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행동의 격(格)타령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경박하다, 야만적이다, 버릇없다, 품위가 없다, 막말이 난무한다, 예의나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등등의 말을 한없이 늘어놓아도 양이 차지 않을 세상이 요즘이다. 이렇게 경박하고 야만적이고 버릇없는 세상이 왜 오고 말았을까?
쉽게 말하면 요즘 세상은 왜 이렇게 격(格)이 떨어진 세상으로 변해버렸느냐 하는 말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구별할 수도 없고, 나이가 많은 사람 젊은 사람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늘상의 용어는 막말이 주를 이루고, 하는 짓도 대부분 야만적이거나 상스럽기 그지없는 짓들이 판을 치고 있다.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오늘 좋은 책이 한권 우송되었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박희병 교수의 저서인 ‘연암을 읽는다’라는 책인데, 우선 몇 쪽을 읽었더니, ‘아, 이런 격조 높은 책도 나오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기분 좋게 채웠다. 북한에서 번역하여 간행한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보리’출판사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간행한 책을 보내주어, 그걸 읽으면서도, ‘아! 이런 격조 높은 책도 요즘 세상에서 간행되는구나!’ 라고 여겼는데, 막된 세상에 이런 유쾌한 일도 있기 때문에 삶을 지속할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에 어떤 글을 쓰면서 조선시대의 연암 박지원은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에나 비길 수 있겠다고 했는데, 오늘 박교수의 연암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 그분도 오래전에 그런 주장을 편 적이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 전문가의 주장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짐작으로 주장한 필자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니, 역사적 진실은 숨겨지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북한 학자들이 번역한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서 번역의 수준에 놀라기도 했지만, 연암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안목과 격이 얼마나 높은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고전이라는 것이 이렇게 값이 높구나’를 연발하며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출판사가 상업성도 고려하지 않고 고전번역서를 계속해서 간행해주는 고마움을 여기서라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한문의 독해력이 조금은 있어서 번역서 아니고도 대강은 읽을 수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이 고급 번역서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조목조목 분석하고 해설까지 곁들인 박희병 교수의 번역서는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인가.
최소한 한국 사람이라면, 연암의 책과 다산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오래된 바람이다. 그러나 그동안 한글로 번역된 책이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리’출판사의 연암에 관한 번역서는 질이 높고 격이 뛰어난 번역이고, ‘연암을 읽는다’의 번역문도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역자의 소원대로 원문 없이도 연암의 글 쓴 의도와 뜻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번역에 어찌 완벽이 있고 부족함이 없으리오마는 그런 정도면 한문을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 불편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나 남한에서의 번역 능력이 이런 정도에 이른 것은 정말로 경하할 만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세상은 상스럽고 야만스러우며 격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 한마디로 책을 읽지 않는 탓이다. 연암이나 다산의 학술이나 문학에 젖어 그들의 생각에도 빠져보고, 그들의 논리에 접근하여 고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마음이 동한다면 세상이 요렇게 버릇없고 품위가 떨어질 수 있겠는가.
문예(文藝)에 대한 탁월한 연암의 안목에 머리 숙이며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수준임에 의심하지 않는다. 연암 같은 대문호(大文豪)를 둔 국민으로 그런 문호의 글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너무 비약적인 논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고전을 통한 심성(心性)의 도야(陶冶), 참으로 고전적인 말이다. ‘논어’나 ‘성서’는 물론 불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격과 품위를 높여 줄 방법으로 고전과 같은 책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곱고 부드러운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된 연암의 번역서를 읽어 그의 높은 문예사상을 통해 심성을 도야한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너무나 속되고 타락한 언어의 폭력, 그것을 극복해 인간의 품위와 격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고전을 읽는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문학사상을 통해 서구인들의 격이 높아지듯, 우리도 연암의 문학과 사상을 읽어 품위와 격이 높아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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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경박하다, 야만적이다, 버릇없다, 품위가 없다, 막말이 난무한다, 예의나 염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등등의 말을 한없이 늘어놓아도 양이 차지 않을 세상이 요즘이다. 이렇게 경박하고 야만적이고 버릇없는 세상이 왜 오고 말았을까?
쉽게 말하면 요즘 세상은 왜 이렇게 격(格)이 떨어진 세상으로 변해버렸느냐 하는 말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구별할 수도 없고, 나이가 많은 사람 젊은 사람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늘상의 용어는 막말이 주를 이루고, 하는 짓도 대부분 야만적이거나 상스럽기 그지없는 짓들이 판을 치고 있다.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오늘 좋은 책이 한권 우송되었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박희병 교수의 저서인 ‘연암을 읽는다’라는 책인데, 우선 몇 쪽을 읽었더니, ‘아, 이런 격조 높은 책도 나오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기분 좋게 채웠다. 북한에서 번역하여 간행한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보리’출판사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간행한 책을 보내주어, 그걸 읽으면서도, ‘아! 이런 격조 높은 책도 요즘 세상에서 간행되는구나!’ 라고 여겼는데, 막된 세상에 이런 유쾌한 일도 있기 때문에 삶을 지속할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에 어떤 글을 쓰면서 조선시대의 연암 박지원은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독일의 괴테에나 비길 수 있겠다고 했는데, 오늘 박교수의 연암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 그분도 오래전에 그런 주장을 편 적이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 전문가의 주장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짐작으로 주장한 필자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니, 역사적 진실은 숨겨지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북한 학자들이 번역한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서 번역의 수준에 놀라기도 했지만, 연암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안목과 격이 얼마나 높은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고전이라는 것이 이렇게 값이 높구나’를 연발하며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출판사가 상업성도 고려하지 않고 고전번역서를 계속해서 간행해주는 고마움을 여기서라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한문의 독해력이 조금은 있어서 번역서 아니고도 대강은 읽을 수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이 고급 번역서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면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조목조목 분석하고 해설까지 곁들인 박희병 교수의 번역서는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인가.
최소한 한국 사람이라면, 연암의 책과 다산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오래된 바람이다. 그러나 그동안 한글로 번역된 책이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리’출판사의 연암에 관한 번역서는 질이 높고 격이 뛰어난 번역이고, ‘연암을 읽는다’의 번역문도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역자의 소원대로 원문 없이도 연암의 글 쓴 의도와 뜻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번역에 어찌 완벽이 있고 부족함이 없으리오마는 그런 정도면 한문을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 불편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나 남한에서의 번역 능력이 이런 정도에 이른 것은 정말로 경하할 만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세상은 상스럽고 야만스러우며 격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 한마디로 책을 읽지 않는 탓이다. 연암이나 다산의 학술이나 문학에 젖어 그들의 생각에도 빠져보고, 그들의 논리에 접근하여 고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마음이 동한다면 세상이 요렇게 버릇없고 품위가 떨어질 수 있겠는가.
문예(文藝)에 대한 탁월한 연암의 안목에 머리 숙이며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수준임에 의심하지 않는다. 연암 같은 대문호(大文豪)를 둔 국민으로 그런 문호의 글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너무 비약적인 논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고전을 통한 심성(心性)의 도야(陶冶), 참으로 고전적인 말이다. ‘논어’나 ‘성서’는 물론 불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격과 품위를 높여 줄 방법으로 고전과 같은 책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곱고 부드러운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된 연암의 번역서를 읽어 그의 높은 문예사상을 통해 심성을 도야한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너무나 속되고 타락한 언어의 폭력, 그것을 극복해 인간의 품위와 격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고전을 읽는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문학사상을 통해 서구인들의 격이 높아지듯, 우리도 연암의 문학과 사상을 읽어 품위와 격이 높아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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