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의 트렌드 추적 한국의 미래지표 16인> 마지막회 (16)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신문 ‘실버타임즈’
인생은 9988, ‘老 하우’의 힘 알린다
지역내일
2006-07-06
(수정 2006-07-06 오후 3:44:00)
60~80대 ‘노인기자회의’가 제작 … 독자 중 13.3%가 젊은 세대
60 가까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회는 의료발달로 수명이 연장된 반면, 좀더 이른 시기에 직장을 은퇴한다. 오늘날의 60대 노인들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닐 정도로 건강할 뿐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자기표현과 취미생활의 즐거움, 대중매체의 문화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한 집단이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우는 자기학습형의 여가를 갈구하며, 문화 예술적 체험을 통해 자신이 고양되는 여생을 즐기기를 바란다. 서구가 앞서 경험한 것처럼 한국사회도 2000년대 전후에 이르러 베이비붐 세대가 노령인구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50세를 지나면서 두번째 사춘기를 맞고 60세를 넘기면서 제2의 청춘을 사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활력적인 집단이 사회의 전반에 활동가로 나서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다. 이들은 다시 일터로 나서기도 하지만 선배 혹은 노련가로서 실버타임즈처럼 세간의 본이 되는 기량 있는 취미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첫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노인이라고 해서 첫 사랑의 기억을 망각할 리 있겠는가. 실버세대도 신세대와 똑같이 ‘너무도 빛나서 슬프기만 한 첫사랑’의 예리한 감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것이 실버의 생명력이다.
‘첫 사랑은 마지막 사랑일 수밖에 없기에 따스하고 깨끗한 모래 같은 사랑.
생각이 아닌 느낌, 비극이 아닌 신비,
이산화탄소가 아닌 산소 같은 담백한 사랑.
너무나 빛나서 슬프기도 한 사랑.
그래서 첫 사랑의 로맨스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소녀의 풋풋한 첫 사랑을 그린 듯한 이 구절은 ‘실버타임즈’에 기명칼럼 ‘따따부따 수다’를 연재하고 있는 금년 나이 70세의 김지원 기자가 쓴 것이다. 이 노여기자의 가슴에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은 변함없이 살아 있다. 그녀는‘첫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이렇게‘수다’ 떨었다.
“3월의 이른 아침,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어 육중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벤치에 앉아 다음 차를 기다리는데 웬 멋진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 사람!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45년 만에 첫사랑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자 이를 어쩐다. 아는 척을 해? 말아? ‘혹시 저 기억하겠어요?’라고 하면 진부 하겠지. ‘어머, 000씨 아니예요?’이러면 너무 싸 보일까?
이 때 웬 이상한 여자가 주위를 서성거리느냐는 식으로 그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심장이 멎었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순간 실망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눈을 감았다. 첫사랑의 그를 생각하며 가슴 한 편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나간 사랑은 추억으로 만족하자고. 그냥 사랑은 상대가 아니라 상황(狀況)에 좌우되는 사랑이기에 첫사랑이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실버타임즈’는 노인들에 의해, 노인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파하는 월간지다. 이 신문은 이 시대 실버세대의 가슴에 담긴 한(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운반하고자 한다.
실버들의 기자회의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지하실.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문에‘실버타임즈’라는 표지가 붙고 그 밑에‘지금은 회의 중’이라는 푯말이 걸려있다. 오전 10시 30분‘기자회의’가 열리는 시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5평 남짓한 장방, 좌장인 윤호중 고문을 중심으로 회의 탁자 좌우에 노인기자가 네 명씩 갈라 앉아 있다. 윤 고문의 맞은 편 끝자리가 유일한 젊은이 유지연 기자(사회복지사)석이다.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기자회의는 이순원 편집인 겸 편집국장이 주재한다. 그는 먼저 지난 호를 되짚어 본다.
