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의 트렌드 추적 한국의 미래지표 16인> ⑬ 대한민국 1호 예술경영학 박사 이 보 아
‘영화속 박물관’ 캐내는 시네뮤지올로지스트
지역내일
2006-06-26
(수정 2006-07-04 오후 4:51:38)
다작으로 박물학과 다른 학문 연결고리 찾아 … 5년 사이 단행본 20권 저술
다작의 시대, 더 이상 문학작품이나 출판물은 심혈을 기울인 소산만은 아니다. 그런 것이 가능한 까닭은 컴퓨터와 같은 생산재의 발달 외에도 낮 밤을 이분법적으로 활용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대두 때문이다. ‘접는 미술관’의 경우처럼, 일상주의, 대중의 삶에서 모티브를 찾는 창작의 흐름이 주류로 등장한지 오래다. ‘시네뮤지올로지’같은 조어처럼 두 분야를 겹쳐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정보의 시대, 아케올로지(고고학)의 시대, 박물지와 골동품의 시대. 과거의 기록과 자료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내는 추세가 계속되고 스토리텔링(신화, 고전문학, 역사적 서사의 픽션화)과 역사학의 대중화가 진행된다. 이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 이후 2000년도 전후에 세계를 강타한 추세이다.
경제적 신체구조
이보아 교수는 한국 제1호 ‘박물관 경영학 박사’이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1997년 ‘문화재의 원산국으로의 반환에 관한 고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2000년도에 내놓은 첫 번째 저서는 ‘박물관학 개론’이다. 한국에서 박물관학 개론서는 1970년대에 나온 한 권이 유일했는데 그녀가 30년 만에 최신 버전의 개론서를 써서 박물관학의 숨통을 열었다고 한다.
이보아는 보기 드물게 억센 저술가다. 서른 여섯 살에 첫 저서인 ‘박물관학 개론’을 쓰더니 마흔 두 살이 된 2006년 초까지 5년 반 사이에 단행본 20권을 출판했다.
박물관 여행, 박물관 경영, 예술 경영, 문화 마케팅, 그리고 영화에 관한 저작물이다. 그 중에 공저와 공역, 개정판이 4권 들어 있지만 어쨌든 한 해 평균 3권 이상의 저서를 써낸 셈이니 그 에너지와 시간의 원천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열쇠는 수면 습관에 있다. 이보아는 하루 4시간 만 자면 되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다. 필자는 하루 수면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서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인물을 한사람 알고 있다.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인 백상 장기영은 밤과 낮의 구별이 없이 편집국과 논설위원실, 기타 제작 부서에 나타나서 진두지휘하는 체질 때문에 수돗물처럼 자유자재로 잠을 조절할 수 있는 희한한 생리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은 승용차인 지프차 속에서, 또는 회사 집무실에서 틈틈이 쪼개어 토끼잠을 잤으니, 조간 신문제작을 하는 새벽시간에 기자들은 졸음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으나 장 사장은 언제나 생기가 솟아나는 듯 원기 왕성했다.
장기영에 비하면 이보아는 새벽 1시에 반드시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에 틀림없이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졌다.
아침 7시 반에는 벌써 대학 연구실에 도착해서 집필에 들어간다. 그렇게 타고난 수면 단축 능력과 적극적인 천성 덕에 글을 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다는 얘기이니 이보아는 ‘경제적인 생체 구조’를 가진 사람이다.
청파동 한 동네를 박물관으로
이보아는 최근 ‘청파동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주택가인 청파동 한 동네를 파고들어 그 자체를 개념적으로 공공 박물관화 하여 이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다는 계획이다.
