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8.고려의 교종사찰들(양주 회암사지와 원주 법천사지)>가장 화려했던, 그러나 완벽한 폐허로 남은 절터들
지역내일
2001-01-19
(수정 2001-01-19 오후 2:36:05)
의정부에서 양주군 주내를 거쳐 동두천으로 올라가는 3번국도는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끊어졌지만,
원래 서울에서 함경도까지 이어진 ‘눈물 많은’ 길이다.
왕자의 난으로 노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떠나 함흥에 있을 때 함흥차사들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할 이 길을 눈물로 떠났고, 이항복도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난 저 구름아’를 읊으며 이
길로 귀양을 갔다.
천보산 아래 자리한 거대한 절터
의정부에서 주내를 지나 덕정에서 오른쪽으로 15리쯤 들어가면 천보산 회암사지(檜巖寺址)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 회암사 뒤로는 천보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넓은 평원지대
가 펼쳐진다. 서남쪽 건너편으로는 백두대간 철령에서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漢北正脈
) 불국산이 보인다.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을 9개의 석축으로 쌓아 층층이 불단을 배치한 회암사지는 동서길
이 약 158m, 남북길이 약 230m에 이르며, 지금까지 확인된 주춧돌 수만 532개가 되는 엄청난 규모
의 유적지이다. 남북 중심축선은 천랑(지붕이 있는 복도)과 돌층계로 연결되는데, 각 단마다 건물 터
가 층층이 나타난다.
절터 중심부 외곽으로는 성벽을 방불케 하는 높은 석축을 쌓았다. 석축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6~7
m에 이르며, 길이는 동쪽 149m, 서쪽 165m, 북쪽 103m나 된다. 이렇게 장엄한 석축에 둘러싸인 회암
사는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마치 거대한 석굴(石窟) 속의 사원처럼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회암사 창건에 대해서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
:인도 승려)이 인도 서축(西竺)의 나란타사와 산수의 형상이 같은 천보산(天寶山) 서남쪽 기슭
에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우왕 2년(1376) 나옹(懶翁)과 그 문도 각전(覺田) 등이 불당 262칸을 중창하였으며,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여명에 이르렀다.
고려를 대표하는 양주 회암사 유적
조선초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이자 나옹의 제자였던 자초(自超)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
암사에 머물게 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를 보내 참례하도록 했고, 말년에는 아예 회암사로 들
어와 수도생활을 했다.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청에 못 이겨 귀경길에 올랐으나, 이
곳 양주 회암사까지 와서 주저앉아버렸다. 태종은 당시 국가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지금
의 의정부시로 옮겨 태조와 국사를 의논했으니, ‘의정부’란 지명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회암사는 조선초까지만 해도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세종 6년(1424)의 기록을 보면 이 절
에는 250여명의 승려가 있고, 경내가 1만여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종 3년(1472) 정희왕후가 다시 중창하였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으로 전국 제일의 수
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다시 억불정책이 펼쳐지게
되니, 명종 20년(1565) 사월초파일에 승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져 폐
허가 되고 말았다.
회암사의 건물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기록한 <>
산 회암사수조기>의 가람배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경주 불국사 같은 회랑식 배치나 중정
(中庭)식 가람배치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회암사지 뒤로는 1821(순조 21) 경기지방의 승려들이 지공·나옹·무학 세 스님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
면서 지은 작은 규모의 사찰이 회암사의 옛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고려의 다례의식
특히 이곳 회암사지에서 중요한 것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으로 동객실 서객실을 두고, ‘향적전
(香積殿)’이라는 이름의 다례(茶禮)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향적전 안에는 욕조로 추정되는 수조(돌로 만든 욕조)가 있고, 뒷마당에는 우물터가, 우물터 양쪽으
로 찻물을 끓이던 다관받침석 2개가 줄바르게 놓여 있다.
고려 귀족층의 다례의식은 보통 2~3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황량한 유구들만 남아 있
지만, 회암사 터에서 당시의 다례의식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려의 귀족들은 말을 타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하인들이 절 입구 층계 오른쪽에 있는 마방에 말
을 매고 쉬는 동안, 공양주는 중앙 통로로 걸어 올라간다. 큰 공양주가 왔으니 큰스님이 천랑을 따
라 걸어내려와 손님을 맞고, 향적전으로 인도해서 우선 따뜻한 물로 땀을 씻게 했을 것이다.
