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펙(APEC)이 시작됐다. 건국 이래 최대 행사라며 여기저기서 들뜬 분위기이다.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를 경우 막대한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줄을 잇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단일 패권을 강화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며 에이펙을 폄하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강자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엇갈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어김없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일상생활을 꾸린다. 강남 타워팰리스나 구룡마을에 사는 사람도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제 나름의 관심사로 채워나간다. 단지 제1의 고민이 집값이냐, 가스중독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연봉 1억원을 버는 사람이나 2800만원을 버는 이도 자식교육에 대한 고민은 같지만 과목별 고액과외를 시키느냐, 동네 무료 공부방을 이용하느냐가 다르다. 남대문과 강남 명품관에서는 똑같이 유아용 의류를 판매하지만 단지 가격에서만 수십~수백 배 차이가 날 뿐이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의 부를 대표한다는 서울 강남. ‘강남’은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대신 자본과 유행을 좌지우지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돈을 기준으로 사람의 모든 활동이 평가받고 규정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70년대 ‘개발독재의 산물’인 강남은 80년대 ‘졸부들의 동네’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늘 강남 또는 강남사람이 등장하는 땅 투기 사건이나 사기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강남은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90년대 말 터진 IMF 이후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강남에 자본이 집중되고 소득이 양극화돼 이곳 사람들의 높은 소득이 주목받게 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강화됐다.
강남은 거대한 블랙홀처럼 자본을 끌어들여 더 높고 더 비싼 아파트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비롯해 삼성동 아이파크, 대치동 센트레빌 등이 평당 매매가 3000만~4000만원으로 위용을 겨루고 있다.
특히 타워팰리스는 귀족마케팅을 통해 기획된 새로운 개념의 상품으로, 강남 부유층의 주거공간을 대표하고 있다.
◆돈·사람·일자리 강남에 편중 = 지난 2002년 건설된 타워팰리스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의미를 던졌다. IMF로 건설사의 도산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대기업 건설사인 삼성은 구매력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을 포기하는 대신 IMF 상황에서 큰 돈을 번 신흥 부유층을 목표로 1대1 마케팅을 통해 입주자 선별작업을 벌였다.
마케팅 초기 입주자를 강남 사람으로 제한했고 직업도 전문직 종사자와 대기업 임원, 해외경험이 많은 이들로 압축했다.
이에 따라 최초 분양자는 대기업 임원 등 기업인이 절반에 가까웠고 의사와 교수 변호사 등 전문가가 뒤를 이었다. 소득 양극화 상황을 제대로 이용한 셈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제 전통적인 상류층은 강북의 한남동이나 성북동에 거주하고 신흥 부유층은 강남의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공식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이후 타워팰리스는 최고급 주거공간의 대명사로 등극했다.
타워팰리스의 폐쇄적인 공간구조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이곳에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른 입주자와 마주칠 일이 없고 지문과 번호를 이용한 출입시스템으로 남이 침범할 수 없도록 개인공간을 철저히 보장한다.
이는 경제적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건물 공간구조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지적을 낳았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들까지 강남 입성 러시에 가세하고 있다. 시정개발연구원이 지난 2월 수도권의 1242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1990년에서 2003년 사이 144개 기업이 본사를 서울 강남으로 옮긴 것으로 조사됐다. 종로·중구 등 서울 도심권에서는 이 기간에 137개 기업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양재섭 시정연 연구위원은 “강남이 업무지구로 부상하는 것은 정보통신 산업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며 “통신업 종사자의 증가세가 서울 도심은 120%에 불과했으나 강남은 무려 1048%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강남에 돈이 몰리는 상황은 명품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청담동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반포 신세계백화점은 대한민국 3대 명품점으로, 백화점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특히 초고소득층 고객들은 불경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쇼핑에서 수백만~수천만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통업계의 집중 공략대상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1명의 고객이 단 한번의 쇼핑으로 명품을 구매한 최고 액수는 6억5000만원으로,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1채 값이다.
