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미국이 전쟁물자로 필요로 하는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 강제징집된 5만5000명의 브라질 고무용사들.
살아남은 자들은 오늘날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도 브라질 정부도 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강제징집 이후 가족 다시 못 봐 = 1942년 어느날 아침 알시디노 도스 산토스는 어머니를 위해 시장에 야채를 사러갔다가 한 군인으로 부터 아마존 ‘고무용사’로 징집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당시 19세였던 산토스는 자신의 홀어머니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군인은 그가 매일 50센트의 일당을 받을 것이며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차표가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넘은 지금 고무용사로 징집된 그와 수백명의 다른 동료들은 아마존에서 이들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늙고 힘없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주변의 무관심에 맞서 싸우고 있다.
산토스는 “우리는 속았고 버려졌으며 그리고 잊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현재 아마존 서쪽 끝 아크리주의 허름한 나무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 브라질에 고무 요청 = 고무용사가 생겨났던 것은 미국과 브라질간에 체결한 조약 때문이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더이상 말레이시아로부터 고무를 조달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브라질에 천연고무 공급을 요청했다.
브라질 정부 자료에 따르면 5만5000명이 전쟁물자에 꼭 필요한 천연고무를 채취하기 위해 아마존으로 보내졌다.
역사학자들은 1945년 종전 전 이미 절반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존한 고무용사 루페르시오 프레이레 마이아(86)는“어떤 이들은 말라리아, 황열병, 각기병, 간염으로 사망했으며 다른 이들은 뱀이나 표범 등 야생동물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질병을 치료할 약도 없었다. 누군가 죽으면 오두막집 옆에 묻는 것이 끝이었다.
일은 힘들고 위험하며 건강에 위협적이었다. 사람들은 밤 0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정글 어둠속을 헤치고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을 도려내고 낮에 같은 곳으로와 용기에 흐른 고무액을 옮겨 모았다.
그런다음 흰 액체를 65kg 고무 공으로 만들기 위해 끓이는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독성 연기가 많이 노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시력을 헤치거나 잃었다.
◆“종전 소식도 몰랐다” =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더이상 브라질 고무에 관심이 없어졌다. 그러나 고무농장 주인들은 공짜 일손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했다.
문화유산보호정부재단의 소장인 마르코스 비니시우스 네베스 역사학자는 “이들은 종전 소식을 속였고 그 결과 수년 후까지 많은 고무용사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아마존 정글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후에도 임금을 받거나 캠프를 떠나기 어려웠다. 농장주들은 그사이 음식과 옷 도구들을 제공한데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아무런 돈도 돌아갈 교통수단도 없었던 이들은 결국 아마존에 눌러 않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계속해서 농장에서 일했다. 어떤 이들은 소작인이 됐다.
1988년에 들어서야 브라질은 고무용사들에게 법적 최저임금의 2배인 271유로(약 33만원)를 지급하는 새 헌법을 채택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증명서를 제시하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계약서가 비로 훼손 혹은 유실됐거나 농장주에게서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혜택도 참전군인들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프레이레 마이아는 “TV에서 독립일 기념식 유럽 참전용사들이 유니폼을 입고 행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슬픔과 혼란에 빠진다”며 “우리역시 참전한 용사였으며 고무와 고무용사들이 없었더라면 2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리포터 2ma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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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은 오늘날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도 브라질 정부도 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강제징집 이후 가족 다시 못 봐 = 1942년 어느날 아침 알시디노 도스 산토스는 어머니를 위해 시장에 야채를 사러갔다가 한 군인으로 부터 아마존 ‘고무용사’로 징집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당시 19세였던 산토스는 자신의 홀어머니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군인은 그가 매일 50센트의 일당을 받을 것이며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차표가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넘은 지금 고무용사로 징집된 그와 수백명의 다른 동료들은 아마존에서 이들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늙고 힘없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주변의 무관심에 맞서 싸우고 있다.
산토스는 “우리는 속았고 버려졌으며 그리고 잊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현재 아마존 서쪽 끝 아크리주의 허름한 나무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 브라질에 고무 요청 = 고무용사가 생겨났던 것은 미국과 브라질간에 체결한 조약 때문이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더이상 말레이시아로부터 고무를 조달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브라질에 천연고무 공급을 요청했다.
브라질 정부 자료에 따르면 5만5000명이 전쟁물자에 꼭 필요한 천연고무를 채취하기 위해 아마존으로 보내졌다.
역사학자들은 1945년 종전 전 이미 절반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존한 고무용사 루페르시오 프레이레 마이아(86)는“어떤 이들은 말라리아, 황열병, 각기병, 간염으로 사망했으며 다른 이들은 뱀이나 표범 등 야생동물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질병을 치료할 약도 없었다. 누군가 죽으면 오두막집 옆에 묻는 것이 끝이었다.
일은 힘들고 위험하며 건강에 위협적이었다. 사람들은 밤 0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정글 어둠속을 헤치고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을 도려내고 낮에 같은 곳으로와 용기에 흐른 고무액을 옮겨 모았다.
그런다음 흰 액체를 65kg 고무 공으로 만들기 위해 끓이는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독성 연기가 많이 노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시력을 헤치거나 잃었다.
◆“종전 소식도 몰랐다” =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더이상 브라질 고무에 관심이 없어졌다. 그러나 고무농장 주인들은 공짜 일손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했다.
문화유산보호정부재단의 소장인 마르코스 비니시우스 네베스 역사학자는 “이들은 종전 소식을 속였고 그 결과 수년 후까지 많은 고무용사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아마존 정글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후에도 임금을 받거나 캠프를 떠나기 어려웠다. 농장주들은 그사이 음식과 옷 도구들을 제공한데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아무런 돈도 돌아갈 교통수단도 없었던 이들은 결국 아마존에 눌러 않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계속해서 농장에서 일했다. 어떤 이들은 소작인이 됐다.
1988년에 들어서야 브라질은 고무용사들에게 법적 최저임금의 2배인 271유로(약 33만원)를 지급하는 새 헌법을 채택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증명서를 제시하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계약서가 비로 훼손 혹은 유실됐거나 농장주에게서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혜택도 참전군인들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프레이레 마이아는 “TV에서 독립일 기념식 유럽 참전용사들이 유니폼을 입고 행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슬픔과 혼란에 빠진다”며 “우리역시 참전한 용사였으며 고무와 고무용사들이 없었더라면 2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리포터 2ma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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