“지난 수요일은 5·31지방선거로 기자회의가 한 주 늦어졌다. 종로에 있는 집문당 임경환 사장이 도서 10권을 기증해 주셨다. 장하늘 선생의 한글 바로 쓰기 저서가 나왔다니 매입해서 비치하려고 한다….”
이 국장은 김지원 기자가‘6·25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 김동진을 만났는데, 이 한국 음악 선구자가 94세의 노환으로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이 국장은 윤호중 고문이 일본의‘인간·자연·과학 연구소’고마쓰 아끼오(小松昭夫) 이사장을 인터뷰한 노고를 치하한다. 5면에 기명 칼럼‘따따부따 수다’를 50회 째 연재하고 있은 김지원 기자가 나서서 “지난 호에는 난(難)한 문제이지만‘성욕과 식욕은 삶의 의욕’이라고 성 문제를 다루었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말한다.
기자회의는 다음 호에 실을 내용을 토의하는 순서가 되자 갑자기 활기를 더한다. 1면 톱은 다음 주 기자회의까지 결정해서 취재기자를 정하기로 하고 3면에 실릴 원로 인터뷰 대상자로 화제를 바꾼다.
“우리가 인터뷰를 해서 신문에 내고 나면 주인공들이 돌아가시니 난처하단 말이지요.” 누가 이 말을 하자 일동이 웃음을 터뜨린다. 전문교부장관 민관식, 배우 김동원, 시인 구상 같은 원로들이 실버타임즈와 인터뷰를 한 뒤 얼마 있다가 타계한 경우였다.
“어차피 연세가 높은 노인을 인터뷰하는 것이 취지인지라 불가피한 일 아닙니까.”
이때 윤 고문이 나선다.“최은희 씨와 전화를 해서 점심을 하기로 약속은 했는데, 신상옥 감독이 작고한지 얼마 안 돼서 아무래도 인터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윤리강령’ 준수하는 전국지
실버타임즈의 발행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2동 906번지,‘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다. 이 복지관은 경기도 고양시의 위탁을 받아 사회복지법인‘연꽃마을’이 운영하고 있으며 실버타임즈는 고양시의 지원금으로 발간되고 있다. 그래서 신문 발행인은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손순호(능인) 관장이고 편집인은 이순원 편집국장이다. 비록 지방도시의 복지관 한 귀퉁이에서 발행하지만 이 노인신문은‘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의 준수’라는 의무조항을 천명한 전국신문이다. 자원봉사로 시작한 작은 월간신문이지만 관의 간섭이나 종교 색채를 배제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아래 제작되고 있다. 윤호중 고문이 2000년 11월 초대 편집국장으로 자원 봉사할 것에 동의하면서 내건 조건은 정치와 종교 색채의 배제였다. 지금까지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겠다는 창간의지는 살아있다. 전국 시 군 구에는 노인복지관이 170여 곳 있는데 실버타임즈는 단순한 내부 소식지나 홍보지의 성격을 극복한 유일한 신문이라고 복지관의 김학석 복지부장은 말한다.
실버타임즈는 제호 앞에 이런 글귀를 명기했다.
‘실버타임즈는 전국의 노인과 노후를 대비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신문으로서 노인들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신문의 취재·편집·제작 인원은 국장 1명, 편집고문 1명, 논설위원 1명, 노인기자단 7명, 사회복지사 1명을 합쳐 11명이다. 30대의 사회복지사를 제외한 자원봉사자 편집진 전원이 실버세대로 80대 1명, 70대 6명, 60대 3명이다. 이름을 연령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정광복 논설위원. 1926년 생. 연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전 한국생산성본부 이사, 한양대 건국대 항공대 강사.
서종원 기자. 1927년 생. 북한 회린여중 교사. 소설가. 대표작‘인연’.
이순희 기자. 1931년 생. 전 경북 영덕군청 공무원, 여성신문사 강원도 영동지사 편집기자 및 지사장.
