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건 희열이었다.”
1978년.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유시민 의원(열린우리당)은 리영희 선생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세계관 등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깨닫고 알리는 게 현명한지를 고민하는 일이 스승의 역할이라면, 리영희 선생은 많은 사람에게 진정한 스승이 됐다.”
유 의원의 말은 이어진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이웃과 역사, 이런 것들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성찰하게 해주신 분이며 그런 면에서 리 선생은 나 자신의 지적인 성장과 변화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리영희 = 리영희 선생을 언론인·저술가·교수라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나 크다. 그의 목격과 증언들은 고스란히 한국사를 담고 있고 따라서 ‘리영희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를 통해 본 리영희’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할 듯 하다.
70~80년대, 리 선생이 펜을 잡기만 하면 젊은이들은 ‘이상해졌고’ 사람들은 변해갔다. 그리고 그 첫 출발은 당시 학생들이 ‘전논’이라 부르던 《전환시대의 논리》(1974.6)에서 시작됐다.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 그동안 받아왔던 교육과 진리라 믿었던 가치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 리 선생의 영향력은 ‘학생 유시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시인 고은의 말이다. 70~80년대 젊은이들에게 리 선생은 말 그대로 ‘사상의 은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리 선생은 자신이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리 선생은 최근 펴낸 자서전《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우상과 이성》등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잘 몰랐어. 나의 지적 활동과 실천의 결과가 이 사회에 큰 감화를 미치거나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어요.”
리 선생은 그러나 8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다룬 연구 책자에서 자신의 책들이 상위 5위 중 1, 2, 5등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때서야 80년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았다”고 말한다.
‘전논’을 비롯 그의 글과 말이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체계를 “소리내어 무너뜨리는 괴물”이 되면 될수록 폭압적인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 하에서 이 ‘자유인’은 곧 ‘의식화의 원흉’이 돼버렸다. 그의 글에 사람들이 열광할수록 형벌은 무거워졌다.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구치소 생활, 언론계에서 두 번의 퇴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번씩이나 해직교수가 돼야만 했다.
◆‘원칙과 일탈’ 유시민의 고민 =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리 선생의 고집스런 원칙 때문에 그가 받은 현실적인 고통은 그의 책과 함께 ‘유신체제 하에서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던 유 의원을 개조시켰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유 의원이 특히 빠지지 않고 리 선생의 책을 읽은 이유는, 그의 지적 능력과 새로운 시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이 주는 교훈 때문이기도 했다.
“리 선생은 현재도 올곧게 당신 나름의 시대를 살고 계시다. 만약 그 분에게 인격적인 감화력이 없었다면 칼럼리스트 정도의 ‘지적 지도력’만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삶의 이력과 역사 속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실천과 행동이 여전히 내게는 사표가 될 만한 것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 책을 쓰고 칼럼리스트 등으로 활동해온 ‘글쟁이’ 유시민은 “글을 쓰면서 독자로 하여금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한동안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 의원은 “현실 정치에 뛰어든 후 논리적인 타협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하곤 했다”며 “리 선생을 보면서 지키려고 했던 원칙이 지금은 약간 흐트러진 정도가 아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어 “입법자로서, 어떤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 여러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마음과 관념이 다가가는 부분에서 동떨진 적이 많다”며 “주관대로 나가기가 점차 어려워진 것 같다”고 토로한다. 유 의원은 “어디까지 이 일탈이 용납될 것인가 하는 게 항상 나의 고민”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늘을 우르러 부끄럽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와 같은 삶은 나에게서 멀어져갔어요. 적당히 타락했지.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울 앞에서 부끄러운 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해요. 서글픈 일이지.”
자서전에서 밝힌 리 선생의 이같은 ‘반성’이 원칙과 일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유 의원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숙현 기자 shlee@naeil.com르몽드>
1978년.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유시민 의원(열린우리당)은 리영희 선생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세계관 등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깨닫고 알리는 게 현명한지를 고민하는 일이 스승의 역할이라면, 리영희 선생은 많은 사람에게 진정한 스승이 됐다.”
유 의원의 말은 이어진다.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이웃과 역사, 이런 것들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성찰하게 해주신 분이며 그런 면에서 리 선생은 나 자신의 지적인 성장과 변화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 리영희 = 리영희 선생을 언론인·저술가·교수라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나 크다. 그의 목격과 증언들은 고스란히 한국사를 담고 있고 따라서 ‘리영희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를 통해 본 리영희’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할 듯 하다.
70~80년대, 리 선생이 펜을 잡기만 하면 젊은이들은 ‘이상해졌고’ 사람들은 변해갔다. 그리고 그 첫 출발은 당시 학생들이 ‘전논’이라 부르던 《전환시대의 논리》(1974.6)에서 시작됐다.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 그동안 받아왔던 교육과 진리라 믿었던 가치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 리 선생의 영향력은 ‘학생 유시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시인 고은의 말이다. 70~80년대 젊은이들에게 리 선생은 말 그대로 ‘사상의 은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리 선생은 자신이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리 선생은 최근 펴낸 자서전《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우상과 이성》등이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잘 몰랐어. 나의 지적 활동과 실천의 결과가 이 사회에 큰 감화를 미치거나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어요.”
리 선생은 그러나 8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다룬 연구 책자에서 자신의 책들이 상위 5위 중 1, 2, 5등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때서야 80년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았다”고 말한다.
‘전논’을 비롯 그의 글과 말이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신념체계를 “소리내어 무너뜨리는 괴물”이 되면 될수록 폭압적인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 하에서 이 ‘자유인’은 곧 ‘의식화의 원흉’이 돼버렸다. 그의 글에 사람들이 열광할수록 형벌은 무거워졌다.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구치소 생활, 언론계에서 두 번의 퇴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두 번씩이나 해직교수가 돼야만 했다.
◆‘원칙과 일탈’ 유시민의 고민 =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리 선생의 고집스런 원칙 때문에 그가 받은 현실적인 고통은 그의 책과 함께 ‘유신체제 하에서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던 유 의원을 개조시켰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유 의원이 특히 빠지지 않고 리 선생의 책을 읽은 이유는, 그의 지적 능력과 새로운 시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이 주는 교훈 때문이기도 했다.
“리 선생은 현재도 올곧게 당신 나름의 시대를 살고 계시다. 만약 그 분에게 인격적인 감화력이 없었다면 칼럼리스트 정도의 ‘지적 지도력’만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삶의 이력과 역사 속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실천과 행동이 여전히 내게는 사표가 될 만한 것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 책을 쓰고 칼럼리스트 등으로 활동해온 ‘글쟁이’ 유시민은 “글을 쓰면서 독자로 하여금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한동안 실천에 옮기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 의원은 “현실 정치에 뛰어든 후 논리적인 타협도 하고, 때로는 거짓말도 하곤 했다”며 “리 선생을 보면서 지키려고 했던 원칙이 지금은 약간 흐트러진 정도가 아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어 “입법자로서, 어떤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 여러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마음과 관념이 다가가는 부분에서 동떨진 적이 많다”며 “주관대로 나가기가 점차 어려워진 것 같다”고 토로한다. 유 의원은 “어디까지 이 일탈이 용납될 것인가 하는 게 항상 나의 고민”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늘을 우르러 부끄럽지 않았던 시인 윤동주와 같은 삶은 나에게서 멀어져갔어요. 적당히 타락했지.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울 앞에서 부끄러운 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해요. 서글픈 일이지.”
자서전에서 밝힌 리 선생의 이같은 ‘반성’이 원칙과 일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유 의원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 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숙현 기자 shlee@naeil.com르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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