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을 후원하는등 일제때 애국운동을 벌여온 수원출신의 염석주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한 운동이 다시 본격화된다.
최용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샘골교회 김우경 장로와 안산문
화원 유천형 고문, 최용신 선생의 제자인 홍석필씨 등은 지난 95년에 이어 다시 염 선생을 독립유공
자로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이들은 특히 그동안 근거부족을 이유로 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라 염선생의 유족들
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일제시대의 관련자료를 찾는데는 혼신을 다하기로 했다.
유천형 고문은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쫒은 결과 염석주란 인물의 후원이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밝
혀졌다”며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가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사실이 안타까
워 추서운동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들은 지난 95년부터 2차례에 걸쳐 최선생과 함께 염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작업을 벌여
왔으나 국가보훈처가 조사기록과 판결문 등 근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염선생의 경우 지금까지 독립유
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김우경 장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을 보면 염선생이 요시찰인
물이고 신간회 간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물론 여러 사람들의 증언도 나타난다”며 "그런데
도 국가보훈처가 염선생이 고문을 받은 조사기록과 판결문을 요구하며 유공자 선정을 계속 미루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염선생의 경우 단순히 조사기록과 판결문이 없어 유공자로 선정하
지 않은 것이 아니다"며 객관적인 자료가 보강돼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한편 염선생은 1895년 부농의 아들로 밤밭(수원 율전동)에서 태어나 청년시절부터 애국운동을 벌였으
며 특히 경기도의 신간회 간부로 활동, 일제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특히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에서 최선생을 만난뒤 '여자지만 의지가 굳고 정신이 바르다'고 탄복,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어오다 샘골강습소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이사장직을 맡아 최선생의 생활비 등
을 지원했으며 1935년 최선생이 사망하자 사회장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후 애국운동을 계속하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일경에 체포, 동대문경찰서에서 18일간 모진 고문
을 받는 과정에서 사망했으나 한국전쟁당시 동대문경찰서의 모든 자료가 소실, 조사받은 기록을 찾
지 못하고 있다.
안산 채 현 기자 hchai@naeil.com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한 운동이 다시 본격화된다.
최용신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샘골교회 김우경 장로와 안산문
화원 유천형 고문, 최용신 선생의 제자인 홍석필씨 등은 지난 95년에 이어 다시 염 선생을 독립유공
자로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이들은 특히 그동안 근거부족을 이유로 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라 염선생의 유족들
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일제시대의 관련자료를 찾는데는 혼신을 다하기로 했다.
유천형 고문은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쫒은 결과 염석주란 인물의 후원이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밝
혀졌다”며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가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사실이 안타까
워 추서운동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들은 지난 95년부터 2차례에 걸쳐 최선생과 함께 염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작업을 벌여
왔으나 국가보훈처가 조사기록과 판결문 등 근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염선생의 경우 지금까지 독립유
공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김우경 장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을 보면 염선생이 요시찰인
물이고 신간회 간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물론 여러 사람들의 증언도 나타난다”며 "그런데
도 국가보훈처가 염선생이 고문을 받은 조사기록과 판결문을 요구하며 유공자 선정을 계속 미루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염선생의 경우 단순히 조사기록과 판결문이 없어 유공자로 선정하
지 않은 것이 아니다"며 객관적인 자료가 보강돼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한편 염선생은 1895년 부농의 아들로 밤밭(수원 율전동)에서 태어나 청년시절부터 애국운동을 벌였으
며 특히 경기도의 신간회 간부로 활동, 일제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특히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에서 최선생을 만난뒤 '여자지만 의지가 굳고 정신이 바르다'고 탄복,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어오다 샘골강습소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이사장직을 맡아 최선생의 생활비 등
을 지원했으며 1935년 최선생이 사망하자 사회장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후 애국운동을 계속하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일경에 체포, 동대문경찰서에서 18일간 모진 고문
을 받는 과정에서 사망했으나 한국전쟁당시 동대문경찰서의 모든 자료가 소실, 조사받은 기록을 찾
지 못하고 있다.
안산 채 현 기자 hchai@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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