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굶다가 사경 헤맨 어린 시절 기억 못잊어”
부제: 유산으로 장학회 만들고, 개업 축의금 모두 불우이웃에게
국세청 공보관과 대전지방국세청장을 지냈던 조용근(60) 세무사가 38년 공직생활을 떠난 후 나눔 실천 전도사로 변신했다.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지방국세청장까지 지낸 조용근씨는 세무공무원들 사이에서 신화로 불린다. 이런 조씨가 지난해 11월 11일 석성이라는 세무법인을 열었다. 조씨는 개업축하를 해 주는 인사들에게 “화환 대신 사랑의 쌀이나 성금만 받겠다”고 했다.
이렇게 모인 쌀과 현금이 4600만원 가량 됐다. 이중 1200만원 가량은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에 기증했다. 이밖에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현직 세무공무원들에게 1600만원, 강남구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 독거노인들을 위해 800만원, 정신지체장애인 시설인 소망의 집에 600만원 가량을 기증했다.
조 세무사에게 ‘나눔’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다. 그가 공을 들이는 곳은 석성장학회이다. 석성장학회 종자돈은 선친이 물려준 집 한 채였다. 84년 유산으로 상속받은 집은 당시 시가 5000만원 가량 됐지만 94년 3억원대로 뛰었다. 조씨는 이 유산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어 장학회를 설립했다. 10년동안 이 장학회에서 지급한 장학금만 3억2000만원이다.
또 전현직 세무공무원 봉사 조직인 ‘마태모임’을 만들어 3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마태모임은 매달 1회 소망의 집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한다. 30여명의 봉사자들은 매달 조 세무사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며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씨가 이처럼 나눔을 생활의 일부로 실천한 것은 그의 삶과 무관치 않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창시절 단 한번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았지만 졸업식 때마다 밀린 공납금과 앨범값 때문에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워 참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동생과 함께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당시 동생은 결국 운명의 끈을 놓았다. 조 세무사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건강하니 하느님이 동생 몫까지 봉사하며 살라는 뜻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을 잊게 해준 공직생활이 항상 고맙고 감사했다. 조씨는 “아버님 유산을 장학금으로 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사회 양극화와 빈곤층을 해소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정석용 기자 sy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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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유산으로 장학회 만들고, 개업 축의금 모두 불우이웃에게
국세청 공보관과 대전지방국세청장을 지냈던 조용근(60) 세무사가 38년 공직생활을 떠난 후 나눔 실천 전도사로 변신했다.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지방국세청장까지 지낸 조용근씨는 세무공무원들 사이에서 신화로 불린다. 이런 조씨가 지난해 11월 11일 석성이라는 세무법인을 열었다. 조씨는 개업축하를 해 주는 인사들에게 “화환 대신 사랑의 쌀이나 성금만 받겠다”고 했다.
이렇게 모인 쌀과 현금이 4600만원 가량 됐다. 이중 1200만원 가량은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에 기증했다. 이밖에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현직 세무공무원들에게 1600만원, 강남구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 독거노인들을 위해 800만원, 정신지체장애인 시설인 소망의 집에 600만원 가량을 기증했다.
조 세무사에게 ‘나눔’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다. 그가 공을 들이는 곳은 석성장학회이다. 석성장학회 종자돈은 선친이 물려준 집 한 채였다. 84년 유산으로 상속받은 집은 당시 시가 5000만원 가량 됐지만 94년 3억원대로 뛰었다. 조씨는 이 유산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어 장학회를 설립했다. 10년동안 이 장학회에서 지급한 장학금만 3억2000만원이다.
또 전현직 세무공무원 봉사 조직인 ‘마태모임’을 만들어 3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마태모임은 매달 1회 소망의 집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한다. 30여명의 봉사자들은 매달 조 세무사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며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조씨가 이처럼 나눔을 생활의 일부로 실천한 것은 그의 삶과 무관치 않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창시절 단 한번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았지만 졸업식 때마다 밀린 공납금과 앨범값 때문에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워 참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동생과 함께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당시 동생은 결국 운명의 끈을 놓았다. 조 세무사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건강하니 하느님이 동생 몫까지 봉사하며 살라는 뜻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을 잊게 해준 공직생활이 항상 고맙고 감사했다. 조씨는 “아버님 유산을 장학금으로 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사회 양극화와 빈곤층을 해소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정석용 기자 sy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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