이보아가 동네 프로젝트를 설계한 ‘접는 미술관’ 측에서 청파동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발굴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은 2005년 12월이다. 그녀는 한 겨울에 청파동 일대를 수시로 탐사하면서 아이디어를 짜냈다.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은 ‘박물관 알레르기 환자를 위한 기억의 발굴전-청파박물관’이라는 생각이다. 일상적인 삶이 녹아있는 전선, 언덕, 대문, 오래된 물건, 아이들 탐사대, 전봇대의 흔적 등에서 청파동의 생활사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청파박물관을 집필하면서 이보아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청파동을 박물관화 하는 작업’은 새로운 문화적인 제도의 탄생을 의미한다. “생활 속 예술에는 날 것의 신선함이 있다”는 말처럼, 비록 청파박물관 전시물들이 외양적으로는 거친 느낌을 줄지 몰라도 본질은 다분히 신선하고 자유로운 역동성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 느낄 거리, 얘기할 거리가 풍부한 청파동 전시물은 관람객들에게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미각, 촉각, 후각까지도 자극하는 체험적인 대상이 된다.
분명한 사실은 청파동 전시물도 성찰 대상으로서의 ‘오브제’임으로 관람 주체인 ‘나’는 그것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독자들에겐 조금 괴팍하고 거창한 담론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청파박물관은 ‘유형적인 문화유산’과 ‘무형적인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공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현재의 청파동의 모습(전시물)이고, 후자는 우리의 해마 속에 남아 있는 일상의 기억(전시물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이다. 청파박물관은 바로 우리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면서 남길 모든 흔적이 묻혀 있는 장소이다….
‘시네뮤지올로지’의 발견
박물군자(博物君子)인 이보아는 당초에 영화를 통해서 박물관을 전파한다는 색다른 착안을 했다. 딱딱한 박물관의 값어치를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추계예술대학교 영상문화학부의 이보아 교수 연구실에 가보면 서가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것은 족히 300편이 넘는 영화 비디오다. 그녀는 영화 마니아다. 2006년 초에 그녀는 두 달 간격으로 두 권의 저서를 냈는데 둘 다 영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한 권은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2006년 1월 발행)’라는 제목이다. 이 책을 쓰면서 이보아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했다. 이른바 ‘시네뮤지올로지(cinemuseology)’인데 영화(시네마)로 보는 박물관학(뮤지올로지)이라는 뜻으로 합성한 용어이다. 이 책은 그녀가 얼마나 영화에 빠져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 나오는 박물관의 요소를 수많이 수집해서 소개하고 해설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국 영화를 예로 들면 ‘집으로’를 만든 이정향 감독의 처녀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이 있다. 박물관 관람의 문화소비와 취향에 관한 연구에 따른다면 이 영화에서 미술관은 여자를, 동물원은 남성을 상징한다.
중국 구정평 감독의 영화 ‘몽중인(夢中人)’은 전생을 진나라에서 부부로 살다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송위(주윤발)와 장예화(임청하)가 현대에 환생해서 다시 겪게 되는 슬픈 사랑이야기다. 이 영화에 나오는 진시황 능 출토 유물 전시회는 실제로 이루어진 해외 순회 전시회로, 한국에서는 98만 명이 관람한 블록버스터 전시였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로 그녀는 책 한 권을 채우고 있다.
이보아는 ‘감독들이 왜 박물관을 찾나’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감독들이 박물관의 문화적·예술적 요소들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분명 나름대로의 명분이나 상징적 의미가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찾는 감독들
이보아는 영화 상 박물관의 가치를 세 가지로 본다. 첫 째 박물관이 등장하면 일단은 그림 자체가 훌륭해진다. 박물관의 외관이 지니는 웅장함과 고풍스러운 특성 외에도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박물관의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가 있다.
박물관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이미지’는 영화에 박물관이 등장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박물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얼굴이 변한다.
태양이 비출 때에는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는 교육적인 공간인 반면, 달이 태양의 자리를 차지하면 텅 빈 전시실에 어둠이 내리고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날 만한 공포와 살기가 느껴지는 음침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박물관 자체의 이중성과 그곳에 소장된 유물이나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힘이 결합되면 극한 공포를 야기해 완벽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또 박물관은 과거의 역사적 자료를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어, 특히 시대극의 경우 역사적 고증과 재현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이 감독이 박물관에 관심을 두는 세 번째 이유이다.
이렇게 이보아는 수많은 영화에 들어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편린들을 예시하면서 상세한 박물관 해설을 곁들인다.
