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우등생과 열등생, ‘숙제 전쟁’으로 결정?
방과 후면 학원을 ‘순례’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자화상. 한 학기에서 심하게는 몇 개 학년의 학습 과정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 위주의 학원 수업 방식은 과제를 충실히 해가지 못할 경우 진도를 따라 갈 수 없고, 그것이 거듭되다보면 자신감을 잃거나 체벌과 탈락에 대한 스트레스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우리 아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학원 숙제의 현주소를 점검해본다.
취재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사진 이의종
숙제, 하느냐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
방학이 되자마자 이희은 양(12·서울 S초교 6년)은 엄마와 함께 새로운 영어 학원을 찾아가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3월부터 중학생이 되니 좀 더 영어 실력을 쌓아놓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였다. 영어뿐 아니라 수학, 국어, 과학, 논술도 팀을 새로 짜거나 학원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이 때문에 그간 취미로 배우던 플루트는 시간이 부족해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양은 요즘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로 고민이 많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힘든데 과목마다 숙제 양이 엄청나 방학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는 것이 이양의 하소연.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상에서 학원이나 과외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를 비롯해 목동, 중계동, 평촌 일대 중심가 건물은 위 아래층 가릴 것 없이 온통 학원이다. 평소에는 저녁 식사를 때우려는 학생들로 패스트푸드점과 분식집이 붐비고, 인근 도로는 학부모 차량과 학원 버스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는 풍경이 펼쳐진다. 학원이 급속히 팽창하는 모습은 전국적인 현상. 특히 논술 강화를 계기로 급증해 현재는 2만 8천여 곳에 육박하고 있다. 이른바 과외 기본 과목도 과거 ‘국영수’에서 이제는 사회, 과학, 논술까지로 늘다보니 학생들이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갈수록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원에서 내주는 엄청난 양의 숙제가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한 일간지가 서울 강남과 목동 지역 3개 초등학교 학생 9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한 명도 빠짐없이 학원에 다녔으며, 하루 평균 학원 숙제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3시간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27명으로 가장 많았다. 1~2시간(14명), 3~4시간(10명)이 뒤를 이었다. 4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학생도 10명이나 됐다. 사정이 이러니 아이들이 취미 활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공부를 할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아이들은 괴롭고 엄마는 박수 치고
“유명한 학원 선생님들 밑에는 조교 선생님이 있어요. 일단 수업시작 전에 조교가 숙제를 검사하는데 이때 통과하지 못하면 입실이 안 돼요. 또 능력별 반 편성이다보니 수업 진도가 빨라요. 과제물을 안 해가면 수업을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에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니까요. 숨 쉬기도 힘들 만큼 경쟁하는 게 너무 버거워요.”
임은지 양(서울 대치동 U고 1년)은 학원 숙제를 안 하면 불안해서 식욕까지 없어진다고 토로했다.
학원 숙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에는 임양처럼 수업 진도의 차질 때문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체벌과 낙오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남아서 문제를 풀고 거기서 틀린 문제는 오답 노트까지 작성해야 귀가할 수 있는 것. ‘체벌’이 뒤따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어학원은 하루에 암기해야할 영어 단어 분량이 100~200개. 만약 아이들이 외우지 못할 때는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는다.
중계동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다 최근에 접은 김아무개 씨는 “아이들이 강요와 강박관념으로 단어를 외우긴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려서 과연 그 방법이 효과적일까 회의가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학원들이 경쟁적으로 ‘숙제’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 이면에는 학부모의 영향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학원의 이런 시스템에 항의하기보다는 만족하거나 암묵적인 지지까지 보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학원에 가면 도착했다는 문자가 휴대폰으로 오니 출석 여부를 자동으로 알 수 있어요. 과목별로 숙제만 하는 문제집이나 프린트물이 따로 있고, 과제물 결과를 매달 평가해서 성적을 합산한 다음 종합평가한 내용을 집에서 받아보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수준에서 공부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서 학부모 입장에선 선호하게 되죠.”
곽정숙 씨(49·서초구 양재동)의 말이다. 이어 곽씨는 이 같은 학원 운영이 ‘심리적 만족감’으로 연결된다고 덧붙였다. “학원 과제물이 많아 아이들이 집에 와서도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잘하고 있구나 하는 안심이 된다”면서 학원에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과중한 학원 숙제가 아이들에게 시간적, 정신적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과도한 중압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간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숙제가 자신의 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응답이 72퍼센트에 달한 것이다.
