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땅속은 역사의 보물창고다
명지대 건축대학교수 김 홍 식
수년 전 종로의 육이전(조선조 상가)을 발굴한 적이 있다. 100년 전, 200년 전, 임란·병란 후, 조선 전기, 드디어 지표 아래 약 5m 지점에서 조선초의 상가를 거의 완벽한 상태에서 볼 수 있었다.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구들과 고방이, 뒤퇴에는 길게 봉당이 놓이는 4간집 전포가 불에 탄 채 남아 있었다. 육이전이란 이것을 하나의 단위로 한 긴 장랑(줄행랑)이었다. 이런 건물이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줄지어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발굴한 이 집은 나중에 돈을 벌었는지 이웃집을 사서 내부에서 서로 통행할 수 있도록 튼 구조였다. 그 뒤 100년이 지나 불이 났고, 그 위에 재건축한 상가가 들어섰는데 길을 잡아먹으면서 앞으로 증축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하수도를 크게 확장한다. 이렇게 밀고 당기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1910년이 되면 결국 길 쪽으로 한 칸을 먹고 상가가 들어선다.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도로도 로마처럼 박석(넓적한 돌)으로 포장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혹은 보셨는지 … 발굴 과정에서 금은 세공을 하던 집이며 수정으로 갓끈을 만들던 집, 무슨 일인지 불이 났는데 금고 안의 돈조차 꺼내가지 못했던 현장도 발견됐다. 5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신던 일본 ‘게다’같이 생긴 신발도 나왔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어느 학회에서 발표했는데, 조선시대 상가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는 “그 건축물은 절대 상가일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상가에는 ‘구들’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아마도 상가 안쪽의 ‘살림채’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앞 도로쪽을 발굴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자료를 가지고 확증해 줄 수가 없었다. 종로 바닥은 지하철을 파면서 다 파괴해 버렸으니 어떡할 것인가?
얼마 전 남대문 주변을 새롭게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정비를 위해 바닥을 판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대문의 원 바닥이 1.5m 아래에서 발견됐다. 결국 문화재위원회도 이 깊이까지 표토를 제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 모양이다. 우리가 지금 지상에서 보고 있는 동대문, 종루, 창덕궁 앞 인정문 등은 모두 땅속에 묻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경복궁 역시 조선 초기 유적은 전부 땅속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결국은 고종 때의 지표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근간에 서울 시내에 지어졌던 수많은 건축물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역사의 흔적이 커다란 굴삭기 삽날 아래 파괴되었을까 소름이 끼칠 정도다. 지금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지표조사 범위는 3만㎡ 이상이다. 이 정도라면 상당히 큰 재개발지구나 해당할까, 규모가 상당히 큰 빌딩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일반 건축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재수 없게(!) 문화재에서 100m 이내에 있어 문화재심의를 받게 되는 경우, “문화재 시굴조사를 해보세요”라고 권고해야 마지못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발굴조사는 민원 때문에 많은 사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발굴조사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심지어 공사자들은 발굴조사기관을 얻지 못해 볼멘 민원을 제기하고 있고, 학자들은 매달 쏟아지는 발굴보고서를 일별조차 못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건축역사가가 알고 싶은, 역사시대 이후의 마을주거지 혹은 도시시설물들에 대한 발굴보고는 별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역사시대 이후의 유적지는 사람들이 계속 같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의 유구가 파괴되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많이 파괴되었을 것 같은 서울에서 오히려 옛 유적이 잘 남아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혹, 발굴을 전공으로 하는 고고학자들의 주된 관심분야가 선사시대에 치우쳐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서울은 조선 600년의 고도일 뿐 아니라 2000년 전 옛 백제의 도읍지로도 알려져 있다. 성 안에만 조선초에는 10만이 살았다고 하고 조선후기에는 30만이 살았고,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조선조 800만 인민이 세금을 내고 명운을 같이 하던 곳이다.
