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은행이 완전감자(減資)은행으로 전락했어도 “환골탈태(換骨奪胎)하면 회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91년 10월 노동금융(주)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평화은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노동은행이다.
한국노총이 주도했고, 노태우 정부가 이를 승인하면서 ‘노동자에게도 문턱이 낮은 은행’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받았다.
이런 기대감 탓인지 씨앗 돈이 충분치 않은 노동계가 자본금 2730억원 가운데 10%가 넘는 돈을 투자
하는 등 반응이 좋았다. 항운노련이 퇴직금기금 중 210억원이나 출자했고, 노총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 15억원을, 각자 알아서 출자한 근로자가 1만여명을 넘었다.
◇ 첫 단추를 잘못 뀄다 = 그러나 노동계가 은행경영에 무지했던 것이 노동은행의 첫 단추를 잘못 꿰
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평화은행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노동계 인사는 “은행 업무를 잘 모르니까 금융전문가를
은행장으로 영입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영입한 인물이 중소기업은행 부행장 출신인 박 모 행장이
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두고두고 잘못된 선택으로 회자되고 있다.
92년 5월에 취임해 98년 2월에 물러나기까지 임기를 꽉 채운 박 모 행장은 노동계를 불온시했던 것
으로 유명했다. 또 근로자 전담은행은 소매금융 전담은행인데 기업금융 전문가가 행장이다보니 업무
의 효율성이 증대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업무의 뼈대가 비틀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92년 6월 공모를 거쳐 확정된 은행 명칭이 노동은행 또는 근로은행이라고 붙여지기보다는 평화은행
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근로자 전담은행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기업금융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은행
내 분위기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94년 4월부터 정부로부터 근로자주택자금 1000억원(95년 1000억원, 96년 15000억원, 97년 2000억원)을
받아 소매금융을 본격화했지만 그 와중에도 기업금융 비중을 높여만 갔다. 특히 93년부터 거래를
시작한 대우그룹과의 관계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99년 7월 대우가 부도나자 평화
은행 역시 헤어나올 수 없는 부실의 늪에 빠져 버렸다.
◇ 평화은행 기업금융 때문에 무너졌다 =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진 뒤 평화은행은 98년 10
월 2730억원의 자본금을 1000억원으로 감자했다. 이후 99년 5월까지 3차례에 걸친 증자를 통해 1000억
원의 자본금을 5200억원으로 늘리는데 성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99년 6월말 현재 당기순이익이 1448억원이나 났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끝내 화근이었
다. 그 해 7월 대우가 부도나면서 대우채권에 3500억원이나 물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8.88%에 달
했던 BIS(국제결제은행) 비율은 나락으로 떨어진 뒤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2000년 11월 8일 은행경영평가위원회는 평화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고, 지난해말 공적자
금 투입을 조건으로 완전감자를 단행했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은 166원으로 떨어졌다.
여기에다 정부가 평화은행 좌초를 재촉했다. 정부는 당초 일본처럼 국제업무 비취급은행에 대해서
는 BIS비율을 차등적용키로 하고, 국제업무를 취급하지 않는 평화은행은 ‘오는 2001년 9월말까지
BIS비율 8%를 충족시키도록’ MOU를 체결했었다. 그런데 돌연 2000년 말까지로 2단계 금융부문 구조
조정을 못박더니 평화은행 쪽에 ‘BIS비율 10%를 2000년 말까지 맞추라’고 강요했다.
또한 “공적자금 투입은행에 대한 추가감자는 없다”고 해놓고 완전감자를 단행해 버렸다.
◇ 그래도 노동은행 살려야 한다 = 결국 평화은행은 한빛은행 주도의 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됐다. 하지
만 “평화은행이 기업금융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근로자 전담은행으로 환골탈태하는 과정을 거친다
면 독자생존도 보장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상당수 있다.
무엇보다 “금융혜택에서 소외된 근로자를 위한 전담은행은 사회의 균형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노동계 안팎의 중론이다.
평화은행 관계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했던 대로 최소한 2002년 6월까지 독립경영을 보장해
주고, 정부가 근로자를 위한 정책자금(근로자주택자금)을 지원해준다면 충분히 회생 가능하다”며
“근로자 전담은행으로 거듭날 준비와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평화은행은 근로자 전담은행이 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곧 제정될 <근로자복지기본법>에 자신들
을 ‘융자업무 전담취급기관’ ‘근로자복지진흥기금 운영 전담금융기관’ ‘근로자신용보증 관련
융자 전담금융기관’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이강연 기자 lkyym@naeil.com근로자복지기본법>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91년 10월 노동금융(주)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평화은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노동은행이다.