돌 욕조 안에는 뜨겁게 달군 돌덩이를 넣어 물을 따뜻하게 데웠으리라. 손님이 목욕을 하는 동안 향
적전 뒤편의 다관받침석 위에서는 찻물이 끓기 시작한다. 목욕을 마치고 새옷을 갈아입은 공양주에
게 스님이 향기로운 차를 들고 들어온다 …. 회암사 다례 공간은 크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교종 말기의 ‘장엄미학’을 대표하는 차 문화 유적지이다.
지난 95년 이 유적을 처음 학계에 보고한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교종의 장엄미학은 후
대로 갈수록 작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선종의 ‘극미학’으로 바뀌게 된다”고 설
명한다.
경복궁 안에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자리잡은 법천사지(法泉寺址)도 고려 귀족사회의 건축미학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법천사는 남한강과 원주 섬강이 만나는 흥원창 옆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기 전
까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쌀 씻은 물이 남한강변까지 흘렀다고 한다. 지광
국사가 유식학을 드높인 이곳에는 현재 당간지주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지광국사의 현묘탑은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로 옮겨져 지금은 경북궁 뒤뜰, 국립중앙박물관 북쪽에
서 있는데,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고려 귀족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미의식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현재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도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의 용 문양이
단연 돋보이는 유적이다.
이 석비에는 ‘동다(東茶)’ ‘제호’ 등 ‘차(茶)’와 관련된 글귀가 무려 6군데나 나와 많은
다인들이 즐겨 찾는다.
이 비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전한다.
1067년 10월 23일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
께서 제자들에게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곧 입적하였다.
폐허가 된 법천사지 안에는 이 밖에도 당시 건축물에 쓰였던 각종 석물들이 남아 있다. 이들 석물에
는 다른 건축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이하고 화려한 조각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연꽃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된 주춧돌, 하트 모양의 장식이 음각된 용도불명의 석물 … 자세히 살펴보
면 건물 기단석에까지 일정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
만, 이런 석물들을 기초로 사용한 건축물이 과연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지광국사현묘탑비>
원래 서울에서 함경도까지 이어진 ‘눈물 많은’ 길이다.
왕자의 난으로 노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떠나 함흥에 있을 때 함흥차사들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할 이 길을 눈물로 떠났고, 이항복도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난 저 구름아’를 읊으며 이
길로 귀양을 갔다.
천보산 아래 자리한 거대한 절터
의정부에서 주내를 지나 덕정에서 오른쪽으로 15리쯤 들어가면 천보산 회암사지(檜巖寺址)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 회암사 뒤로는 천보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넓은 평원지대
가 펼쳐진다. 서남쪽 건너편으로는 백두대간 철령에서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漢北正脈
) 불국산이 보인다.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을 9개의 석축으로 쌓아 층층이 불단을 배치한 회암사지는 동서길
이 약 158m, 남북길이 약 230m에 이르며, 지금까지 확인된 주춧돌 수만 532개가 되는 엄청난 규모
의 유적지이다. 남북 중심축선은 천랑(지붕이 있는 복도)과 돌층계로 연결되는데, 각 단마다 건물 터
가 층층이 나타난다.
절터 중심부 외곽으로는 성벽을 방불케 하는 높은 석축을 쌓았다. 석축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6~7
m에 이르며, 길이는 동쪽 149m, 서쪽 165m, 북쪽 103m나 된다. 이렇게 장엄한 석축에 둘러싸인 회암
사는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마치 거대한 석굴(石窟) 속의 사원처럼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회암사 창건에 대해서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
:인도 승려)이 인도 서축(西竺)의 나란타사와 산수의 형상이 같은 천보산(天寶山) 서남쪽 기슭
에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우왕 2년(1376) 나옹(懶翁)과 그 문도 각전(覺田) 등이 불당 262칸을 중창하였으며,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여명에 이르렀다.