이런 역사도시의 특정한 지역은 비록 개발면적이 적고 주변에 지정된 문화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표 및 발굴조사를 해서 기록이라도 할 수 있도록 지표조사구역으로 지정해 둘 필요가 있다. 역사시대의 연구도 모두 문헌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발굴조사 기록은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야에서 중요하다. 문헌에 없는 역사적 보물이 모두 땅속에 실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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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건축대학교수 김 홍 식
수년 전 종로의 육이전(조선조 상가)을 발굴한 적이 있다. 100년 전, 200년 전, 임란·병란 후, 조선 전기, 드디어 지표 아래 약 5m 지점에서 조선초의 상가를 거의 완벽한 상태에서 볼 수 있었다.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구들과 고방이, 뒤퇴에는 길게 봉당이 놓이는 4간집 전포가 불에 탄 채 남아 있었다. 육이전이란 이것을 하나의 단위로 한 긴 장랑(줄행랑)이었다. 이런 건물이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줄지어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발굴한 이 집은 나중에 돈을 벌었는지 이웃집을 사서 내부에서 서로 통행할 수 있도록 튼 구조였다. 그 뒤 100년이 지나 불이 났고, 그 위에 재건축한 상가가 들어섰는데 길을 잡아먹으면서 앞으로 증축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하수도를 크게 확장한다. 이렇게 밀고 당기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1910년이 되면 결국 길 쪽으로 한 칸을 먹고 상가가 들어선다.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도로도 로마처럼 박석(넓적한 돌)으로 포장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혹은 보셨는지 … 발굴 과정에서 금은 세공을 하던 집이며 수정으로 갓끈을 만들던 집, 무슨 일인지 불이 났는데 금고 안의 돈조차 꺼내가지 못했던 현장도 발견됐다. 5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신던 일본 ‘게다’같이 생긴 신발도 나왔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어느 학회에서 발표했는데, 조선시대 상가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는 “그 건축물은 절대 상가일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상가에는 ‘구들’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아마도 상가 안쪽의 ‘살림채’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앞 도로쪽을 발굴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자료를 가지고 확증해 줄 수가 없었다. 종로 바닥은 지하철을 파면서 다 파괴해 버렸으니 어떡할 것인가?
얼마 전 남대문 주변을 새롭게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정비를 위해 바닥을 판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대문의 원 바닥이 1.5m 아래에서 발견됐다. 결국 문화재위원회도 이 깊이까지 표토를 제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 모양이다. 우리가 지금 지상에서 보고 있는 동대문, 종루, 창덕궁 앞 인정문 등은 모두 땅속에 묻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경복궁 역시 조선 초기 유적은 전부 땅속 깊이 묻혀 있기 때문에 결국은 고종 때의 지표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근간에 서울 시내에 지어졌던 수많은 건축물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역사의 흔적이 커다란 굴삭기 삽날 아래 파괴되었을까 소름이 끼칠 정도다. 지금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지표조사 범위는 3만㎡ 이상이다. 이 정도라면 상당히 큰 재개발지구나 해당할까, 규모가 상당히 큰 빌딩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일반 건축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재수 없게(!) 문화재에서 100m 이내에 있어 문화재심의를 받게 되는 경우, “문화재 시굴조사를 해보세요”라고 권고해야 마지못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발굴조사는 민원 때문에 많은 사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발굴조사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심지어 공사자들은 발굴조사기관을 얻지 못해 볼멘 민원을 제기하고 있고, 학자들은 매달 쏟아지는 발굴보고서를 일별조차 못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건축역사가가 알고 싶은, 역사시대 이후의 마을주거지 혹은 도시시설물들에 대한 발굴보고는 별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역사시대 이후의 유적지는 사람들이 계속 같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의 유구가 파괴되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많이 파괴되었을 것 같은 서울에서 오히려 옛 유적이 잘 남아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혹, 발굴을 전공으로 하는 고고학자들의 주된 관심분야가 선사시대에 치우쳐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서울은 조선 600년의 고도일 뿐 아니라 2000년 전 옛 백제의 도읍지로도 알려져 있다. 성 안에만 조선초에는 10만이 살았다고 하고 조선후기에는 30만이 살았고, 한 나라의 도읍지로서 조선조 800만 인민이 세금을 내고 명운을 같이 하던 곳이다.
이런 역사도시의 특정한 지역은 비록 개발면적이 적고 주변에 지정된 문화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표 및 발굴조사를 해서 기록이라도 할 수 있도록 지표조사구역으로 지정해 둘 필요가 있다. 역사시대의 연구도 모두 문헌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발굴조사 기록은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야에서 중요하다. 문헌에 없는 역사적 보물이 모두 땅속에 실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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