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을 다시 생각한다
‘4.3사건’ 58주년이 되는 3일 제주도에서는 희생자 위령제 및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4.3사건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정부는 2003년 공식 ‘4.3사건 진상보고서’를 채택했고 노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서 공식 사과 한바 있으나 위령제에 참석해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대통령은 2003년에도 위령제에 참석하려 했으나 끝내 참석하지 못했었다. 이른바 보수진영에서 대통령의 참석을 끈질기게 반대했고 청와대 내에서 까지 찬반양론이 분분해 결국 참석을 보류했던 것이다.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노대통령의 행사 참석은 역사적인 일이라 할수 있다. 보수진영은 그해 3월 31일 서울의 중앙지에 “대한민국 건국을 무너 뜨리려던 공산폭동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과한다니 이런 자해 행위가 어디 있습니까”란 대문짝 만한 광고까지 내며 정부의 사과를 반대했다.
폭도 토벌과 양민학살의 잘못 혼동해선 안돼
그러나 이번에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반대가 없었다. 따라서 4.3사건을 둘러싼 보수·진보 진영간 표면적 갈등은 이제 한풀 꺾인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진전이다. 십수년전 한 신문이 베트남전에서 일부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한 사례가 있음을 폭로하자 참전용사라는 사람들이 신문사를 찾아가 보도내용에 강력히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보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우리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운 군의 명예와 희생은 그것들대로 높이 평가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나마 우리군이 베트남 양민들을 부당하게 희생 시켰거나 불법적 군사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비판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4.3사건’도 마찬가지다. 공산폭도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했고 수많은 우익인사들을 살해한 것이 4.3사건의 발단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당연히 응징돼야 했고 또한 진압됐다. 그러나 제주도에 간 군과 경찰이 폭도들을 진압 한답시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은 그것대로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공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한라산 자락 마을의 95%를 불태웠고 양민 2만50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조사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당시 폭동을 일으킨 공산폭도는 350여명이었다. 희생자 속에는 수많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포함돼 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토벌대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유족들은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는 이유만으로 반세기 동안이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군과 경찰도 명예위해 사과해야
1987년 ‘한라산’이란 장시를 통해 4.3사건을 최초로 공론화 시킨 시인 이선화 씨는 이 시를 쓰기위해 한라산 일대를 취재하다 더 큰 절망에 빠졌다고 고백한바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더욱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4.3은 기억조차 하면 안 되는 악몽이었던 것이다.
4.3사건의 규명은 역사의 자해행위가 아니라 역사의 자존행위인 것이다. 제주도 토벌대 본연의 임무와 빛나는 공헌을 위해서도 불법은 규명되고 잘못은 사죄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군의 명예를 위하는 길이다. 유태인 학살에 반세기가 넘도록 끊임없이 사죄하고 반성하는 독일과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은폐하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는 일본, 어느 쪽이 더 명예로운가.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돼있다. 19세기 말에 있었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교훈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권력이 무고한 시민을 어떻게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보불전쟁에서 진 프랑스 군은 무엇인가 희생양이 필요했고 때마침 군사기밀 유출사건이 터지자 유태계 포병 대위인 드레퓌스에게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이 사건은 진실과 인권옹호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우는 반 드레퓌스파로 프랑스 사회를 양분시켜 프랑스가 한때 혹심한 내홍을 겪었다. 종신형을 선고했던 군법회의는 10여년 만에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으나 프랑스 군부는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발생 100년을 넘긴 1995년에야 프랑스 군은 이와 관련 국민 앞에 사죄했다. 우리 군과 경찰도 제주도민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 대통령만으로는 부족하다. 군과 경찰의 명예를 위해서다.
임춘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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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58주년이 되는 3일 제주도에서는 희생자 위령제 및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4.3사건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정부는 2003년 공식 ‘4.3사건 진상보고서’를 채택했고 노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서 공식 사과 한바 있으나 위령제에 참석해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대통령은 2003년에도 위령제에 참석하려 했으나 끝내 참석하지 못했었다. 이른바 보수진영에서 대통령의 참석을 끈질기게 반대했고 청와대 내에서 까지 찬반양론이 분분해 결국 참석을 보류했던 것이다.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노대통령의 행사 참석은 역사적인 일이라 할수 있다. 보수진영은 그해 3월 31일 서울의 중앙지에 “대한민국 건국을 무너 뜨리려던 공산폭동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과한다니 이런 자해 행위가 어디 있습니까”란 대문짝 만한 광고까지 내며 정부의 사과를 반대했다.
폭도 토벌과 양민학살의 잘못 혼동해선 안돼
그러나 이번에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반대가 없었다. 따라서 4.3사건을 둘러싼 보수·진보 진영간 표면적 갈등은 이제 한풀 꺾인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진전이다. 십수년전 한 신문이 베트남전에서 일부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한 사례가 있음을 폭로하자 참전용사라는 사람들이 신문사를 찾아가 보도내용에 강력히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보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우리군 전체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운 군의 명예와 희생은 그것들대로 높이 평가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나마 우리군이 베트남 양민들을 부당하게 희생 시켰거나 불법적 군사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비판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4.3사건’도 마찬가지다. 공산폭도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했고 수많은 우익인사들을 살해한 것이 4.3사건의 발단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당연히 응징돼야 했고 또한 진압됐다. 그러나 제주도에 간 군과 경찰이 폭도들을 진압 한답시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은 그것대로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공비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한라산 자락 마을의 95%를 불태웠고 양민 2만50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조사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당시 폭동을 일으킨 공산폭도는 350여명이었다. 희생자 속에는 수많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포함돼 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토벌대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유족들은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는 이유만으로 반세기 동안이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군과 경찰도 명예위해 사과해야
1987년 ‘한라산’이란 장시를 통해 4.3사건을 최초로 공론화 시킨 시인 이선화 씨는 이 시를 쓰기위해 한라산 일대를 취재하다 더 큰 절망에 빠졌다고 고백한바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더욱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4.3은 기억조차 하면 안 되는 악몽이었던 것이다.
4.3사건의 규명은 역사의 자해행위가 아니라 역사의 자존행위인 것이다. 제주도 토벌대 본연의 임무와 빛나는 공헌을 위해서도 불법은 규명되고 잘못은 사죄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군의 명예를 위하는 길이다. 유태인 학살에 반세기가 넘도록 끊임없이 사죄하고 반성하는 독일과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은폐하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는 일본, 어느 쪽이 더 명예로운가.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돼있다. 19세기 말에 있었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교훈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권력이 무고한 시민을 어떻게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보불전쟁에서 진 프랑스 군은 무엇인가 희생양이 필요했고 때마침 군사기밀 유출사건이 터지자 유태계 포병 대위인 드레퓌스에게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이 사건은 진실과 인권옹호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우는 반 드레퓌스파로 프랑스 사회를 양분시켜 프랑스가 한때 혹심한 내홍을 겪었다. 종신형을 선고했던 군법회의는 10여년 만에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으나 프랑스 군부는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발생 100년을 넘긴 1995년에야 프랑스 군은 이와 관련 국민 앞에 사죄했다. 우리 군과 경찰도 제주도민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 한다. 대통령만으로는 부족하다. 군과 경찰의 명예를 위해서다.
임춘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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