미국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아메리칸 촌놈’ ‘러브 인 맨해튼’ ‘퍼펙트 머더’ ‘해리가 새리를 만났을 때’에는 모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등장한다.
‘루브르시티’ ‘벨파고’ ‘다빈치코드’는 루브르 박물관, ‘페드라’는 대영박물관, ‘한니발’ ‘체인 리액션’은 시카고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서 촬영했다.
국내 영화도 박물관에서 촬영한 경우가 적지 않다. ‘텔 미 썸싱’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바람의 파이터’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주요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는 메이지무라의 무술도장에서 촬영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의상을 담당한 김희주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시대극의 장롱을 다시 열어보고 먼지를 털어 내는 것으로 첫 바늘땀을 떴다고 한다. 특히 머리꽂이와 노리개 등 장신구는 박물관에서 직접 대여했고 소품인 화각장, 자개장, 자수장은 전통 공예 기법을 전수 받은 장인들이 몇 달간에 걸쳐 직접 제작한 문화재들이다. 조선조 말기 기행을 일삼았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삶을 그린 ‘취화선’의 오픈세트는 양수리에 22억 원을 들여 만든 것이다.
이보아가 영화에 본격적으로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 청취능력 배양’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영화의 마니아가 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 속에서 박물관 또는 미술관, 화랑, 학예연구원, 예술작품, 유물 또는 문화재 도난이나 반환 등 전문 영역과 관련된 실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한산한 박물관 매표소와 대조적으로 영화관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관객들을 보며 시기심을 느꼈다.
이보아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쓰면서 그토록 많은 영화에 박물관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경이감을 느꼈다. 그녀는 박물관과 영화의 관계 속에서 공통점을 제시하면서, 박물관을 ‘친구’로 사귀어 보라고 호소한다.
영화 ‘폐인’ 되다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출판하고 불과 한달 만에 내놓은 저서는 순전히 영화 감상기로 엮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2006년 3월 발행)이다. 문화부 기자인 장상용과 함께 쓴 이 책은 부제가 가리키듯 “영화 ‘대부’에서 ‘왕의 남자’까지 영화 속의 명 장면 명 대사”를 뽑아서 쓴 것이다.
두 필자는 이 책에 필요한 ‘명 장면, 명 대사’를 포착하기 위해 수십 편의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앞으로 보고 뒤로 보며 몇 달 동안 날밤을 새웠다. 이 책에서 이보아는 이렇게 소개된다.
그녀는 한때 화가를 꿈꾸었고 현재는 박물관 학자이며 미래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엄청 호기심 많은 여인이다. 본업인 박물관보다 영화를 ‘조끔’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통해 영화에 매혹 당한 박물관 학자임을 증명해 보였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다. 미국 영화 ‘대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후,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섭렵하면서 이제는 영화 없는 삶은 ‘박물관 없는 이보아’라고 주장한다. 마음에 드는 영화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수십 차례 반복해서 보는 독특한 습성의 진정한 영화 ‘폐인’이다.
이보아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의 프롤로그에서 “박물관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10년만 젊었더라면 용기를 내어 영화 연출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녀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영화광이지만 자기 삶 속에서 영화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이며, 박물관과 문화재를 알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이다.
역시 그녀는 박물관을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도록 만들고 문화재를 사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남기를 원한다. 이제 그녀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가 아니라 ‘영화 속 박물관과 문화재, 관객을 유혹하다’라는 새로운 자신의 트렌드를 엮어나갈 셈이다.
이보아는
1964년 서울 생.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미국 뉴욕대를 거쳐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보아의 전공영역은 박물관 미술관 경영, 전시 마케팅, 박물관학, 문화재관리학, 미술교육학으로 다중적이다. 그녀의 연구 테마 역시 한독기술연구단지(KGIT)의 블루오션 전략 개발, 국립산림박물관의 전시모델 구축, 삼성교통박물관 교통수요조사 등 다양하다. 그녀가 제시하는 경력은 단행본 출판 실적을 비롯해서 자문 및 출제 활동, 학술대회 발표, 토론참가, 방송출연, 특강활동 등 길게 꼬리를 잇는다. 영화와 박물관의 접목을 꾀하는 그의 ‘취미’ 때문에 영화로 전공을 바꾸고 있다는 소리도 듣는다.