고려를 대표하는 양주 회암사 유적
조선초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이자 나옹의 제자였던 자초(自超)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
암사에 머물게 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를 보내 참례하도록 했고, 말년에는 아예 회암사로 들
어와 수도생활을 했다.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청에 못 이겨 귀경길에 올랐으나, 이
곳 양주 회암사까지 와서 주저앉아버렸다. 태종은 당시 국가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지금
의 의정부시로 옮겨 태조와 국사를 의논했으니, ‘의정부’란 지명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회암사는 조선초까지만 해도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세종 6년(1424)의 기록을 보면 이 절
에는 250여명의 승려가 있고, 경내가 1만여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성종 3년(1472) 정희왕후가 다시 중창하였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으로 전국 제일의 수
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다시 억불정책이 펼쳐지게
되니, 명종 20년(1565) 사월초파일에 승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져 폐
허가 되고 말았다.
회암사의 건물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기록한 <>
산 회암사수조기>의 가람배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경주 불국사 같은 회랑식 배치나 중정
(中庭)식 가람배치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회암사지 뒤로는 1821(순조 21) 경기지방의 승려들이 지공·나옹·무학 세 스님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
면서 지은 작은 규모의 사찰이 회암사의 옛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고려의 다례의식
특히 이곳 회암사지에서 중요한 것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으로 동객실 서객실을 두고, ‘향적전
(香積殿)’이라는 이름의 다례(茶禮)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향적전 안에는 욕조로 추정되는 수조(돌로 만든 욕조)가 있고, 뒷마당에는 우물터가, 우물터 양쪽으
로 찻물을 끓이던 다관받침석 2개가 줄바르게 놓여 있다.
고려 귀족층의 다례의식은 보통 2~3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황량한 유구들만 남아 있
지만, 회암사 터에서 당시의 다례의식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려의 귀족들은 말을 타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하인들이 절 입구 층계 오른쪽에 있는 마방에 말
을 매고 쉬는 동안, 공양주는 중앙 통로로 걸어 올라간다. 큰 공양주가 왔으니 큰스님이 천랑을 따
라 걸어내려와 손님을 맞고, 향적전으로 인도해서 우선 따뜻한 물로 땀을 씻게 했을 것이다.
돌 욕조 안에는 뜨겁게 달군 돌덩이를 넣어 물을 따뜻하게 데웠으리라. 손님이 목욕을 하는 동안 향
적전 뒤편의 다관받침석 위에서는 찻물이 끓기 시작한다. 목욕을 마치고 새옷을 갈아입은 공양주에
게 스님이 향기로운 차를 들고 들어온다 …. 회암사 다례 공간은 크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교종 말기의 ‘장엄미학’을 대표하는 차 문화 유적지이다.
지난 95년 이 유적을 처음 학계에 보고한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교종의 장엄미학은 후
대로 갈수록 작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선종의 ‘극미학’으로 바뀌게 된다”고 설
명한다.
경복궁 안에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자리잡은 법천사지(法泉寺址)도 고려 귀족사회의 건축미학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법천사는 남한강과 원주 섬강이 만나는 흥원창 옆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기 전
까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쌀 씻은 물이 남한강변까지 흘렀다고 한다. 지광
국사가 유식학을 드높인 이곳에는 현재 당간지주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지광국사의 현묘탑은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로 옮겨져 지금은 경북궁 뒤뜰, 국립중앙박물관 북쪽에
서 있는데,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고려 귀족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미의식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현재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도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의 용 문양이
단연 돋보이는 유적이다.
이 석비에는 ‘동다(東茶)’ ‘제호’ 등 ‘차(茶)’와 관련된 글귀가 무려 6군데나 나와 많은
다인들이 즐겨 찾는다.
이 비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전한다.
1067년 10월 23일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
께서 제자들에게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곧 입적하였다.
폐허가 된 법천사지 안에는 이 밖에도 당시 건축물에 쓰였던 각종 석물들이 남아 있다. 이들 석물에
는 다른 건축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이하고 화려한 조각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연꽃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된 주춧돌, 하트 모양의 장식이 음각된 용도불명의 석물 … 자세히 살펴보
면 건물 기단석에까지 일정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
만, 이런 석물들을 기초로 사용한 건축물이 과연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지광국사현묘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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