윤호중 고문. 1932년생. 실버타임즈 초대 편집국장. 경기고, 서울상대 상학과 졸업. 월간 ‘희망’기자,‘새벽’편집장, 서울특별시장 공보관을 거쳐‘아세아 공론’일본 지사장 역임.
이전애 기자. 1933년 생. 전 월간 사상계 편집부 기자, 월간 전망 국회출입 기자. YWCA 문맥회 2·9대 회장. 소설가.
김지원 기자. 1936년 생. 이대 정외과 졸업. 전 서울중앙방송 성우, TV연기자 및 방송인.
박상균 기자. 1937년 생. 전 강원도 춘천시 공무원, (주)세경건설 이사.
이순원 편집국장. 1939년 생. 홍대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전 서울 역촌초등학교 교장.
김용문 기자. 1941년 생. 전 종로구 창신2동 새마을금고 부이사장, 한남개발 대표.
유지연 사회복지사. 1972년 생. 이대 사회사업학과 및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기사작성, 원고 취합 및 교정, 사진스캔 및 매킨토시편집 담당.
월간인 실버타임즈는 6월호의 경우 날자 별로 다음과 같은 작업 과정을 거쳤다.
- 7일 첫 기자회의
- 14일 기자회의
- 15일 원고마감일
-16~20일 원고교정
- 21일 기자회의
- 21~26일 매킨토시 편집작업
- 28일 기자회의 및 원고 최종 교열
- 29일 필름 출력 인쇄의뢰
- 30일 신문 나오는 날, 단매신문발송(DM)·다량신문발송·우편발송.
‘인생 9988이다’
실버타임즈는 자원봉사로 누구나 들어와서 일 할 수 있다. 또 마음에 안들면 언제나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철칙이라고 한다. 그간 두어 사람이 그만두었을 뿐 다른 기자들은 거의 변동이 없다.“자기 생일을 맞는 기자는 점심을 한턱씩 내기로 해서 지난 5년 동안 거의 매달 회식하는 것이 관습화되었다.” 윤 고문의 말이다.
‘인생 9988’은 실버타임즈에서 일하는 실버기자들의 정신을 담은 비공식 구호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아흔 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뜻이 인생 구구팔팔이다.
실버타임즈는 ‘노(老) 하우 ’의 힘을 그레이칼러로서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령자라는 노인의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것이므로‘노(老) 하우 힘’을 활용하는 길이 당면한 과제라고 촉구한다.
외국에는‘노인이,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기업으로서 노인을 위한 제품을 노인의 출자로 성공시킨 기업이 있다면서 고령화 노인의 재고용을 강조한다.
그리고 보면 실버타임즈 기자들은 나이가 높을수록 오히려 행동력이 강해지는 모양이다. 최고 연장자인 정광복 논설위원은‘이제 겨우 80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명의 저서를 가정의학 전문의 출신인 부인 양재복 씨와 공저로 출간했다. 실버교육을 위한 실무강좌용으로 낸 책이다. 그는 서장 첫 절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직은 노인이 아니다. 금년 겨우 80세가 됐다. 처는 다섯 살 아래 75세다. 이 나이쯤 되면 옛 같으면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증손자의 재롱이나 즐길 나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후에 대한 생각은 좀 색다르다. 우리는 노후란 자기 혼자서는 살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정신 연령이 어떻든, 육체적인 건강 나이가 어떻든 간에 더욱이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서종원 기자는 은퇴를 한 뒤 2000년 가을에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소설‘인연’을 출판해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서원(소설가)’이라는 이름으로 실버타임즈에 단편소설‘들국화’를 2005년 봄부터 2006년 봄까지 13회 연재했다. 이 소설은 현실 정치의 몰락과 부녀 간의 애환을 풍자한 것이다. 이처럼 실버들은 저마다 늦깎이 삶을 활기차게 살려고 힘쓴다.