◆강남 편입 꿈꾸는 소외인들의 집단대기소 = 타워팰리스로부터 직선거리로 1.3㎞ 떨어진 곳에서는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행정서류상에는 없는 유령마을, 강남 개포동 570번지 구룡마을이다. 이곳에는 4000여명이 살고 있지만 이 가운데 98%는 불법 거주자들이다.
80년대 말 서울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 목조 판자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인들도 가세했다. 행정기관에 등록될 수 없기에 ‘O지구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린다.
공공기관이 전혀 없어 2개의 자치조직에서 방범과 소방을 스스로 해결한다.
강남 사람들의 관심사가 집값이라면 구룡마을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존이다. 이제 이곳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겨울이 돌아왔다. 연탄가스 중독과 화재의 위험 때문이다.
구룡마을은 지난 2002년 4월 전체가 화재경계지구로 지정됐다. 한 곳서 불이 나면 전체로 옮겨 붙는 건 시간문제다.
7지구에 사는 정 모(59) 할머니는 “대부분이 연탄을 때는데다 집이 허술해 가스가 새곤 한다”며 “이 때문에 겨울철이면 늘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구룡마을 내에서도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개발이익을 기대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랜저 등 고급차량을 타고 다니며 위화감을 조성한다. 폐지수집상인 6지구 김 모(51)씨는 “딱지 사서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살던 사람들도 덩달아 나쁜 사람 취급 받는 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백채의 허름한 목조건물과 텃밭에 심어진 채소만을 보고 이곳을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만 판단하면 오산이라고 한 주민은 귀띔했다.
이곳은 개발기대감이 ‘아홉마리 용’처럼 꿈틀거리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단지 잠시 숨을 고르는 휴화산인 것이다.
개발될 날을 꿈꾸며 딱지를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 ‘강남’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를 목 놓아 기다리는 집단 대기소이다.
대모산을 오르던 한 등산객의 혼잣말은 의미심장했다. “구룡마을 같은 곳이 있어야 타워팰리스도 빛이 나는 거겠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기자 뇌리에 “강렬한 햇살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말이 떠올랐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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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이와 달리 미국의 단일 패권을 강화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며 에이펙을 폄하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강자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엇갈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어김없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일상생활을 꾸린다. 강남 타워팰리스나 구룡마을에 사는 사람도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제 나름의 관심사로 채워나간다. 단지 제1의 고민이 집값이냐, 가스중독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연봉 1억원을 버는 사람이나 2800만원을 버는 이도 자식교육에 대한 고민은 같지만 과목별 고액과외를 시키느냐, 동네 무료 공부방을 이용하느냐가 다르다. 남대문과 강남 명품관에서는 똑같이 유아용 의류를 판매하지만 단지 가격에서만 수십~수백 배 차이가 날 뿐이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의 부를 대표한다는 서울 강남. ‘강남’은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대신 자본과 유행을 좌지우지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돈을 기준으로 사람의 모든 활동이 평가받고 규정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70년대 ‘개발독재의 산물’인 강남은 80년대 ‘졸부들의 동네’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늘 강남 또는 강남사람이 등장하는 땅 투기 사건이나 사기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강남은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90년대 말 터진 IMF 이후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강남에 자본이 집중되고 소득이 양극화돼 이곳 사람들의 높은 소득이 주목받게 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강화됐다.
강남은 거대한 블랙홀처럼 자본을 끌어들여 더 높고 더 비싼 아파트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비롯해 삼성동 아이파크, 대치동 센트레빌 등이 평당 매매가 3000만~4000만원으로 위용을 겨루고 있다.
특히 타워팰리스는 귀족마케팅을 통해 기획된 새로운 개념의 상품으로, 강남 부유층의 주거공간을 대표하고 있다.
◆돈·사람·일자리 강남에 편중 = 지난 2002년 건설된 타워팰리스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의미를 던졌다. IMF로 건설사의 도산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대기업 건설사인 삼성은 구매력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을 포기하는 대신 IMF 상황에서 큰 돈을 번 신흥 부유층을 목표로 1대1 마케팅을 통해 입주자 선별작업을 벌였다.