안병찬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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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의 시대, 더 이상 문학작품이나 출판물은 심혈을 기울인 소산만은 아니다. 그런 것이 가능한 까닭은 컴퓨터와 같은 생산재의 발달 외에도 낮 밤을 이분법적으로 활용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대두 때문이다. ‘접는 미술관’의 경우처럼, 일상주의, 대중의 삶에서 모티브를 찾는 창작의 흐름이 주류로 등장한지 오래다. ‘시네뮤지올로지’같은 조어처럼 두 분야를 겹쳐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정보의 시대, 아케올로지(고고학)의 시대, 박물지와 골동품의 시대. 과거의 기록과 자료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내는 추세가 계속되고 스토리텔링(신화, 고전문학, 역사적 서사의 픽션화)과 역사학의 대중화가 진행된다. 이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 이후 2000년도 전후에 세계를 강타한 추세이다.
경제적 신체구조
이보아 교수는 한국 제1호 ‘박물관 경영학 박사’이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1997년 ‘문화재의 원산국으로의 반환에 관한 고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2000년도에 내놓은 첫 번째 저서는 ‘박물관학 개론’이다. 한국에서 박물관학 개론서는 1970년대에 나온 한 권이 유일했는데 그녀가 30년 만에 최신 버전의 개론서를 써서 박물관학의 숨통을 열었다고 한다.
이보아는 보기 드물게 억센 저술가다. 서른 여섯 살에 첫 저서인 ‘박물관학 개론’을 쓰더니 마흔 두 살이 된 2006년 초까지 5년 반 사이에 단행본 20권을 출판했다.
박물관 여행, 박물관 경영, 예술 경영, 문화 마케팅, 그리고 영화에 관한 저작물이다. 그 중에 공저와 공역, 개정판이 4권 들어 있지만 어쨌든 한 해 평균 3권 이상의 저서를 써낸 셈이니 그 에너지와 시간의 원천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열쇠는 수면 습관에 있다. 이보아는 하루 4시간 만 자면 되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다. 필자는 하루 수면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서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인물을 한사람 알고 있다.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인 백상 장기영은 밤과 낮의 구별이 없이 편집국과 논설위원실, 기타 제작 부서에 나타나서 진두지휘하는 체질 때문에 수돗물처럼 자유자재로 잠을 조절할 수 있는 희한한 생리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은 승용차인 지프차 속에서, 또는 회사 집무실에서 틈틈이 쪼개어 토끼잠을 잤으니, 조간 신문제작을 하는 새벽시간에 기자들은 졸음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으나 장 사장은 언제나 생기가 솟아나는 듯 원기 왕성했다.
장기영에 비하면 이보아는 새벽 1시에 반드시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에 틀림없이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졌다.
아침 7시 반에는 벌써 대학 연구실에 도착해서 집필에 들어간다. 그렇게 타고난 수면 단축 능력과 적극적인 천성 덕에 글을 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다는 얘기이니 이보아는 ‘경제적인 생체 구조’를 가진 사람이다.
청파동 한 동네를 박물관으로
이보아는 최근 ‘청파동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주택가인 청파동 한 동네를 파고들어 그 자체를 개념적으로 공공 박물관화 하여 이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다는 계획이다.
이보아가 동네 프로젝트를 설계한 ‘접는 미술관’ 측에서 청파동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발굴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은 2005년 12월이다. 그녀는 한 겨울에 청파동 일대를 수시로 탐사하면서 아이디어를 짜냈다.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은 ‘박물관 알레르기 환자를 위한 기억의 발굴전-청파박물관’이라는 생각이다. 일상적인 삶이 녹아있는 전선, 언덕, 대문, 오래된 물건, 아이들 탐사대, 전봇대의 흔적 등에서 청파동의 생활사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청파박물관을 집필하면서 이보아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가다듬고 있다.
