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교체와 맞물려 진행 가능 … ‘사법살인’ 인혁당 판결 대표적
권력에 휘둘려 법질서 왜곡 … 승진과 맞물려 정권에 유착한 정치판사 논란
사법부의 과거사 고백이 가능할까. 지난 93년 3차 사법파동 때부터 소장 판사들이 주장해온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은 아직까지 멀기만 하다. 사법부가 정권에 굴복한 어두운 과거를 반성한 대법원장은 여지껏 없었다.
오는 9월 대법원장 교체로 사법부 개혁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과거의 반성 없이 사법부의 개혁이 진행되기 어렵다는 점에 비춰보면 시기적으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이 현실화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도 광복 60주년 경축사에서 과거사 진상규명과 청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등 매우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경찰·국정원 등이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잘못된 역사바로잡기에 나선 반면 검찰과 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법원 내부에서는 그 동안 일부 판사들을 중심으로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지만 대법원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법원 수뇌부가 사법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일선판사들은 대법원장 교체와 맞물려 전격적으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과 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7일 서울고법의 모 판사는 “개혁성향의 대법원장이 임명되면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과거의 잘못을 하루빨리 속죄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의 과거사 청산이 본격화되면 과거 왜곡된 판결로 끊임없이 비판받았던 사건들이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전 세계가 경악한 ‘사법살인’ =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사건은 부끄러운 사법부의 과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법살인’은 사건을 날조해 무고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고문 등을 통해 증거를 조작,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행위를 말한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학생운동조직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대법원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라는 혐의로 기소된 이들에 대해 유죄 선고를 내렸고 관련자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 후 불과 20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가 열리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인혁당 사건 재심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이 고문 등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2002년 조사결과를 근거로 그해 12월 재심이 청구됐으나 재판부가 두 차례 심리를 연 뒤 기록검토 등을 이유로 심리를 여지껏 미뤘다. 뿐만 아니라 법원은 75년 인혁당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30년 넘게 공개하지 않다가 지난 4월 공개해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진보당 사건 등 권력에 무릎 꿇은 과거 = 1958년 진보당 총수였던 조봉암 위원장이 거물간첩과 연루돼 사형을 받은 일명 ‘조봉암 사건’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가장 정치적 성격을 가진 재판으로 비판받고 있다.
육군 특무대는 1958년 거물간첩 양명산을 체포했다고 발표했고 검찰은 양이 열두 차례 북한을 오가면서 조봉암 위원장에게 북한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전달했다고 조사결과를 밝혔다.
1심 재판부는 조 위원장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의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판결로 인해 당시 집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정적이 사라지게 됐다. 일부에서는 사법부가 그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법원 판단도 외부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전 부장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내란죄의 성립여부. 내란죄로 볼 수 없다고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모두 사표제출을 강요받았고 재임명을 받지 못해 쫓겨났다. 제일 강경한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사건 심리 전부터 보안사 2인자라는 사람이 판사실에 찾아와서 빨리 상고기각을 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밖에 최근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동백림공작단 사건,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 등도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를 말해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박철언 회고록과 정치판사 논란 =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는 권력과 야합한 정치판사 논란과 맥을 같이 한다. 지난 11일 발간된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에는 대법원장 후보 면접과 관련한 글이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회고록에는 그가 1981년 3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 면접시험을 본 사실을 담고 있다. 당시 Y씨는 “국가안보가 민주주의나 기본권이나 인권보다 전제가 된다”고 했고 K씨는 “대임이 주어진다면 법관들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93년 3차 사법파동 당시 정치판사 문제가 불거졌고 서울형사지법의 폐쇄로 이어진 것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지금은 서울중앙지법으로 단일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서울형사지법과 민사지법이 별도로 존재했다. 형사재판권은 5·16군사쿠테타 이후 주동세력이 그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별도 법원에 맡겨졌다. 군사정권의 요구에 의한 영장발부, 형사처벌에 대해 당시 서울지방법원장이던 김제형 원장이 판사들에 영향력 행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권은 1963년 서울지법을 서울민사지방법원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나누고 김제형 원장을 보직해임하는 한편 형사재판의 효율적 통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각종 정치권력유지의 기반이 되는 사건의 비밀영장발부 및 재판을 특정 재판부에서 담당하게 됐고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들을 정권이 통제했다는 게 법조계의 정설로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형사지방법원이나 그 수석부장판사 상당수는 정치권력과 유착될 수밖에 없었고 남다른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 6월 이래 1988년까지 역대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을 지낸 사람들 대부분이대법원 판사로 승진했다. 이 밖에도 국보위와 청와대 파견 판사들이 승진에서 ‘승승장구’한 사실 등이 모두 정권과 사법부의 유착 의혹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경기 기자
권력에 휘둘려 법질서 왜곡 … 승진과 맞물려 정권에 유착한 정치판사 논란
사법부의 과거사 고백이 가능할까. 지난 93년 3차 사법파동 때부터 소장 판사들이 주장해온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은 아직까지 멀기만 하다. 사법부가 정권에 굴복한 어두운 과거를 반성한 대법원장은 여지껏 없었다.