숙제 효용론 vs 무용론
물론 집에서 공부하는 습관과 시간 관리 능력, 책임감을 키워주는 숙제의 순기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발적이지 않고 양으로 승부하는 숙제에 문제가 있다.
교육 전문 작가 김은실 씨(<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저자)는 학원가의 과중한 숙제에 대해 “학원 우등생과 열등생의 결정은 숙제와의 전쟁에서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그 심각성을 꼬집었다.
“이른바 유명 학원의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강사는 10퍼센트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학생들이 과제물을 통해 공부하는 거예요. 특히 수학은 미리 해온 과제물에서 틀리거나 모르는 부분만 체크하며 해결해주고 계속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되고 성과도 좋을 수밖에 없죠. 반면 학원 숙제를 못해갈 경우 지적이나 체벌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잃게 되고, 진도는 차질을 빚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다보면 학원에 그냥 앉아 있다가 오는 형국이 됩니다.”
그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경험한 학생들도 공감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1년 김동완 군(18)은 “강남에서 학원과 고액과외로 ‘받아먹기’ 식의 공부를 해서 들어온 친구들과 지방에서 혼자 파고들어서 대학에 들어온 친구들은 학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스스로 공부하는 게 습관이 된 친구들은 이길 수가 없다”고 밝혔다.
신동준 군(19·서강대 컴퓨터공학과)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년 동안 같은 학원을 다녔지만 선생님들이 시키는 공부였지 내 공부는 아니었다”면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비로소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학원 무용론을 이야기한다.
반면 논술을 지도하고 있는 이미영 씨(이미영 국어 논술연구소 원장)는 학원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못 박았다. 물론 그 또한 ‘무게감 있는’ 숙제를 낸다. 이곳의 경우 초등학생에겐 책을 읽고 감상문 쓰기, 토론을 할 수 있는 문제를 10개씩 뽑아오는 것, 중학생은 신문의 시론이나 칼럼, 오피니언 등을 읽고 모르는 어휘 찾기, 서론·본론·결론과 줄거리를 요약해 자기 의견을 제시, 발표하는 것이 주 과제물. 이를 마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300~500페이지는 읽어야 한다.
“아이들에겐 만만찮은 스트레스일 거예요. 하지만 이 또한 자기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한 동기부여일 뿐입니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가 생활화된 아이라면 굳이 논술 학원은 다닐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인정받는 고전이라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동화책을 꾸준히 읽는 게 자기 시각을 뚜렷이 가지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이씨는 부모가 ‘자식의 그릇’을 파악하지 못하면 고 3까지 힘겹게 끌고 가며 돈을 들이다 결국엔 사이만 나빠진다고 경고하면서 아이의 성향을 파악한 순간 80퍼센트는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찍 아이의 진로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엘리트는 상위 5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학원들도 다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인데 엄마들은 내 자식은 될 거라 믿고 이 학원, 저 학원을 찾아다니죠. 저는 엄마들에게 강남 유명 학원 찾지 말라고 합니다. 변두리 동네, 소규모라도 내 아이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선생님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죠.”
학습한 것을 복습하며 자기 지식으로 만들라는 의미가 강한 숙제가 ‘전시성 결과’만 중요시하는 학원,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과 맞물려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숙제와 학업 성취도는 별개
학업 성적은 지능, 학습 태도, 가정환경, 학교환경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한 학기에서 몇 개 학년까지 앞서 선행학습을 하는 학원의 관행은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수업에 흥미를 잃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방학 중 특강은 6주나 8주 코스로 1학기, 혹은 1년 분량을 초고속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양이 더욱 많아져 숙제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한편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어린이들이 과도한 숙제로 취미, 스포츠, 가족 여가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숙제가 학습에 기여한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는데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숙제를 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두 권의 책도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숙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case="" against="" homework)="">의 공동 저자이자 변호사인 새러 베넷은 “자녀들의 방과 후 ‘끔찍한 스케줄’을 알고 책을 쓸 결심을 했다”며 “중학생인 아들이 내가 로스쿨 학생 때처럼 공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숙제로 꽉 찬 교육 시스템에 진저리가 나 숙제 없는 대안학교로 두 아이를 전학시켰다고 했다. <숙제 신화(the="" homework="" myth)="">의 저자인 앨피 콘 또한 지나친 숙제가 어린이들로부터 ‘배움에 대한 사랑’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심리적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마저 있다고 경고했다.