‘청파동을 박물관화 하는 작업’은 새로운 문화적인 제도의 탄생을 의미한다. “생활 속 예술에는 날 것의 신선함이 있다”는 말처럼, 비록 청파박물관 전시물들이 외양적으로는 거친 느낌을 줄지 몰라도 본질은 다분히 신선하고 자유로운 역동성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 느낄 거리, 얘기할 거리가 풍부한 청파동 전시물은 관람객들에게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미각, 촉각, 후각까지도 자극하는 체험적인 대상이 된다.
분명한 사실은 청파동 전시물도 성찰 대상으로서의 ‘오브제’임으로 관람 주체인 ‘나’는 그것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독자들에겐 조금 괴팍하고 거창한 담론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청파박물관은 ‘유형적인 문화유산’과 ‘무형적인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공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현재의 청파동의 모습(전시물)이고, 후자는 우리의 해마 속에 남아 있는 일상의 기억(전시물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이다. 청파박물관은 바로 우리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면서 남길 모든 흔적이 묻혀 있는 장소이다….
‘시네뮤지올로지’의 발견
박물군자(博物君子)인 이보아는 당초에 영화를 통해서 박물관을 전파한다는 색다른 착안을 했다. 딱딱한 박물관의 값어치를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추계예술대학교 영상문화학부의 이보아 교수 연구실에 가보면 서가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것은 족히 300편이 넘는 영화 비디오다. 그녀는 영화 마니아다. 2006년 초에 그녀는 두 달 간격으로 두 권의 저서를 냈는데 둘 다 영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한 권은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2006년 1월 발행)’라는 제목이다. 이 책을 쓰면서 이보아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했다. 이른바 ‘시네뮤지올로지(cinemuseology)’인데 영화(시네마)로 보는 박물관학(뮤지올로지)이라는 뜻으로 합성한 용어이다. 이 책은 그녀가 얼마나 영화에 빠져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 나오는 박물관의 요소를 수많이 수집해서 소개하고 해설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국 영화를 예로 들면 ‘집으로’를 만든 이정향 감독의 처녀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이 있다. 박물관 관람의 문화소비와 취향에 관한 연구에 따른다면 이 영화에서 미술관은 여자를, 동물원은 남성을 상징한다.
중국 구정평 감독의 영화 ‘몽중인(夢中人)’은 전생을 진나라에서 부부로 살다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송위(주윤발)와 장예화(임청하)가 현대에 환생해서 다시 겪게 되는 슬픈 사랑이야기다. 이 영화에 나오는 진시황 능 출토 유물 전시회는 실제로 이루어진 해외 순회 전시회로, 한국에서는 98만 명이 관람한 블록버스터 전시였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로 그녀는 책 한 권을 채우고 있다.
이보아는 ‘감독들이 왜 박물관을 찾나’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감독들이 박물관의 문화적·예술적 요소들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분명 나름대로의 명분이나 상징적 의미가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찾는 감독들
이보아는 영화 상 박물관의 가치를 세 가지로 본다. 첫 째 박물관이 등장하면 일단은 그림 자체가 훌륭해진다. 박물관의 외관이 지니는 웅장함과 고풍스러운 특성 외에도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박물관의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가 있다.
박물관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이미지’는 영화에 박물관이 등장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박물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얼굴이 변한다.
태양이 비출 때에는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는 교육적인 공간인 반면, 달이 태양의 자리를 차지하면 텅 빈 전시실에 어둠이 내리고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날 만한 공포와 살기가 느껴지는 음침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박물관 자체의 이중성과 그곳에 소장된 유물이나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힘이 결합되면 극한 공포를 야기해 완벽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또 박물관은 과거의 역사적 자료를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어, 특히 시대극의 경우 역사적 고증과 재현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이 감독이 박물관에 관심을 두는 세 번째 이유이다.
이렇게 이보아는 수많은 영화에 들어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편린들을 예시하면서 상세한 박물관 해설을 곁들인다.
미국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아메리칸 촌놈’ ‘러브 인 맨해튼’ ‘퍼펙트 머더’ ‘해리가 새리를 만났을 때’에는 모두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등장한다.