실버타임즈가 창간 5주년 기념특집으로 전국 독자 8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다. 과반수를 차지한 60-70대 독자층은 ‘다양한 노인 관련 뉴스 제공에 높은 욕구를 드러냈다’. 특기 할만한 것은 20대 독자가 13.3%(78명)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실버타임즈는 이를‘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결과에 주목하여 앞으로 젊은 세대에게도 호응 받을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신세대가 본 실버타임즈
신세대인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 김주연 양은 실버타임즈 기자회의를 참관한 후 이렇게 적었다.(2005년 2월 제41호 게재)
이런 신문을 월마다 발간하시는 어르신들이 어떤 분들인지 매우 궁금했고 다행히 시간이 맞아 수요일 기자회의를 참관할 기회가 생겼다. 어르신들과의 첫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최소한 65세가 넘는 연세의 어르신들의 대화에는 생동감이 넘쳤고 이야기의 주제는 너무나도 광범위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어르신이 이제 자신은 80세가 되었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너무 기쁘다고 하시는 말씀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들의 회의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이 분들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건과 소식에 정통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독서와 집필을 하시며 자기 발전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분들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젊은 학생의 입장에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욕심을 낸다면 젊은이 또는 노후를 대비하려는 많은 중년들에게도 읽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기자 여러분!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십시오.
실버타임즈는
경기도 고양시가 노인복지사업으로 지원해서 내는 월간신문. 편집비 조판비 인쇄비 잡비로 1년에 2천만원 남짓한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일산노인복지관 복지부 사무실과 실버타임즈실에서 작업한다. 창간호는 2000년 11월에 발행했고 초대 편집국장에 윤호중 취임, 2002년 7월 제11호부터 월간으로 바꿈. 2005년 2대 편집국장 이순원 취임. 2002년 창간 2주년부터 매년 창간 기념일마다 합본호 발간.‘2Y2R세대’(2002),‘인생구구팔팔’(2003), ‘아름다운 동행’(2004),‘꽃피는 봄이 오면’(2005) 발간. 월 발행부수 5000부.
안병찬 본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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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가까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회는 의료발달로 수명이 연장된 반면, 좀더 이른 시기에 직장을 은퇴한다. 오늘날의 60대 노인들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닐 정도로 건강할 뿐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자기표현과 취미생활의 즐거움, 대중매체의 문화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한 집단이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우는 자기학습형의 여가를 갈구하며, 문화 예술적 체험을 통해 자신이 고양되는 여생을 즐기기를 바란다. 서구가 앞서 경험한 것처럼 한국사회도 2000년대 전후에 이르러 베이비붐 세대가 노령인구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50세를 지나면서 두번째 사춘기를 맞고 60세를 넘기면서 제2의 청춘을 사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활력적인 집단이 사회의 전반에 활동가로 나서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다. 이들은 다시 일터로 나서기도 하지만 선배 혹은 노련가로서 실버타임즈처럼 세간의 본이 되는 기량 있는 취미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첫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노인이라고 해서 첫 사랑의 기억을 망각할 리 있겠는가. 실버세대도 신세대와 똑같이 ‘너무도 빛나서 슬프기만 한 첫사랑’의 예리한 감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것이 실버의 생명력이다.
‘첫 사랑은 마지막 사랑일 수밖에 없기에 따스하고 깨끗한 모래 같은 사랑.
생각이 아닌 느낌, 비극이 아닌 신비,
이산화탄소가 아닌 산소 같은 담백한 사랑.
너무나 빛나서 슬프기도 한 사랑.
그래서 첫 사랑의 로맨스는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소녀의 풋풋한 첫 사랑을 그린 듯한 이 구절은 ‘실버타임즈’에 기명칼럼 ‘따따부따 수다’를 연재하고 있는 금년 나이 70세의 김지원 기자가 쓴 것이다. 이 노여기자의 가슴에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은 변함없이 살아 있다. 그녀는‘첫 사랑을 기억하고 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이렇게‘수다’ 떨었다.
