 잠시 도와 달라’는 대학선배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산재의료관리원 정선병원에 발을 들여놓은 후 8년 동안 진폐증 환자들을 돌봐 왔다.
개업의로서 일반 환자들만 진료하다가 진폐증 환자를 처음 접했을 때의 아찔한 충격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슴 사진을 딱 보고서 ‘아, 이런 사람도 숨을 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런 환자들만 지금 8년째 보고 있는 거잖아요. 너무 안 된 거야. 환자 본인들만 힘든 게 아니라 가정환경도 아주 열악해요.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해 줄 게 별로 없다는 거예요. 폐조직이란 건 한번 기능을 상실하고 조직이 파괴되면 원상회복이 힘들거든요. 만성, 진행성, 불가역성이 진폐의 특성이에요. 계속 악화돼요.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야. 입원 치료라고 해 봐야 환자들이 편히 숨 쉴 수 있게 도와주고, 폐렴 같은 합병증이나 진폐 이외의 다른 질환을 치료하는 정도인 거죠. 치료해서 낫는 병이라면야 정말 얼마나 좋겠어요?”
전국의 진폐 환자의 숫자는 대략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근로복지공단은 3~4만, 전국진폐재해자협회에서는 10만으로 추산) 그러나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치유와 요양, 의료 재활을 위해 설립된 산재의료관리원의 치료 혜택을 받는 환자는 전체 진폐 환자의 약 50% 정도. 그 중 입원 환자는 3500명에 불과하다.
“태백중앙병원의 입원 환자는 350명으로, 전국에서 진폐 환자가 제일 많은 곳이에요.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전체 진폐 환자들의 수에 비해 실지로 혜택 받는 환자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입원해서 치료받는 환자들은 어떻게 보면 선택받은 환자들이죠. 병원비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고, 광산에서 근무할 때 받던 월급의 70%가 휴업급여 명목으로 매달 나오니까요.”
진폐 환자들이 입원 치료를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다. 일단 진폐증이 1형(진폐의 정도와 상태를 나타내는 전문용어) 이상이 돼야 하고, 폐결핵, 폐암 등 진폐증으로 인한 9가지 합병증이 있어야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진폐증이 아무리 심해도 합병증이 없으면 입원이 안 된다. 폐암도 다른 장기에서 전이된 폐암은 합병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환자들 사이에서는 ‘빨리 합병증이 생기는 것이 소원’이라는 끔찍한 농담이 돌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폐결핵 판정이 돼 가지고 입원을 했어요. 이런 환자들은 기침은 좀 나지만 한 2주 약 먹으면 전염성도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많이 좋아지거든. 한 6개월 입원해 있다가 결핵이 치료되면 퇴원해도 돼요. 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노동을 해도 무방한 환자들도 있어요. 반면에, 합병증이 없어서 집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이들도 있어요. 물론 산재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까 이런 제약이 온 거 같은데, 이렇게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중증 진폐 환자들은 합병증에 상관없이 요양을 시키고, 단순 합병증으로 입원한 사람들은 합병증이 소실되면 치료 종결 내지 통원으로 유도를 해 줬으면 하는 게 진폐 진료하는 의사들의 공통된 바람입니다.”
진폐 환자들이 사망했을 경우 국가에서 2억에 가까운 유족 보상금이 나온다. 물론 진폐 환자라 해도 대장암이나 위암, 간암, 간경화 같은 병으로 사망하면 진폐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금이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들은 암이 발병해도 쉬쉬 하며 병원 측에 그 사실을 숨긴다. 어차피 진폐가 불치의 병이라면 남은 가족들이라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암이 확인되면 환자들한테 큰 병원에 가서 항암치료도 하고 방사선 치료도 받으라고 권하죠. 근데 적극적인 치료를 안 해요. 환자들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돈 때문에. 혹 하더라도 의료보험으로 안 해요. 조회하면 과거 진료기록이 쫙 나오기 때문에. 참 가슴 아프죠.”
