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지수와 ‘프랑스’라는 스캔들
김정환 (시인)
문화란 정치와 경제의 절정 혹은 최적 관계의 산물이지,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문화의 고전은 내용과 형식의, 전망과 실현의 연속성으로 아름다움에 가닿는 반면, 불멸은 그 본질이 단속적이다.
‘미제국주의’라는 말은, 미국 시민 중 제국주의라는 질병에 젖은 ‘나쁜’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지, 미국이 제국주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미국 정부가 제국주의라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데, 반대하는 사람일수록, 거센 반대일수록 흔히 미국과 제국주의를 동일시한다. 아니, 미국과 제국주의가 동일시될수록 반대하고, 미제의 앞잡이라는 말에 이르면 범위가 더욱 축소되면서 등식이 더욱 강화하는, 감정의 가상현실 현상까지 나타난다. 미국에도 건전한 정치와 경제와 문화 담당층이 엄존할 뿐 아니라 미국을 유지하는 것은 의외로 이들이다.
가려진 서유럽 제국주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본질적 외형인 한, 서유럽에도 당연히 제국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신나치주의자들에 가려 눈에 띄지 않지만, 그 힘이 미국의 경우 못지않게 강력하다.
그런데 우리는 불제국주의니 영제국주의니 독제국주의니 그런 용법을 써본 적이 없고, ‘프랑스=제국주의’의, 감정의 가상현실 작용은 더더욱 드물다.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 강대국에 맞서는 그들의 자부심을 높이 사는 걸까. 아니면 정말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은 새로운 대안인 걸까.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매우 중대한 ‘문화의 착오’가 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같지만, 나도 영국의 문학을, 프랑스의 미술을,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음악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문명의 아버지일 망정, 미래의 대안은 아니다.
신대륙과 미국 사이 문화의 ‘품격 차이’를 논하는 것은 현대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무지에 해당한다. 서양과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연속성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아들을 닮으려 기를 쓰는 아버지에게 호의를, 그리고 정작 그 아들에게 적의를 갖는 볼썽사나운 꼴을 들킬 수밖에 없고, 미제국주의 극복은 정말 구호에 그쳐버린다.
그 대상이 미국이든 서유럽이든 혹은 지상에서 가까스로 연명 중인 사회주의든 좋은 점 배울 것을 배워야, 소극적으로 대상을 극복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메리카 독립 이후 유럽 스스로 만들어낸 유럽의 환상에 휘말려들고 있는, 이중의 심리적 주변부에 머물고 있는 것이기 쉽다.
며칠 전 한 일간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2006년 7월 27일 영국 레스터 대학 교수 화이트가 조사 발표한 세계 각국 ‘행복지도’. 평균수명과 GDP, 교육 기회의 3가지 요소를 토대로 하고, ‘생태학적 발자국’ 즉 인구 유지 및 에너지 소비(공해)를 감당하는데 필요한 토지 면적 개념을 활용, 한 국가가 국민 건강과 생활 만족을 위해 자원을 얼마나 적절하게 쓰고 있는지를 중시하여 소득이 높고 평균수명이 길더라도 환경 훼손이 심한 국가는 순위를 낮추고, 자국 문화 및 전통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가 높으면 올렸다고 한다.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1, 2, 3위, 부탄이 8위, 미국은 23위, 일본은 90위,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이 최하위인 178위를 기록했으며북한은 ‘자료없음’으로 분류됐고, 한국은 102위, 가까스로 불행을 면한 단계였다고 한다.
부탄 행복지수 8위는 억지
나는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생태학 수준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으므로 그 정도 평가에 만족한다.
하지만 8위 부탄은 아무래도 자연생태학을 빙자, 유럽의 환상을 세계화하려는 억지의 소산이다. 부탄은 히말라야 오지의 종교왕국이며 종교적 만족도와 봉건적 만족도는 숫자로 계산될 수 없고, 굳이 계산한다면 광신적일수록 중세적일수록 수치가 높다.
저개발 국가의 굶주림을 도시 탈출 관광의 미적 향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한국의 부자동네 방배동 하고도 외국인 주거지역 서래마을 프랑스인 주택 두 영아 시신 냉동고 유기사건은 물론 끔찍하지만, 나는 사건의 이국성이 더 충격적이다. 나야말로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가? 환멸에 대비하는가, 레바논 학살이라는 인류사의 집요한 치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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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시인)
문화란 정치와 경제의 절정 혹은 최적 관계의 산물이지,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문화의 고전은 내용과 형식의, 전망과 실현의 연속성으로 아름다움에 가닿는 반면, 불멸은 그 본질이 단속적이다.
