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위해 발휘된 독일인의 슬기
주섭일 (언론인)
노무현 대통령이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선 모습은 인상적이다. 4월11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안내로 노대통령은 이 광장을 돌아보았다고 외신이 전했다. 한국 대통령이 통독 15년 후 동서분단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 어떤 소감을 밝혔는지는 보도가 없다. 북핵문제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한 한국 대통령으로써 북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에 쓴 소리도 하고 얼굴을 붉힐 때면 붉혀야 한다’고 언급했는가 하면 ‘1991년 남북간 평화공존과 기본협정을 맺고도 안 지켰다. 미국 위협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전혀 무시하고 핵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한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5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북에 발했다.
독일과 통일경쟁서 패배한 한국
독일은 냉전시대 우리의 통일 경쟁국이었다. 통일 73년인 게르만과 통일국가 1300년을 자랑하는 한민족의 경쟁은 비록 6.25전쟁의 참상을 고려하더라도 한국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영불소 4강대국의 군사점령으로 군정이 장기간 실시되어 1990년10월3일 통일 때까지 주권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동독은 소련군, 서독은 미영불 3개국 군대주둔을 끝내야 통일을 말할 수 있었다. 한반도는 일제강점 피해국으로 남에 미군이 있으나 6.25전쟁 참전결과의 주둔이다.
1970~80년대 유럽을 다닌 고관대작들은 파리 특파원인 필자에게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빠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담은 빗나갔다. 독일은 15년 전 통일했으나 한반도 휴전장벽은 지금도 높기 때문이다.
1989년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후 329일 만에 통일을 이룬 독일에서 필자는 독일인에게서 ‘다음 차례는 한반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남한 특파원이 동서독을 누비며 베를린 장벽과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필자는 이념장벽과 냉전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한반도’라는 독일인의 말에 그래서 공감했다.
2000년3월 DJ의 베를린선언은 휴전장벽을 녹이는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사회는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으로 환영했고 노벨평화상은 DJ에 돌아갔다. 그 후 5년, 한반도는 북핵문제로 긴장악화에 시달리고 있으니, ‘역사의 퇴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대통령의 ‘얼굴 붉히더라도 할말은 한다’는 천명은 그래서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었다.
통일경쟁 패배국의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이제 한반도 통일을 운위하는 것은 쑥스럽고 염치가 없는 일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약속 5년이 지났지만 이행하지 않아 백지화된 것 같다. DJ-김정일 개인사업이 끝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겠다.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도 북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전시킴으로써 백지화되었다. 6자회담이 열렸으나 이제는 ‘핵보유국’임을 강변하고 있다. 베를린 제2선언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DJ의 베를린선언 실패로 북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둘러본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장벽 한가운데 있어 냉전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서베를린쪽 장벽 앞에 전망대를 만들어 관광객들이 동베를린을 넘겨다보며 냉전 비극을 체감했던 곳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연설이 세계를 감동시킨 곳이기도 하다. 통독 15년, 여기서 노 대통령은 어떤 감회가 들었을까.
통일상징 브란덴부르크의 교훈
한국정부는 통일을 너무 떠들어왔다. 냉전시대 독일은 통일을 터부시했다. 아무도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금기를 깬 사람은 1989년12월 콜 당시 총리였다. 서독의회 연설에서 그는 처음으로 3단계 통일방안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점령국들을 설득해 통일을 완성했다. 소련군은 1994년 철수했고 동시에 미영불 주둔군도 독일점령을 종식시켰다. 점령군이 철수하던 날 독일인들은 ‘댕큐’ ‘메르시’를 외치며 감사를 표했다. 참으로 이색풍경이었는데, 동독서 철수하는 소련군에게는 감사인사가 없었다. 독일인은 50년간 점령을 인내하며 ‘통일의 그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통일을 절규했다. 서독은 미영불 서방진영의 핵우산보호를 받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동독을 삼킬 수 있었다. 단숨에 통일을 이룬 독일인의 슬기는 분단국들의 귀감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닫는 한반도, 독일과 너무나 다른 냉전지대로 남아있다. 독일인의 슬기를 배워 민주-시장경제의 발전으로 국민결속을 도모해 결정적 기회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통일슬기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주섭일 (언론인)
노무현 대통령이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선 모습은 인상적이다. 4월11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안내로 노대통령은 이 광장을 돌아보았다고 외신이 전했다. 한국 대통령이 통독 15년 후 동서분단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 어떤 소감을 밝혔는지는 보도가 없다. 북핵문제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한 한국 대통령으로써 북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에 쓴 소리도 하고 얼굴을 붉힐 때면 붉혀야 한다’고 언급했는가 하면 ‘1991년 남북간 평화공존과 기본협정을 맺고도 안 지켰다. 미국 위협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전혀 무시하고 핵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한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5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북에 발했다.