오는 9월 대법원장 교체로 사법부 개혁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과거의 반성 없이 사법부의 개혁이 진행되기 어렵다는 점에 비춰보면 시기적으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이 현실화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도 광복 60주년 경축사에서 과거사 진상규명과 청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등 매우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경찰·국정원 등이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잘못된 역사바로잡기에 나선 반면 검찰과 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법원 내부에서는 그 동안 일부 판사들을 중심으로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지만 대법원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법원 수뇌부가 사법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일선판사들은 대법원장 교체와 맞물려 전격적으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과 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7일 서울고법의 모 판사는 “개혁성향의 대법원장이 임명되면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과거의 잘못을 하루빨리 속죄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과거를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의 과거사 청산이 본격화되면 과거 왜곡된 판결로 끊임없이 비판받았던 사건들이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전 세계가 경악한 ‘사법살인’ =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사건은 부끄러운 사법부의 과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법살인’은 사건을 날조해 무고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고문 등을 통해 증거를 조작,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행위를 말한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학생운동조직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대법원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라는 혐의로 기소된 이들에 대해 유죄 선고를 내렸고 관련자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 후 불과 20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가 열리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인혁당 사건 재심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이 고문 등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2002년 조사결과를 근거로 그해 12월 재심이 청구됐으나 재판부가 두 차례 심리를 연 뒤 기록검토 등을 이유로 심리를 여지껏 미뤘다. 뿐만 아니라 법원은 75년 인혁당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30년 넘게 공개하지 않다가 지난 4월 공개해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려고 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진보당 사건 등 권력에 무릎 꿇은 과거 = 1958년 진보당 총수였던 조봉암 위원장이 거물간첩과 연루돼 사형을 받은 일명 ‘조봉암 사건’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가장 정치적 성격을 가진 재판으로 비판받고 있다.
육군 특무대는 1958년 거물간첩 양명산을 체포했다고 발표했고 검찰은 양이 열두 차례 북한을 오가면서 조봉암 위원장에게 북한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전달했다고 조사결과를 밝혔다.
1심 재판부는 조 위원장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의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판결로 인해 당시 집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정적이 사라지게 됐다. 일부에서는 사법부가 그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법원 판단도 외부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전 부장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내란죄의 성립여부. 내란죄로 볼 수 없다고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모두 사표제출을 강요받았고 재임명을 받지 못해 쫓겨났다. 제일 강경한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사건 심리 전부터 보안사 2인자라는 사람이 판사실에 찾아와서 빨리 상고기각을 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밖에 최근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동백림공작단 사건,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 등도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를 말해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박철언 회고록과 정치판사 논란 =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는 권력과 야합한 정치판사 논란과 맥을 같이 한다. 지난 11일 발간된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에는 대법원장 후보 면접과 관련한 글이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회고록에는 그가 1981년 3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 면접시험을 본 사실을 담고 있다. 당시 Y씨는 “국가안보가 민주주의나 기본권이나 인권보다 전제가 된다”고 했고 K씨는 “대임이 주어진다면 법관들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93년 3차 사법파동 당시 정치판사 문제가 불거졌고 서울형사지법의 폐쇄로 이어진 것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지금은 서울중앙지법으로 단일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서울형사지법과 민사지법이 별도로 존재했다. 형사재판권은 5·16군사쿠테타 이후 주동세력이 그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별도 법원에 맡겨졌다. 군사정권의 요구에 의한 영장발부, 형사처벌에 대해 당시 서울지방법원장이던 김제형 원장이 판사들에 영향력 행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권은 1963년 서울지법을 서울민사지방법원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나누고 김제형 원장을 보직해임하는 한편 형사재판의 효율적 통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각종 정치권력유지의 기반이 되는 사건의 비밀영장발부 및 재판을 특정 재판부에서 담당하게 됐고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들을 정권이 통제했다는 게 법조계의 정설로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형사지방법원이나 그 수석부장판사 상당수는 정치권력과 유착될 수밖에 없었고 남다른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 6월 이래 1988년까지 역대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을 지낸 사람들 대부분이대법원 판사로 승진했다. 이 밖에도 국보위와 청와대 파견 판사들이 승진에서 ‘승승장구’한 사실 등이 모두 정권과 사법부의 유착 의혹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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