마케팅 초기 입주자를 강남 사람으로 제한했고 직업도 전문직 종사자와 대기업 임원, 해외경험이 많은 이들로 압축했다.
이에 따라 최초 분양자는 대기업 임원 등 기업인이 절반에 가까웠고 의사와 교수 변호사 등 전문가가 뒤를 이었다. 소득 양극화 상황을 제대로 이용한 셈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제 전통적인 상류층은 강북의 한남동이나 성북동에 거주하고 신흥 부유층은 강남의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공식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이후 타워팰리스는 최고급 주거공간의 대명사로 등극했다.
타워팰리스의 폐쇄적인 공간구조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이곳에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른 입주자와 마주칠 일이 없고 지문과 번호를 이용한 출입시스템으로 남이 침범할 수 없도록 개인공간을 철저히 보장한다.
이는 경제적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건물 공간구조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지적을 낳았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들까지 강남 입성 러시에 가세하고 있다. 시정개발연구원이 지난 2월 수도권의 1242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1990년에서 2003년 사이 144개 기업이 본사를 서울 강남으로 옮긴 것으로 조사됐다. 종로·중구 등 서울 도심권에서는 이 기간에 137개 기업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양재섭 시정연 연구위원은 “강남이 업무지구로 부상하는 것은 정보통신 산업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며 “통신업 종사자의 증가세가 서울 도심은 120%에 불과했으나 강남은 무려 1048%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강남에 돈이 몰리는 상황은 명품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청담동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반포 신세계백화점은 대한민국 3대 명품점으로, 백화점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특히 초고소득층 고객들은 불경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쇼핑에서 수백만~수천만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통업계의 집중 공략대상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1명의 고객이 단 한번의 쇼핑으로 명품을 구매한 최고 액수는 6억5000만원으로,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1채 값이다.
◆강남 편입 꿈꾸는 소외인들의 집단대기소 = 타워팰리스로부터 직선거리로 1.3㎞ 떨어진 곳에서는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행정서류상에는 없는 유령마을, 강남 개포동 570번지 구룡마을이다. 이곳에는 4000여명이 살고 있지만 이 가운데 98%는 불법 거주자들이다.
80년대 말 서울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 목조 판자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인들도 가세했다. 행정기관에 등록될 수 없기에 ‘O지구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린다.
공공기관이 전혀 없어 2개의 자치조직에서 방범과 소방을 스스로 해결한다.
강남 사람들의 관심사가 집값이라면 구룡마을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존이다. 이제 이곳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겨울이 돌아왔다. 연탄가스 중독과 화재의 위험 때문이다.
구룡마을은 지난 2002년 4월 전체가 화재경계지구로 지정됐다. 한 곳서 불이 나면 전체로 옮겨 붙는 건 시간문제다.
7지구에 사는 정 모(59) 할머니는 “대부분이 연탄을 때는데다 집이 허술해 가스가 새곤 한다”며 “이 때문에 겨울철이면 늘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구룡마을 내에서도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개발이익을 기대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랜저 등 고급차량을 타고 다니며 위화감을 조성한다. 폐지수집상인 6지구 김 모(51)씨는 “딱지 사서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살던 사람들도 덩달아 나쁜 사람 취급 받는 게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백채의 허름한 목조건물과 텃밭에 심어진 채소만을 보고 이곳을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만 판단하면 오산이라고 한 주민은 귀띔했다.
이곳은 개발기대감이 ‘아홉마리 용’처럼 꿈틀거리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단지 잠시 숨을 고르는 휴화산인 것이다.
개발될 날을 꿈꾸며 딱지를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 ‘강남’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를 목 놓아 기다리는 집단 대기소이다.
대모산을 오르던 한 등산객의 혼잣말은 의미심장했다. “구룡마을 같은 곳이 있어야 타워팰리스도 빛이 나는 거겠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기자 뇌리에 “강렬한 햇살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말이 떠올랐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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