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 박종철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면서 정국이 극도로 긴장돼 있던 상황에서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학원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교도 아닌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이례적인 것이어서 당시 커다란 파장을 미쳤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6월항쟁 앞서 고교생 1000여명 시위 = 1987년 3월 10일 경남 진주의 대아고등학교 3학년 박동주군을 비롯한 9명의 학생은 ‘학생회장 직선제’와 ‘보충수업비 횡령사건 해명’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2~3학년 학생 1000여명은 학내에서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에 모여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3시간여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날 시위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1차시위가 실패한 뒤 5일만에 전격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이날 시위학생들은 △학생회의 민주적 운영 △학생회장 직선제 쟁취 △학생회비 사용내역공개 △매점운영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조직화됐던 학생회와 만연한 사학비리에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시위를 주도했던 박동주씨는 “당시 학생들은 수천만원에 달하는 보충수업비 사용처 의혹 등 누적된 사학재단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었다”며 “몇몇의 학생이 주동이 돼 시위를 벌인 것이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대학생한테도 영향끼쳐 = 이날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에 놀란 학교측은 시위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집회를 해산한 이후 주동자 9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학교도 신속하게 이들에 대한 징계를 내렸다.
이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1박 2일 동안 배후조직을 대라는 경찰의 취조에 시달렸다.
이후 학부모들의 각서를 받고서야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들은 2명이 제적되고 7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7명의 중징계를 당한 학생들은 이후 학교를 스스로 그만뒀다.
진주 대아고 학생들의 시위소식은 당시 전국의 대학가 대자보를 통해 확산됐다. 학내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그해 6월항쟁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생들과 함께 대아고 학생 수백명은 진주시내에서 열린 각종시위에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6월20일쯤 있었던 서울~순천간 비둘기호 열차를 세우는 투쟁에도 대학생들을 도와 함께했다.
박영주씨는 “당시 대아고의 학원민주화 운동은 전국에서 처음 일어났고 치밀하게 준비한 귀중한 사례”라며 “넓은 의미에서 진주지역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부당한 학사징계 명예회복 요구” =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신동열(38)씨는 “사회전반에서 민주화 요구가 표출되는 시기에 고등학교에서 민주화요구가 직접 시위형태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며 “일회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1년여전부터 역사와 사회를 고민하던 친구들의 모임이 결행한 조직적 학내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신씨는 또 “당시 학교와 경찰은 대학생 등이 사주하고 배후에 간첩이 있다고 모략했다”면서 “부당하게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비록 제적당하거나 자진퇴학 등의 형식으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다음해 직선제 학생회가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울러 이 사건이후 학교의 운영이 많이 투명해졌다.
진주 원종태 기자 jtw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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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도 아닌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이례적인 것이어서 당시 커다란 파장을 미쳤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6월항쟁 앞서 고교생 1000여명 시위 = 1987년 3월 10일 경남 진주의 대아고등학교 3학년 박동주군을 비롯한 9명의 학생은 ‘학생회장 직선제’와 ‘보충수업비 횡령사건 해명’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2~3학년 학생 1000여명은 학내에서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에 모여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3시간여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날 시위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1차시위가 실패한 뒤 5일만에 전격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이날 시위학생들은 △학생회의 민주적 운영 △학생회장 직선제 쟁취 △학생회비 사용내역공개 △매점운영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조직화됐던 학생회와 만연한 사학비리에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시위를 주도했던 박동주씨는 “당시 학생들은 수천만원에 달하는 보충수업비 사용처 의혹 등 누적된 사학재단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었다”며 “몇몇의 학생이 주동이 돼 시위를 벌인 것이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대학생한테도 영향끼쳐 = 이날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에 놀란 학교측은 시위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집회를 해산한 이후 주동자 9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학교도 신속하게 이들에 대한 징계를 내렸다.
이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1박 2일 동안 배후조직을 대라는 경찰의 취조에 시달렸다.
이후 학부모들의 각서를 받고서야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들은 2명이 제적되고 7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7명의 중징계를 당한 학생들은 이후 학교를 스스로 그만뒀다.
진주 대아고 학생들의 시위소식은 당시 전국의 대학가 대자보를 통해 확산됐다. 학내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그해 6월항쟁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생들과 함께 대아고 학생 수백명은 진주시내에서 열린 각종시위에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6월20일쯤 있었던 서울~순천간 비둘기호 열차를 세우는 투쟁에도 대학생들을 도와 함께했다.
박영주씨는 “당시 대아고의 학원민주화 운동은 전국에서 처음 일어났고 치밀하게 준비한 귀중한 사례”라며 “넓은 의미에서 진주지역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부당한 학사징계 명예회복 요구” =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신동열(38)씨는 “사회전반에서 민주화 요구가 표출되는 시기에 고등학교에서 민주화요구가 직접 시위형태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며 “일회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1년여전부터 역사와 사회를 고민하던 친구들의 모임이 결행한 조직적 학내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신씨는 또 “당시 학교와 경찰은 대학생 등이 사주하고 배후에 간첩이 있다고 모략했다”면서 “부당하게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비록 제적당하거나 자진퇴학 등의 형식으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다음해 직선제 학생회가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울러 이 사건이후 학교의 운영이 많이 투명해졌다.
진주 원종태 기자 jtw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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