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 선정 이면에는 선정 위원들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이들은 발표 직전까지 합숙과 최종회의를 거치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나 특히 장 면, 영친왕, 장지연 등 일부 인물의 명단 포함 여부를 두고는 내부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선정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던 대표적 인물은 장 면 전 국무총리. 장 면의 경우 조선지원병제도 실시 축하회 발기인 참여,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산하 천주교연맹간사 역임, 총동원연맹 강연 참여 등의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 하지만 천주교라는 종교 자체가 교단차원에서 결정된 사항은 따라야 하는 수직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 등 그의 친일행적의 ‘자발성’에 대해 연구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편찬위는 결국 오랜 논쟁끝에 그를 ‘천주교 분야 친일인사’ 명단에 수록했다.
반면 영친왕의 경우 ‘자발성’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영친왕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에 입교한 뒤 장성급 장교가 됐기 때문에 외견상 친일인사 선정 기준은 확실히 ‘충족’하고 남았다.
그러나 편찬위측은 “볼모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데다 왕족을 무조건 육사에 입교시켰던 당시 관행으로 미뤄 영친왕의 경우 ‘자발성’보다 ‘강제성’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그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명단에 포함되자 시민들은 다소 의아해했으나 편찬위측은 “너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편찬위에 따르면 장지연은 비록 ‘시일야방성대곡’을 썼지만 매일신보에 친일 한시를 여러편 실은 것이 발견됐으며 이후 친일 성향의 언론사인 경남일보에서 주필까지 역임했다는 것.
한편 논란끝에 제외된 인사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이 있다.
편찬위에 따르면 그는 경성군사후원연맹 지도위원을 역임했고 조선 지원병제도제정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당시 친일 성향의 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백관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둔 채 시골로 은둔해버렸다.
편찬위는 “친일성향의 행사와 단체에서 백관수의 참여도를 볼 때 일시적 행사이거나 사소한 직책에 그친데다 초반 친일행적에서 후반에는 ‘은둔’이라는 방식으로 소극적이나마 저항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편찬위는 “선정 과정에서 몇몇 인사들은 친일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선정에 어려움이 컸다”면서도 “그러나 생존인물까지 서슴없이 명단에 포함할 수있었던 것은 ‘친일행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편찬위는 이날 명단에서 제외된 청마 유치환에 대해 “문학분야는 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함께 선정한 42명 명단을 그대로 받았다”며 “그 이후 청마의 친일시가 발견됐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내년에 다시 심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석용 기자
이들은 발표 직전까지 합숙과 최종회의를 거치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나 특히 장 면, 영친왕, 장지연 등 일부 인물의 명단 포함 여부를 두고는 내부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선정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던 대표적 인물은 장 면 전 국무총리. 장 면의 경우 조선지원병제도 실시 축하회 발기인 참여,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산하 천주교연맹간사 역임, 총동원연맹 강연 참여 등의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 하지만 천주교라는 종교 자체가 교단차원에서 결정된 사항은 따라야 하는 수직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 등 그의 친일행적의 ‘자발성’에 대해 연구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편찬위는 결국 오랜 논쟁끝에 그를 ‘천주교 분야 친일인사’ 명단에 수록했다.
반면 영친왕의 경우 ‘자발성’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영친왕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에 입교한 뒤 장성급 장교가 됐기 때문에 외견상 친일인사 선정 기준은 확실히 ‘충족’하고 남았다.
그러나 편찬위측은 “볼모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데다 왕족을 무조건 육사에 입교시켰던 당시 관행으로 미뤄 영친왕의 경우 ‘자발성’보다 ‘강제성’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그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명단에 포함되자 시민들은 다소 의아해했으나 편찬위측은 “너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편찬위에 따르면 장지연은 비록 ‘시일야방성대곡’을 썼지만 매일신보에 친일 한시를 여러편 실은 것이 발견됐으며 이후 친일 성향의 언론사인 경남일보에서 주필까지 역임했다는 것.
한편 논란끝에 제외된 인사로 백관수 동아일보 사장이 있다.
편찬위에 따르면 그는 경성군사후원연맹 지도위원을 역임했고 조선 지원병제도제정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당시 친일 성향의 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백관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둔 채 시골로 은둔해버렸다.
편찬위는 “친일성향의 행사와 단체에서 백관수의 참여도를 볼 때 일시적 행사이거나 사소한 직책에 그친데다 초반 친일행적에서 후반에는 ‘은둔’이라는 방식으로 소극적이나마 저항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편찬위는 “선정 과정에서 몇몇 인사들은 친일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선정에 어려움이 컸다”면서도 “그러나 생존인물까지 서슴없이 명단에 포함할 수있었던 것은 ‘친일행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편찬위는 이날 명단에서 제외된 청마 유치환에 대해 “문학분야는 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함께 선정한 42명 명단을 그대로 받았다”며 “그 이후 청마의 친일시가 발견됐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내년에 다시 심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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