독일과 통일경쟁서 패배한 한국
독일은 냉전시대 우리의 통일 경쟁국이었다. 통일 73년인 게르만과 통일국가 1300년을 자랑하는 한민족의 경쟁은 비록 6.25전쟁의 참상을 고려하더라도 한국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영불소 4강대국의 군사점령으로 군정이 장기간 실시되어 1990년10월3일 통일 때까지 주권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동독은 소련군, 서독은 미영불 3개국 군대주둔을 끝내야 통일을 말할 수 있었다. 한반도는 일제강점 피해국으로 남에 미군이 있으나 6.25전쟁 참전결과의 주둔이다.
1970~80년대 유럽을 다닌 고관대작들은 파리 특파원인 필자에게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빠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담은 빗나갔다. 독일은 15년 전 통일했으나 한반도 휴전장벽은 지금도 높기 때문이다.
1989년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후 329일 만에 통일을 이룬 독일에서 필자는 독일인에게서 ‘다음 차례는 한반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남한 특파원이 동서독을 누비며 베를린 장벽과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필자는 이념장벽과 냉전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한반도’라는 독일인의 말에 그래서 공감했다.
2000년3월 DJ의 베를린선언은 휴전장벽을 녹이는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사회는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으로 환영했고 노벨평화상은 DJ에 돌아갔다. 그 후 5년, 한반도는 북핵문제로 긴장악화에 시달리고 있으니, ‘역사의 퇴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대통령의 ‘얼굴 붉히더라도 할말은 한다’는 천명은 그래서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었다.
통일경쟁 패배국의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이제 한반도 통일을 운위하는 것은 쑥스럽고 염치가 없는 일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약속 5년이 지났지만 이행하지 않아 백지화된 것 같다. DJ-김정일 개인사업이 끝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겠다.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도 북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전시킴으로써 백지화되었다. 6자회담이 열렸으나 이제는 ‘핵보유국’임을 강변하고 있다. 베를린 제2선언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DJ의 베를린선언 실패로 북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둘러본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장벽 한가운데 있어 냉전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서베를린쪽 장벽 앞에 전망대를 만들어 관광객들이 동베를린을 넘겨다보며 냉전 비극을 체감했던 곳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연설이 세계를 감동시킨 곳이기도 하다. 통독 15년, 여기서 노 대통령은 어떤 감회가 들었을까.
통일상징 브란덴부르크의 교훈
한국정부는 통일을 너무 떠들어왔다. 냉전시대 독일은 통일을 터부시했다. 아무도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금기를 깬 사람은 1989년12월 콜 당시 총리였다. 서독의회 연설에서 그는 처음으로 3단계 통일방안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점령국들을 설득해 통일을 완성했다. 소련군은 1994년 철수했고 동시에 미영불 주둔군도 독일점령을 종식시켰다. 점령군이 철수하던 날 독일인들은 ‘댕큐’ ‘메르시’를 외치며 감사를 표했다. 참으로 이색풍경이었는데, 동독서 철수하는 소련군에게는 감사인사가 없었다. 독일인은 50년간 점령을 인내하며 ‘통일의 그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통일을 절규했다. 서독은 미영불 서방진영의 핵우산보호를 받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동독을 삼킬 수 있었다. 단숨에 통일을 이룬 독일인의 슬기는 분단국들의 귀감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닫는 한반도, 독일과 너무나 다른 냉전지대로 남아있다. 독일인의 슬기를 배워 민주-시장경제의 발전으로 국민결속을 도모해 결정적 기회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통일슬기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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