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이야기와 우리안의 가해성
2007년 정초부터 논란에 휩싸였던 ‘요코이야기’의 저자가 드디어 답변을 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자가 ‘가해자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그러나 그런 요구는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요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정책에 따랐다가 경험하게 된 국민들의 ‘수난’의 이야기이고 그 수난은 다름아닌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하나의 소설이 말할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수난의 주체는 ‘일본’인이기 이전에 여성과 아이들이었다.쫓겨 내려가던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여성들은 소련군에게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 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염병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먼저 죽어간 것도 여성과 아이들이었다.아수라장 속의 피난열차에서는 열차 밖으로 버려진 죽은 아기를 쫓아 몸을 던진 엄마도 있었고 이들은 곳곳에서 집단으로 구덩이에 파묻혀졌다. 젊은 여자들은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들을 피해 얼굴에 숯을 칠하고 머리를 밀어야 했는데 그 험한 수난의 길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어떻겐가 일본에 당도한 이후도, 아이들과 여자들에게는 고국은 아직 안식의 땅은 아니었다. 소련군과 조선인남성들에게 성폭행 당한 여성들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끔찍한 중절수술의 고통을 견뎌야 했고 제국주의의 상흔으로 남을 아이들의 존재를 불편해한 국가의 무의식이 시키는대로 죽어간 태아들은 지금도 일본 어딘가에 잠들고 있다.그리고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던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한 채 일본사회의 차가운 냉대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上坪隆『水子の譜 ドキュメント引き上げ孤児と女たち』). 해방 후 60년이,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세월이었던 것은 꼭 위안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그리고 피해자이면서도 ‘가해국의 일원’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위안부의 고통이 알려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수난을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그들의 수난은 제국주의지배 일익을 담당한 결과이기는 하다.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가해국 안의 피해자의 고통은 누가 말해야 하는 것일까.
식민지 시대,만주와 조선은 엘리트지배계층뿐 아니라 본토 일본에서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난한 농민들과 급변하는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자들이 흘러 들러간 곳이기도 했다. 국가가 권유하는 대로 ‘개척’이라는 꿈을 안고 새 삶을 찾아 만주를 찾아 떠났다고 한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그들이 꾼 꿈이 자신의 행위가 남의 땅을 빼앗는 일이라는 사실에 무감각했던 허황한 꿈이었다고 해도 그 꿈을 꾼 죄는 결코 그들 자신만의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의 죄값은 결국 국민들이 치르게 마련이어서 원폭과 무차별 공습 이외에도만주에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몇 년씩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만주에서 일하던 저자의 아버지가 시베리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런 상황 속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피난길을 도와준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난이 우리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는 일은 우리에게는 불편한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에 ‘강제징용’된 노무자들이 일본 땅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면 조선 땅 어딘가에 국가가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가 되고만 일본인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중요하다.그들의 죽음이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창설 되지 않은 인민군’에 대한 언급도 비난의 대상이지만 앞서의 자료는 당시 ‘가짜 민병대’가 있었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이런 부분은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일이지만,이번 사태의 문제는 보통소설이라면 문제시되지 않았을 부분조차도 ‘의도적 왜곡’으로 간주된 데에 있다.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가시 돋힌 불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우리는 좀 더 아는 일이 필요하다. 소모적인 규탄만이 계속되는 한 전쟁과 폭력의 복합적인 구조를 보는 일은 언제까지고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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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정초부터 논란에 휩싸였던 ‘요코이야기’의 저자가 드디어 답변을 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자가 ‘가해자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그러나 그런 요구는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요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정책에 따랐다가 경험하게 된 국민들의 ‘수난’의 이야기이고 그 수난은 다름아닌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하나의 소설이 말할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수난의 주체는 ‘일본’인이기 이전에 여성과 아이들이었다.쫓겨 내려가던 일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여성들은 소련군에게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 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염병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먼저 죽어간 것도 여성과 아이들이었다.아수라장 속의 피난열차에서는 열차 밖으로 버려진 죽은 아기를 쫓아 몸을 던진 엄마도 있었고 이들은 곳곳에서 집단으로 구덩이에 파묻혀졌다. 젊은 여자들은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들을 피해 얼굴에 숯을 칠하고 머리를 밀어야 했는데 그 험한 수난의 길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어떻겐가 일본에 당도한 이후도, 아이들과 여자들에게는 고국은 아직 안식의 땅은 아니었다. 소련군과 조선인남성들에게 성폭행 당한 여성들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끔찍한 중절수술의 고통을 견뎌야 했고 제국주의의 상흔으로 남을 아이들의 존재를 불편해한 국가의 무의식이 시키는대로 죽어간 태아들은 지금도 일본 어딘가에 잠들고 있다.그리고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던 버릇을 쉽게 고치지 못한 채 일본사회의 차가운 냉대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上坪隆『水子の譜 ドキュメント引き上げ孤児と女たち』). 해방 후 60년이,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세월이었던 것은 꼭 위안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그리고 피해자이면서도 ‘가해국의 일원’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위안부의 고통이 알려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수난을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그들의 수난은 제국주의지배 일익을 담당한 결과이기는 하다.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가해국 안의 피해자의 고통은 누가 말해야 하는 것일까.
식민지 시대,만주와 조선은 엘리트지배계층뿐 아니라 본토 일본에서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난한 농민들과 급변하는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자들이 흘러 들러간 곳이기도 했다. 국가가 권유하는 대로 ‘개척’이라는 꿈을 안고 새 삶을 찾아 만주를 찾아 떠났다고 한다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그들이 꾼 꿈이 자신의 행위가 남의 땅을 빼앗는 일이라는 사실에 무감각했던 허황한 꿈이었다고 해도 그 꿈을 꾼 죄는 결코 그들 자신만의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의 죄값은 결국 국민들이 치르게 마련이어서 원폭과 무차별 공습 이외에도만주에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몇 년씩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만주에서 일하던 저자의 아버지가 시베리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런 상황 속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피난길을 도와준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난이 우리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는 일은 우리에게는 불편한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에 ‘강제징용’된 노무자들이 일본 땅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면 조선 땅 어딘가에 국가가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가 되고만 일본인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중요하다.그들의 죽음이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창설 되지 않은 인민군’에 대한 언급도 비난의 대상이지만 앞서의 자료는 당시 ‘가짜 민병대’가 있었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이런 부분은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일이지만,이번 사태의 문제는 보통소설이라면 문제시되지 않았을 부분조차도 ‘의도적 왜곡’으로 간주된 데에 있다.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가시 돋힌 불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우리는 좀 더 아는 일이 필요하다. 소모적인 규탄만이 계속되는 한 전쟁과 폭력의 복합적인 구조를 보는 일은 언제까지고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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