“3월의 이른 아침,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어 육중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벤치에 앉아 다음 차를 기다리는데 웬 멋진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 사람!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45년 만에 첫사랑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자 이를 어쩐다. 아는 척을 해? 말아? ‘혹시 저 기억하겠어요?’라고 하면 진부 하겠지. ‘어머, 000씨 아니예요?’이러면 너무 싸 보일까?
이 때 웬 이상한 여자가 주위를 서성거리느냐는 식으로 그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심장이 멎었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순간 실망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눈을 감았다. 첫사랑의 그를 생각하며 가슴 한 편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나간 사랑은 추억으로 만족하자고. 그냥 사랑은 상대가 아니라 상황(狀況)에 좌우되는 사랑이기에 첫사랑이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실버타임즈’는 노인들에 의해, 노인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파하는 월간지다. 이 신문은 이 시대 실버세대의 가슴에 담긴 한(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운반하고자 한다.
실버들의 기자회의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지하실.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문에‘실버타임즈’라는 표지가 붙고 그 밑에‘지금은 회의 중’이라는 푯말이 걸려있다. 오전 10시 30분‘기자회의’가 열리는 시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5평 남짓한 장방, 좌장인 윤호중 고문을 중심으로 회의 탁자 좌우에 노인기자가 네 명씩 갈라 앉아 있다. 윤 고문의 맞은 편 끝자리가 유일한 젊은이 유지연 기자(사회복지사)석이다.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기자회의는 이순원 편집인 겸 편집국장이 주재한다. 그는 먼저 지난 호를 되짚어 본다.
“지난 수요일은 5·31지방선거로 기자회의가 한 주 늦어졌다. 종로에 있는 집문당 임경환 사장이 도서 10권을 기증해 주셨다. 장하늘 선생의 한글 바로 쓰기 저서가 나왔다니 매입해서 비치하려고 한다….”
이 국장은 김지원 기자가‘6·25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 김동진을 만났는데, 이 한국 음악 선구자가 94세의 노환으로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이 국장은 윤호중 고문이 일본의‘인간·자연·과학 연구소’고마쓰 아끼오(小松昭夫) 이사장을 인터뷰한 노고를 치하한다. 5면에 기명 칼럼‘따따부따 수다’를 50회 째 연재하고 있은 김지원 기자가 나서서 “지난 호에는 난(難)한 문제이지만‘성욕과 식욕은 삶의 의욕’이라고 성 문제를 다루었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말한다.
기자회의는 다음 호에 실을 내용을 토의하는 순서가 되자 갑자기 활기를 더한다. 1면 톱은 다음 주 기자회의까지 결정해서 취재기자를 정하기로 하고 3면에 실릴 원로 인터뷰 대상자로 화제를 바꾼다.
“우리가 인터뷰를 해서 신문에 내고 나면 주인공들이 돌아가시니 난처하단 말이지요.” 누가 이 말을 하자 일동이 웃음을 터뜨린다. 전문교부장관 민관식, 배우 김동원, 시인 구상 같은 원로들이 실버타임즈와 인터뷰를 한 뒤 얼마 있다가 타계한 경우였다.
“어차피 연세가 높은 노인을 인터뷰하는 것이 취지인지라 불가피한 일 아닙니까.”