‘미제국주의’라는 말은, 미국 시민 중 제국주의라는 질병에 젖은 ‘나쁜’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지, 미국이 제국주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미국 정부가 제국주의라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데, 반대하는 사람일수록, 거센 반대일수록 흔히 미국과 제국주의를 동일시한다. 아니, 미국과 제국주의가 동일시될수록 반대하고, 미제의 앞잡이라는 말에 이르면 범위가 더욱 축소되면서 등식이 더욱 강화하는, 감정의 가상현실 현상까지 나타난다. 미국에도 건전한 정치와 경제와 문화 담당층이 엄존할 뿐 아니라 미국을 유지하는 것은 의외로 이들이다.
가려진 서유럽 제국주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본질적 외형인 한, 서유럽에도 당연히 제국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신나치주의자들에 가려 눈에 띄지 않지만, 그 힘이 미국의 경우 못지않게 강력하다.
그런데 우리는 불제국주의니 영제국주의니 독제국주의니 그런 용법을 써본 적이 없고, ‘프랑스=제국주의’의, 감정의 가상현실 작용은 더더욱 드물다.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 강대국에 맞서는 그들의 자부심을 높이 사는 걸까. 아니면 정말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은 새로운 대안인 걸까.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매우 중대한 ‘문화의 착오’가 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같지만, 나도 영국의 문학을, 프랑스의 미술을,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음악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문명의 아버지일 망정, 미래의 대안은 아니다.
신대륙과 미국 사이 문화의 ‘품격 차이’를 논하는 것은 현대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무지에 해당한다. 서양과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연속성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아들을 닮으려 기를 쓰는 아버지에게 호의를, 그리고 정작 그 아들에게 적의를 갖는 볼썽사나운 꼴을 들킬 수밖에 없고, 미제국주의 극복은 정말 구호에 그쳐버린다.
그 대상이 미국이든 서유럽이든 혹은 지상에서 가까스로 연명 중인 사회주의든 좋은 점 배울 것을 배워야, 소극적으로 대상을 극복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메리카 독립 이후 유럽 스스로 만들어낸 유럽의 환상에 휘말려들고 있는, 이중의 심리적 주변부에 머물고 있는 것이기 쉽다.
며칠 전 한 일간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2006년 7월 27일 영국 레스터 대학 교수 화이트가 조사 발표한 세계 각국 ‘행복지도’. 평균수명과 GDP, 교육 기회의 3가지 요소를 토대로 하고, ‘생태학적 발자국’ 즉 인구 유지 및 에너지 소비(공해)를 감당하는데 필요한 토지 면적 개념을 활용, 한 국가가 국민 건강과 생활 만족을 위해 자원을 얼마나 적절하게 쓰고 있는지를 중시하여 소득이 높고 평균수명이 길더라도 환경 훼손이 심한 국가는 순위를 낮추고, 자국 문화 및 전통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가 높으면 올렸다고 한다.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1, 2, 3위, 부탄이 8위, 미국은 23위, 일본은 90위, 그리고 콩고민주공화국이 최하위인 178위를 기록했으며북한은 ‘자료없음’으로 분류됐고, 한국은 102위, 가까스로 불행을 면한 단계였다고 한다.
부탄 행복지수 8위는 억지
나는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생태학 수준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으므로 그 정도 평가에 만족한다.
하지만 8위 부탄은 아무래도 자연생태학을 빙자, 유럽의 환상을 세계화하려는 억지의 소산이다. 부탄은 히말라야 오지의 종교왕국이며 종교적 만족도와 봉건적 만족도는 숫자로 계산될 수 없고, 굳이 계산한다면 광신적일수록 중세적일수록 수치가 높다.
저개발 국가의 굶주림을 도시 탈출 관광의 미적 향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한국의 부자동네 방배동 하고도 외국인 주거지역 서래마을 프랑스인 주택 두 영아 시신 냉동고 유기사건은 물론 끔찍하지만, 나는 사건의 이국성이 더 충격적이다. 나야말로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가? 환멸에 대비하는가, 레바논 학살이라는 인류사의 집요한 치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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