한국노총이 주도했고, 노태우 정부가 이를 승인하면서 ‘노동자에게도 문턱이 낮은 은행’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한껏 받았다.
이런 기대감 탓인지 씨앗 돈이 충분치 않은 노동계가 자본금 2730억원 가운데 10%가 넘는 돈을 투자
하는 등 반응이 좋았다. 항운노련이 퇴직금기금 중 210억원이나 출자했고, 노총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 15억원을, 각자 알아서 출자한 근로자가 1만여명을 넘었다.
◇ 첫 단추를 잘못 뀄다 = 그러나 노동계가 은행경영에 무지했던 것이 노동은행의 첫 단추를 잘못 꿰
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평화은행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노동계 인사는 “은행 업무를 잘 모르니까 금융전문가를
은행장으로 영입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영입한 인물이 중소기업은행 부행장 출신인 박 모 행장이
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두고두고 잘못된 선택으로 회자되고 있다.
92년 5월에 취임해 98년 2월에 물러나기까지 임기를 꽉 채운 박 모 행장은 노동계를 불온시했던 것
으로 유명했다. 또 근로자 전담은행은 소매금융 전담은행인데 기업금융 전문가가 행장이다보니 업무
의 효율성이 증대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업무의 뼈대가 비틀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92년 6월 공모를 거쳐 확정된 은행 명칭이 노동은행 또는 근로은행이라고 붙여지기보다는 평화은행
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근로자 전담은행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기업금융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은행
내 분위기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94년 4월부터 정부로부터 근로자주택자금 1000억원(95년 1000억원, 96년 15000억원, 97년 2000억원)을
받아 소매금융을 본격화했지만 그 와중에도 기업금융 비중을 높여만 갔다. 특히 93년부터 거래를
시작한 대우그룹과의 관계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99년 7월 대우가 부도나자 평화
은행 역시 헤어나올 수 없는 부실의 늪에 빠져 버렸다.
◇ 평화은행 기업금융 때문에 무너졌다 =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진 뒤 평화은행은 98년 10
월 2730억원의 자본금을 1000억원으로 감자했다. 이후 99년 5월까지 3차례에 걸친 증자를 통해 1000억
원의 자본금을 5200억원으로 늘리는데 성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99년 6월말 현재 당기순이익이 1448억원이나 났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끝내 화근이었
다. 그 해 7월 대우가 부도나면서 대우채권에 3500억원이나 물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8.88%에 달
했던 BIS(국제결제은행) 비율은 나락으로 떨어진 뒤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2000년 11월 8일 은행경영평가위원회는 평화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했고, 지난해말 공적자
금 투입을 조건으로 완전감자를 단행했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은 166원으로 떨어졌다.
여기에다 정부가 평화은행 좌초를 재촉했다. 정부는 당초 일본처럼 국제업무 비취급은행에 대해서
는 BIS비율을 차등적용키로 하고, 국제업무를 취급하지 않는 평화은행은 ‘오는 2001년 9월말까지
BIS비율 8%를 충족시키도록’ MOU를 체결했었다. 그런데 돌연 2000년 말까지로 2단계 금융부문 구조
조정을 못박더니 평화은행 쪽에 ‘BIS비율 10%를 2000년 말까지 맞추라’고 강요했다.
또한 “공적자금 투입은행에 대한 추가감자는 없다”고 해놓고 완전감자를 단행해 버렸다.
◇ 그래도 노동은행 살려야 한다 = 결국 평화은행은 한빛은행 주도의 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됐다. 하지
만 “평화은행이 기업금융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근로자 전담은행으로 환골탈태하는 과정을 거친다
면 독자생존도 보장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상당수 있다.
무엇보다 “금융혜택에서 소외된 근로자를 위한 전담은행은 사회의 균형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노동계 안팎의 중론이다.
평화은행 관계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했던 대로 최소한 2002년 6월까지 독립경영을 보장해
주고, 정부가 근로자를 위한 정책자금(근로자주택자금)을 지원해준다면 충분히 회생 가능하다”며
“근로자 전담은행으로 거듭날 준비와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평화은행은 근로자 전담은행이 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곧 제정될 <근로자복지기본법>에 자신들
을 ‘융자업무 전담취급기관’ ‘근로자복지진흥기금 운영 전담금융기관’ ‘근로자신용보증 관련
융자 전담금융기관’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이강연 기자 lkyym@naeil.com근로자복지기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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