또 미국 듀크 대학 해리스 쿠퍼 교수는 “연구 결과 학업 성취도와 숙제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수십 차례 연구에서 중·고교에서 약간의 숙제는 시험 성적을 올려주었지만 중학생이 매일 60~90분, 고등학생이 2시간 이상 숙제할 경우 성적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너무 많은 숙제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요인’을 분석할 때 숙제를 넣지 않는 방향 또한 숙제와 성적 사이에 특별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떠먹여주기보다 스스로 찾아 먹는 공부가 중요
학원 숙제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과목마다 수행평가로 숙제를 대신하는 학교 일선 교사들의 걱정도 간단치 않다. “수행평가는 집으로 가져가면 남이 도와줄 수도 있기 때문에 수업 과정에서 평가를 합니다. 당연히 수업 태도가 점수에 들어가는데도 학원에서 시달린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자고 있어요. 특히 시험을 앞두고는 학원에서 더 늦게 오니 수업 시간 대부분 비몽사몽이고 학교에 와서 공부할 엄두를 못 내는 거죠. 평가하는 선생인 내가 시험 문제를 내는데도 학원에만 의존하니 정말 답답해요.”
안천중학교 김정숙 교사(43·경기도 광명시)의 말에는 안타까움까지 묻어난다. 김 교사는 이어 “아이들은 학원 선생님을 더 무서워하고, 학부모 역시 학원을 더 중요시하지만 학원은 지식 전달 위주, 반복과 암기 위주의 수업 방식이기에 시험을 본 후 곧 잊어버려 자기 교양과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조언한다.
교육 전문가들 또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원리를 습득하지 않고 무조건 앞서 배우기만 해서는 학습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 지 오래다. 더구나 기초 학습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학원의 진도에만 맞추다보면 문제풀이 요령은 늘 수 있지만 원리를 응용한 문제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된다는 선배들의 경험담도 부지기수다.
강남구 개포동 개일초등학교 신명수 교장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학원 숙제를 많이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과중한 학원 숙제의 부담에서 풀어주는 길은 아이와 대화를 통해 꼭 필요한 학원만을 선택하고 집이나 독서실에서 자기 계획에 맞춰 주도적으로 공부하도록 격려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은실 작가는 학부모에게 당부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은 빼고 눈에 보이는 수업량과 숙제 양을 늘린다고 아이들이 소화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아이가 숙제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철저히 확인하며 한 군데를 보내더라도 적절한 학습량을 맞춰야만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잘못된 숙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손을 빨리 잡아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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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면 학원을 ‘순례’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자화상. 한 학기에서 심하게는 몇 개 학년의 학습 과정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 위주의 학원 수업 방식은 과제를 충실히 해가지 못할 경우 진도를 따라 갈 수 없고, 그것이 거듭되다보면 자신감을 잃거나 체벌과 탈락에 대한 스트레스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우리 아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학원 숙제의 현주소를 점검해본다.
취재 박미경 리포터 rose4555@hanmail.net 사진 이의종
숙제, 하느냐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
방학이 되자마자 이희은 양(12·서울 S초교 6년)은 엄마와 함께 새로운 영어 학원을 찾아가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3월부터 중학생이 되니 좀 더 영어 실력을 쌓아놓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였다. 영어뿐 아니라 수학, 국어, 과학, 논술도 팀을 새로 짜거나 학원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이 때문에 그간 취미로 배우던 플루트는 시간이 부족해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양은 요즘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로 고민이 많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힘든데 과목마다 숙제 양이 엄청나 방학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는 것이 이양의 하소연.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상에서 학원이나 과외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를 비롯해 목동, 중계동, 평촌 일대 중심가 건물은 위 아래층 가릴 것 없이 온통 학원이다. 평소에는 저녁 식사를 때우려는 학생들로 패스트푸드점과 분식집이 붐비고, 인근 도로는 학부모 차량과 학원 버스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는 풍경이 펼쳐진다. 학원이 급속히 팽창하는 모습은 전국적인 현상. 특히 논술 강화를 계기로 급증해 현재는 2만 8천여 곳에 육박하고 있다. 이른바 과외 기본 과목도 과거 ‘국영수’에서 이제는 사회, 과학, 논술까지로 늘다보니 학생들이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갈수록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원에서 내주는 엄청난 양의 숙제가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한 일간지가 서울 강남과 목동 지역 3개 초등학교 학생 9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한 명도 빠짐없이 학원에 다녔으며, 하루 평균 학원 숙제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3시간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27명으로 가장 많았다. 1~2시간(14명), 3~4시간(10명)이 뒤를 이었다. 4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학생도 10명이나 됐다. 사정이 이러니 아이들이 취미 활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공부를 할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아이들은 괴롭고 엄마는 박수 치고
“유명한 학원 선생님들 밑에는 조교 선생님이 있어요. 일단 수업시작 전에 조교가 숙제를 검사하는데 이때 통과하지 못하면 입실이 안 돼요. 또 능력별 반 편성이다보니 수업 진도가 빨라요. 과제물을 안 해가면 수업을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에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탈락이니까요. 숨 쉬기도 힘들 만큼 경쟁하는 게 너무 버거워요.”