‘루브르시티’ ‘벨파고’ ‘다빈치코드’는 루브르 박물관, ‘페드라’는 대영박물관, ‘한니발’ ‘체인 리액션’은 시카고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서 촬영했다.
국내 영화도 박물관에서 촬영한 경우가 적지 않다. ‘텔 미 썸싱’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바람의 파이터’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주요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는 메이지무라의 무술도장에서 촬영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의상을 담당한 김희주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시대극의 장롱을 다시 열어보고 먼지를 털어 내는 것으로 첫 바늘땀을 떴다고 한다. 특히 머리꽂이와 노리개 등 장신구는 박물관에서 직접 대여했고 소품인 화각장, 자개장, 자수장은 전통 공예 기법을 전수 받은 장인들이 몇 달간에 걸쳐 직접 제작한 문화재들이다. 조선조 말기 기행을 일삼았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삶을 그린 ‘취화선’의 오픈세트는 양수리에 22억 원을 들여 만든 것이다.
이보아가 영화에 본격적으로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 청취능력 배양’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영화의 마니아가 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 속에서 박물관 또는 미술관, 화랑, 학예연구원, 예술작품, 유물 또는 문화재 도난이나 반환 등 전문 영역과 관련된 실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한산한 박물관 매표소와 대조적으로 영화관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관객들을 보며 시기심을 느꼈다.
이보아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쓰면서 그토록 많은 영화에 박물관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경이감을 느꼈다. 그녀는 박물관과 영화의 관계 속에서 공통점을 제시하면서, 박물관을 ‘친구’로 사귀어 보라고 호소한다.
영화 ‘폐인’ 되다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출판하고 불과 한달 만에 내놓은 저서는 순전히 영화 감상기로 엮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2006년 3월 발행)이다. 문화부 기자인 장상용과 함께 쓴 이 책은 부제가 가리키듯 “영화 ‘대부’에서 ‘왕의 남자’까지 영화 속의 명 장면 명 대사”를 뽑아서 쓴 것이다.
두 필자는 이 책에 필요한 ‘명 장면, 명 대사’를 포착하기 위해 수십 편의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앞으로 보고 뒤로 보며 몇 달 동안 날밤을 새웠다. 이 책에서 이보아는 이렇게 소개된다.
그녀는 한때 화가를 꿈꾸었고 현재는 박물관 학자이며 미래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엄청 호기심 많은 여인이다. 본업인 박물관보다 영화를 ‘조끔’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를 통해 영화에 매혹 당한 박물관 학자임을 증명해 보였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다. 미국 영화 ‘대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후,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섭렵하면서 이제는 영화 없는 삶은 ‘박물관 없는 이보아’라고 주장한다. 마음에 드는 영화는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수십 차례 반복해서 보는 독특한 습성의 진정한 영화 ‘폐인’이다.
이보아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의 프롤로그에서 “박물관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10년만 젊었더라면 용기를 내어 영화 연출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녀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영화광이지만 자기 삶 속에서 영화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이며, 박물관과 문화재를 알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이다.
역시 그녀는 박물관을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도록 만들고 문화재를 사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남기를 원한다. 이제 그녀는 ‘박물관, 영화를 유혹하다’가 아니라 ‘영화 속 박물관과 문화재, 관객을 유혹하다’라는 새로운 자신의 트렌드를 엮어나갈 셈이다.
이보아는
1964년 서울 생.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미국 뉴욕대를 거쳐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보아의 전공영역은 박물관 미술관 경영, 전시 마케팅, 박물관학, 문화재관리학, 미술교육학으로 다중적이다. 그녀의 연구 테마 역시 한독기술연구단지(KGIT)의 블루오션 전략 개발, 국립산림박물관의 전시모델 구축, 삼성교통박물관 교통수요조사 등 다양하다. 그녀가 제시하는 경력은 단행본 출판 실적을 비롯해서 자문 및 출제 활동, 학술대회 발표, 토론참가, 방송출연, 특강활동 등 길게 꼬리를 잇는다. 영화와 박물관의 접목을 꾀하는 그의 ‘취미’ 때문에 영화로 전공을 바꾸고 있다는 소리도 듣는다.
안병찬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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