태백중앙병원에서 진폐증 환자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홍성노 씨를 포함해서 모두 세 사람. 입원 환자 350명 중에서 홍성노 씨가 담당하는 환자는 150명. 우리나라 종합병원 의사들이 담당하는 환자수가 평균 20~30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심각한 격무가 아닐 수 없다.
힘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출근을 앞당길 수밖에 도리가 없다. 홍성노 씨는 매일 아침 7시면 병원에 출근하고, 7시 10분부터는 어김없이 각 병동을 돌며 입원 환자들의 상태를 살핀다. 무슨 일이 있어도 9시까지는 회진을 끝내야 한다. 9시부터는 외래 환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50명 전후한 환자들을 진료하노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병원 사택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 질 때도 되었으련만, 아침에 일어나 부인 주희애 씨(50세)가 챙겨 준 선식을 먹을 때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몹시도 그립다. 처음 정선에 내려올 때는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도 벌써 고3, 고2가 되었다. 근무가 있는 평일에는 직원들과 회식을 하거나 태백산 등지로 산행을 나가기도 하지만 금요일 진료만 마치면 만사 제쳐놓고 서울에 올라간다.
“기러기아빠죠 뭐. 그래도 작년부터 주5일 근무가 시행되면서는 여건이 조금 나아졌어요. 토요일, 일요일 만 이틀은 온전히 쉴 수 있으니까.”
때로 불만에 찬 환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환자들의 가쁜 호흡을 느끼며 착잡해하기도 하지만, 구름 사이에서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반짝’ 하는 기쁜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진폐 환자들이 겪는 호흡곤란증에서 최고로 위급한 상황을 호흡부전증이라고 하거든요. 이런 환자들은 인공호흡기를 걸어야지 그냥 놔두면 대부분 사망해요.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작동시키면 생존률이 참 안 좋아요. 열 명이면 반 이상은 사망을 하죠. 나머지 한 20~30%가 원래대로 회복이 돼요. 그 회복의 순간, 환자가 딱 깨어나면 굉장히 마음이 좋죠. 아, 내가 이렇게 해서 살아났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병원에서 의사를 구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고 내려온 홍성노 씨가 8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이 진폐 환자들의 벗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 그는 구태여 언제까지 이 병원에 머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후배가 나타나면 물러나야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먹을 뿐이다. 번듯하게 살아가는 다른 의사들처럼 개업의 꿈을 꾸지도 않는다. ‘진료’를 넘어선 ‘사업’은 자기 체질에 맞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해요. 지금 우리나라 진폐 환자에 대한 표준진료지침이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태백, 동해, 정선 3개 병원의 데이터만이라도 한번 정리를 해서 표준진료지침이 될 만한 걸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지금 자료를 조금씩 모으고 있어요. 그래야 나중에 후배 의사들이 오더라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짧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진폐 환자들과 보낸 의사로서 어떤 족적을 남기고픈 희망이랄까요.”
/글 김기선·사진 백지순
산재의료관리원은 어떤 곳?
전국 9개 병원과 1개 재활공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산재의료관리원은 전국 3700여 병상을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공의료기관으로 산재 환자 치료와 재활을 도맡아 왔다. 산재의료관리원은 그간 지역별 특성에 맞는 전문화병원을 추구하며 특화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안산중앙병원과 동해병원은 진폐전문병동을 증축해 진폐환자 집중치료·요양을 하고 있고, 인천중앙병원은 전문센터를 설치하여 의료재활분야에서 민간의료기관보다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산재의료관리원은 앞으로 산재 환자에 대한 적정 진료 보장과 근로자 복지 중심의 경영으로 공공성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재활전문산재병원을 건립하여 산재 의료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공공의료의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재활전문치료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며, 산재전문종합병원을 설립, 완전한 산재의료체계를 확립하여 우수 산업의료인력 확보, 산재의료서비스 질 개선, 산업의학 발전을 도모할 예정이다.(문의 : 02) 2165-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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