이때 윤 고문이 나선다.“최은희 씨와 전화를 해서 점심을 하기로 약속은 했는데, 신상옥 감독이 작고한지 얼마 안 돼서 아무래도 인터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윤리강령’ 준수하는 전국지
실버타임즈의 발행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2동 906번지,‘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다. 이 복지관은 경기도 고양시의 위탁을 받아 사회복지법인‘연꽃마을’이 운영하고 있으며 실버타임즈는 고양시의 지원금으로 발간되고 있다. 그래서 신문 발행인은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손순호(능인) 관장이고 편집인은 이순원 편집국장이다. 비록 지방도시의 복지관 한 귀퉁이에서 발행하지만 이 노인신문은‘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의 준수’라는 의무조항을 천명한 전국신문이다. 자원봉사로 시작한 작은 월간신문이지만 관의 간섭이나 종교 색채를 배제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아래 제작되고 있다. 윤호중 고문이 2000년 11월 초대 편집국장으로 자원 봉사할 것에 동의하면서 내건 조건은 정치와 종교 색채의 배제였다. 지금까지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겠다는 창간의지는 살아있다. 전국 시 군 구에는 노인복지관이 170여 곳 있는데 실버타임즈는 단순한 내부 소식지나 홍보지의 성격을 극복한 유일한 신문이라고 복지관의 김학석 복지부장은 말한다.
실버타임즈는 제호 앞에 이런 글귀를 명기했다.
‘실버타임즈는 전국의 노인과 노후를 대비하는 모든 분들을 위한 신문으로서 노인들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신문의 취재·편집·제작 인원은 국장 1명, 편집고문 1명, 논설위원 1명, 노인기자단 7명, 사회복지사 1명을 합쳐 11명이다. 30대의 사회복지사를 제외한 자원봉사자 편집진 전원이 실버세대로 80대 1명, 70대 6명, 60대 3명이다. 이름을 연령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정광복 논설위원. 1926년 생. 연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전 한국생산성본부 이사, 한양대 건국대 항공대 강사.
서종원 기자. 1927년 생. 북한 회린여중 교사. 소설가. 대표작‘인연’.
이순희 기자. 1931년 생. 전 경북 영덕군청 공무원, 여성신문사 강원도 영동지사 편집기자 및 지사장.
윤호중 고문. 1932년생. 실버타임즈 초대 편집국장. 경기고, 서울상대 상학과 졸업. 월간 ‘희망’기자,‘새벽’편집장, 서울특별시장 공보관을 거쳐‘아세아 공론’일본 지사장 역임.
이전애 기자. 1933년 생. 전 월간 사상계 편집부 기자, 월간 전망 국회출입 기자. YWCA 문맥회 2·9대 회장. 소설가.
김지원 기자. 1936년 생. 이대 정외과 졸업. 전 서울중앙방송 성우, TV연기자 및 방송인.
박상균 기자. 1937년 생. 전 강원도 춘천시 공무원, (주)세경건설 이사.
이순원 편집국장. 1939년 생. 홍대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전 서울 역촌초등학교 교장.
김용문 기자. 1941년 생. 전 종로구 창신2동 새마을금고 부이사장, 한남개발 대표.
유지연 사회복지사. 1972년 생. 이대 사회사업학과 및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사회복지학 석사). 기사작성, 원고 취합 및 교정, 사진스캔 및 매킨토시편집 담당.
월간인 실버타임즈는 6월호의 경우 날자 별로 다음과 같은 작업 과정을 거쳤다.
- 7일 첫 기자회의
- 14일 기자회의
- 15일 원고마감일
-16~20일 원고교정
- 21일 기자회의
- 21~26일 매킨토시 편집작업
- 28일 기자회의 및 원고 최종 교열
- 29일 필름 출력 인쇄의뢰
- 30일 신문 나오는 날, 단매신문발송(DM)·다량신문발송·우편발송.
‘인생 9988이다’
실버타임즈는 자원봉사로 누구나 들어와서 일 할 수 있다. 또 마음에 안들면 언제나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철칙이라고 한다. 그간 두어 사람이 그만두었을 뿐 다른 기자들은 거의 변동이 없다.“자기 생일을 맞는 기자는 점심을 한턱씩 내기로 해서 지난 5년 동안 거의 매달 회식하는 것이 관습화되었다.” 윤 고문의 말이다.