임은지 양(서울 대치동 U고 1년)은 학원 숙제를 안 하면 불안해서 식욕까지 없어진다고 토로했다.
학원 숙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에는 임양처럼 수업 진도의 차질 때문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체벌과 낙오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남아서 문제를 풀고 거기서 틀린 문제는 오답 노트까지 작성해야 귀가할 수 있는 것. ‘체벌’이 뒤따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어학원은 하루에 암기해야할 영어 단어 분량이 100~200개. 만약 아이들이 외우지 못할 때는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는다.
중계동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다 최근에 접은 김아무개 씨는 “아이들이 강요와 강박관념으로 단어를 외우긴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려서 과연 그 방법이 효과적일까 회의가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학원들이 경쟁적으로 ‘숙제’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 이면에는 학부모의 영향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학원의 이런 시스템에 항의하기보다는 만족하거나 암묵적인 지지까지 보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학원에 가면 도착했다는 문자가 휴대폰으로 오니 출석 여부를 자동으로 알 수 있어요. 과목별로 숙제만 하는 문제집이나 프린트물이 따로 있고, 과제물 결과를 매달 평가해서 성적을 합산한 다음 종합평가한 내용을 집에서 받아보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수준에서 공부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서 학부모 입장에선 선호하게 되죠.”
곽정숙 씨(49·서초구 양재동)의 말이다. 이어 곽씨는 이 같은 학원 운영이 ‘심리적 만족감’으로 연결된다고 덧붙였다. “학원 과제물이 많아 아이들이 집에 와서도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잘하고 있구나 하는 안심이 된다”면서 학원에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과중한 학원 숙제가 아이들에게 시간적, 정신적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과도한 중압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간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숙제가 자신의 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응답이 72퍼센트에 달한 것이다.
숙제 효용론 vs 무용론
물론 집에서 공부하는 습관과 시간 관리 능력, 책임감을 키워주는 숙제의 순기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발적이지 않고 양으로 승부하는 숙제에 문제가 있다.
교육 전문 작가 김은실 씨(<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저자)는 학원가의 과중한 숙제에 대해 “학원 우등생과 열등생의 결정은 숙제와의 전쟁에서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그 심각성을 꼬집었다.
“이른바 유명 학원의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강사는 10퍼센트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학생들이 과제물을 통해 공부하는 거예요. 특히 수학은 미리 해온 과제물에서 틀리거나 모르는 부분만 체크하며 해결해주고 계속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되고 성과도 좋을 수밖에 없죠. 반면 학원 숙제를 못해갈 경우 지적이나 체벌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잃게 되고, 진도는 차질을 빚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다보면 학원에 그냥 앉아 있다가 오는 형국이 됩니다.”
그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경험한 학생들도 공감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1년 김동완 군(18)은 “강남에서 학원과 고액과외로 ‘받아먹기’ 식의 공부를 해서 들어온 친구들과 지방에서 혼자 파고들어서 대학에 들어온 친구들은 학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스스로 공부하는 게 습관이 된 친구들은 이길 수가 없다”고 밝혔다.
신동준 군(19·서강대 컴퓨터공학과)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년 동안 같은 학원을 다녔지만 선생님들이 시키는 공부였지 내 공부는 아니었다”면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비로소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학원 무용론을 이야기한다.
반면 논술을 지도하고 있는 이미영 씨(이미영 국어 논술연구소 원장)는 학원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할 뿐이라고 못 박았다. 물론 그 또한 ‘무게감 있는’ 숙제를 낸다. 이곳의 경우 초등학생에겐 책을 읽고 감상문 쓰기, 토론을 할 수 있는 문제를 10개씩 뽑아오는 것, 중학생은 신문의 시론이나 칼럼, 오피니언 등을 읽고 모르는 어휘 찾기, 서론·본론·결론과 줄거리를 요약해 자기 의견을 제시, 발표하는 것이 주 과제물. 이를 마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300~500페이지는 읽어야 한다.