‘인생 9988’은 실버타임즈에서 일하는 실버기자들의 정신을 담은 비공식 구호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아흔 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뜻이 인생 구구팔팔이다.
실버타임즈는 ‘노(老) 하우 ’의 힘을 그레이칼러로서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령자라는 노인의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것이므로‘노(老) 하우 힘’을 활용하는 길이 당면한 과제라고 촉구한다.
외국에는‘노인이,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기업으로서 노인을 위한 제품을 노인의 출자로 성공시킨 기업이 있다면서 고령화 노인의 재고용을 강조한다.
그리고 보면 실버타임즈 기자들은 나이가 높을수록 오히려 행동력이 강해지는 모양이다. 최고 연장자인 정광복 논설위원은‘이제 겨우 80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명의 저서를 가정의학 전문의 출신인 부인 양재복 씨와 공저로 출간했다. 실버교육을 위한 실무강좌용으로 낸 책이다. 그는 서장 첫 절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직은 노인이 아니다. 금년 겨우 80세가 됐다. 처는 다섯 살 아래 75세다. 이 나이쯤 되면 옛 같으면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증손자의 재롱이나 즐길 나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후에 대한 생각은 좀 색다르다. 우리는 노후란 자기 혼자서는 살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정신 연령이 어떻든, 육체적인 건강 나이가 어떻든 간에 더욱이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서종원 기자는 은퇴를 한 뒤 2000년 가을에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린 소설‘인연’을 출판해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서원(소설가)’이라는 이름으로 실버타임즈에 단편소설‘들국화’를 2005년 봄부터 2006년 봄까지 13회 연재했다. 이 소설은 현실 정치의 몰락과 부녀 간의 애환을 풍자한 것이다. 이처럼 실버들은 저마다 늦깎이 삶을 활기차게 살려고 힘쓴다.
실버타임즈가 창간 5주년 기념특집으로 전국 독자 8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다. 과반수를 차지한 60-70대 독자층은 ‘다양한 노인 관련 뉴스 제공에 높은 욕구를 드러냈다’. 특기 할만한 것은 20대 독자가 13.3%(78명)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실버타임즈는 이를‘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결과에 주목하여 앞으로 젊은 세대에게도 호응 받을 수 있도록 개선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신세대가 본 실버타임즈
신세대인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 김주연 양은 실버타임즈 기자회의를 참관한 후 이렇게 적었다.(2005년 2월 제41호 게재)
이런 신문을 월마다 발간하시는 어르신들이 어떤 분들인지 매우 궁금했고 다행히 시간이 맞아 수요일 기자회의를 참관할 기회가 생겼다. 어르신들과의 첫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최소한 65세가 넘는 연세의 어르신들의 대화에는 생동감이 넘쳤고 이야기의 주제는 너무나도 광범위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어르신이 이제 자신은 80세가 되었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너무 기쁘다고 하시는 말씀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들의 회의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이 분들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건과 소식에 정통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독서와 집필을 하시며 자기 발전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분들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젊은 학생의 입장에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욕심을 낸다면 젊은이 또는 노후를 대비하려는 많은 중년들에게도 읽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기자 여러분!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십시오.
실버타임즈는
경기도 고양시가 노인복지사업으로 지원해서 내는 월간신문. 편집비 조판비 인쇄비 잡비로 1년에 2천만원 남짓한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일산노인복지관 복지부 사무실과 실버타임즈실에서 작업한다. 창간호는 2000년 11월에 발행했고 초대 편집국장에 윤호중 취임, 2002년 7월 제11호부터 월간으로 바꿈. 2005년 2대 편집국장 이순원 취임. 2002년 창간 2주년부터 매년 창간 기념일마다 합본호 발간.‘2Y2R세대’(2002),‘인생구구팔팔’(2003), ‘아름다운 동행’(2004),‘꽃피는 봄이 오면’(2005) 발간. 월 발행부수 5000부.
안병찬 본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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