“아이들에겐 만만찮은 스트레스일 거예요. 하지만 이 또한 자기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한 동기부여일 뿐입니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가 생활화된 아이라면 굳이 논술 학원은 다닐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인정받는 고전이라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동화책을 꾸준히 읽는 게 자기 시각을 뚜렷이 가지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이씨는 부모가 ‘자식의 그릇’을 파악하지 못하면 고 3까지 힘겹게 끌고 가며 돈을 들이다 결국엔 사이만 나빠진다고 경고하면서 아이의 성향을 파악한 순간 80퍼센트는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찍 아이의 진로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엘리트는 상위 5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학원들도 다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인데 엄마들은 내 자식은 될 거라 믿고 이 학원, 저 학원을 찾아다니죠. 저는 엄마들에게 강남 유명 학원 찾지 말라고 합니다. 변두리 동네, 소규모라도 내 아이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선생님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죠.”
학습한 것을 복습하며 자기 지식으로 만들라는 의미가 강한 숙제가 ‘전시성 결과’만 중요시하는 학원,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과 맞물려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숙제와 학업 성취도는 별개
학업 성적은 지능, 학습 태도, 가정환경, 학교환경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한 학기에서 몇 개 학년까지 앞서 선행학습을 하는 학원의 관행은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수업에 흥미를 잃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방학 중 특강은 6주나 8주 코스로 1학기, 혹은 1년 분량을 초고속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양이 더욱 많아져 숙제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한편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어린이들이 과도한 숙제로 취미, 스포츠, 가족 여가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숙제가 학습에 기여한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는데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숙제를 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두 권의 책도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숙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case="" against="" homework)="">의 공동 저자이자 변호사인 새러 베넷은 “자녀들의 방과 후 ‘끔찍한 스케줄’을 알고 책을 쓸 결심을 했다”며 “중학생인 아들이 내가 로스쿨 학생 때처럼 공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숙제로 꽉 찬 교육 시스템에 진저리가 나 숙제 없는 대안학교로 두 아이를 전학시켰다고 했다. <숙제 신화(the="" homework="" myth)="">의 저자인 앨피 콘 또한 지나친 숙제가 어린이들로부터 ‘배움에 대한 사랑’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심리적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마저 있다고 경고했다.
또 미국 듀크 대학 해리스 쿠퍼 교수는 “연구 결과 학업 성취도와 숙제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수십 차례 연구에서 중·고교에서 약간의 숙제는 시험 성적을 올려주었지만 중학생이 매일 60~90분, 고등학생이 2시간 이상 숙제할 경우 성적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너무 많은 숙제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요인’을 분석할 때 숙제를 넣지 않는 방향 또한 숙제와 성적 사이에 특별한 상관관계가 있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떠먹여주기보다 스스로 찾아 먹는 공부가 중요
학원 숙제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과목마다 수행평가로 숙제를 대신하는 학교 일선 교사들의 걱정도 간단치 않다. “수행평가는 집으로 가져가면 남이 도와줄 수도 있기 때문에 수업 과정에서 평가를 합니다. 당연히 수업 태도가 점수에 들어가는데도 학원에서 시달린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자고 있어요. 특히 시험을 앞두고는 학원에서 더 늦게 오니 수업 시간 대부분 비몽사몽이고 학교에 와서 공부할 엄두를 못 내는 거죠. 평가하는 선생인 내가 시험 문제를 내는데도 학원에만 의존하니 정말 답답해요.”
안천중학교 김정숙 교사(43·경기도 광명시)의 말에는 안타까움까지 묻어난다. 김 교사는 이어 “아이들은 학원 선생님을 더 무서워하고, 학부모 역시 학원을 더 중요시하지만 학원은 지식 전달 위주, 반복과 암기 위주의 수업 방식이기에 시험을 본 후 곧 잊어버려 자기 교양과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조언한다.
교육 전문가들 또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원리를 습득하지 않고 무조건 앞서 배우기만 해서는 학습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 지 오래다. 더구나 기초 학습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학원의 진도에만 맞추다보면 문제풀이 요령은 늘 수 있지만 원리를 응용한 문제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된다는 선배들의 경험담도 부지기수다.
강남구 개포동 개일초등학교 신명수 교장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학원 숙제를 많이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과중한 학원 숙제의 부담에서 풀어주는 길은 아이와 대화를 통해 꼭 필요한 학원만을 선택하고 집이나 독서실에서 자기 계획에 맞춰 주도적으로 공부하도록 격려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은실 작가는 학부모에게 당부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은 빼고 눈에 보이는 수업량과 숙제 양을 늘린다고 아이들이 소화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아이가 숙제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철저히 확인하며 한 군데를 보내더라도 적절한 학습량을 맞춰야만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잘못된 숙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손을 빨리 잡아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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