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은 당시 청년층에게 강렬한 기억이다. 표적집단심층좌담(FGD)에 참여한 6명의 수도권 40대 화이트칼라들은 당시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20년이 지났어도그 느낌은 기억하고 있었다.
87년 얘기를 꺼내자 “전두환 대통령이 ‘본인은…’하면서 TV에 생중계됐어요” “그거 끝나자 전국이 벌떼처럼 일어났었죠” “시청이 꽉 찼었죠” “서울역 앞에 엄청난 군중들” 등 봇물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이 세대들이 서로간의 동질감을 확인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문신’으로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방황” = FGD 참석자들은 20년 전인 87년 6월을 다양한 입장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맞이했다. 대학생, 군인, 제대후 직장을 가지기 전, 또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6월을 맞이했다. 당시 청년층의 스펙트럼이 드러났다. 일부는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군부독재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한 경우도 있었다.
교육직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기환씨는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최루탄엔 맞아봤다. 박씨는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역시 직장인이었던 박준영씨는 “기성세대가 못하는 걸 젊은 세대가 해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정경식씨는 당시 군대에서 진압군 훈련을 받으면서 시위대 안에 북한의 불순분자가 섞여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경우다.
중소기업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장선중씨는 불어나는 시위대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군대 막 제대하고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저걸(데모) 해야 되나,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참 개인적으로 방황한 그런 시기를 보낸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땐 불안했지만 지금은 사회 변화” =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6월 항쟁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자유, 인권, 민주화 등 사회적으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때는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 있었나 참 놀랍다”(박기환)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로서는 민주화 등이 만개한 것에 비해 경제 등 기대에 미흡한 부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준영씨는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났다”면서 “자기 주장을 해야 되는 건 맞는데 아직 우리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는 상황인데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속도조절’이 안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최민영씨는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는데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20년전 6월항쟁, 10년전 IMF, 다음엔 무엇? = 이들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된 것은 현재의 어려움도 있지만 대부분 첫 아이를 막 낳았거나 이제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는 때 겪은 97년 IMF외환위기의 경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큰애가 97년 12월생인데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냐. 그때 마트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난다”(배성규) “직장이 과연 살아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하면서 직장을 다녔다”(박준영) 등의 발언은 이들이 그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준다. 배씨는 “6월은 정신이고, IMF는 우리에게 닥치는 의식주”라고 정리했다.
20년 전에 민주화를 이뤄낸 이들 세대는 10년 전엔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시점의 고통을 공유했다. 이제 이들은 그 다음은 무엇이 와야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6월항쟁 당시 본인 상황과 평가
장선중(44)
군대를 막 제대하고 부산 동아대 근처 그 쪽에서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툭하면 학교 근처에 최루탄 가스들이 회사 공장에도 막 날라오고… 막연히 간첩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고, 저 학생들이 진짜 옳은 것인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87년도는 개인적으로 혼란을 느꼈다고 하지만 뭐 제가 영향을 받고 그런 건 사실 없었죠. 정치 하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이나 저쪽 부류의 일들이다 이렇게 하고 나는 내가 할 일 열심히 하면 된다 이랬는데, MF라는 것은 그야 말로 피부로 확 와 닿는 그런 시기였거든요. 봉급이 제 때 안 나오고 소비도 줄여야 되고 우리 거래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부도나서 문 닫는 일이 속출하고 그랬죠.
박기환(48)
한번은 청계천 쪽에 저녁에 술 취해 가지고 데모 피해 간다고 골목으로 가다 보는데 제 뒷머리를 딱 쏘대요. 지금도 흉터가 있어요. 뒷머리에. 제가 살아있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빨리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은 간절히 했죠.
6월 항쟁 그때 막 전국적으로 데모하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과연 솔직히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하고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걸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다 변화 돼 가지고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가 있었나 그게 참 놀랍고 그래요. 어쨌든 질서가 지금 제대로 장착이 됐냐는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로써는 그 과정에서 부지런히 지금 기반을 닦아 나가면서 전진하고 있다. 경제든, 사회 문화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준영(46)
그 당시에 학생들은 전면에 나서고 우리는 뒤에서 도로에서 응원하고 뭐 담배 갖다 주고 이런 것… 그때 생각하면 학생들이 기성세대가 못하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해준다.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 났었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근로자들이 이렇게 하려고 그래도 사실 못했던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 이후부터는 근로자들의 자기가 위상이랄까 입지를 많이 올릴 수 있는 것은 됐지만은 사실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IMF 때) 직장이 과연 살아 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를 하면서 직장을 다녔어요.
정경식(40)
제가 87년 7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그때 어땠냐면은 여기에 빨갱이가 있다. 얘네들을 속출해 내야 된다. 중대에서 사격술이 좋은 사람들을 가져다가 저격수가 있었죠. 각 중대마다 5명의 저격수가 있었어요.
사실 87년에 그렇게 이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다음 88올림픽인데. 올림픽이라는 것은 사실 세계적인 경기잖아요. 파티인데. 그런데 이걸 갔다가 치루기 위해서는 진짜 나라가 그렇게 혼란스러우면 치룰 수가 없잖아요. 뭔가 현실적으로 이 안 그러게끔 강압으로 누르던지, 뭔가 방법을 써야 됐을 때에요.
배성규(43)
당시엔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게 없었죠. 거의 안 보고 리포트로 대체하고 그랬었는데… 저희는 그렇게 심하게 하는 학과는 아닌데 초반기에 (학생들이) 잡혀가고 이러다 보니까 어수선하더라고요. 그 당시에 운동권이라든가 뭐 저기 국회의원 몇 명 가 있죠 지금. 지금 보면 참 아쉬운 게 그 당시에 그렇게까지 한 사람들이 실제 해보니까 또 그렇지 않거든요.
6.29라는 자체는 우리가 말하는 정신이죠. 정신. 인권 그것 때문에 하는 거고, IMF 실제 우리가 닥치는 의식주죠. 먹고 사는 게 걱정이 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저희 큰 애 97년 12월 생인데 그때 회사가 거의 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느날 갑자기 안 나오게 되면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에요. 그때 마트에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나요. 카드 갔다가 밀리면 안 되니까. 그런 어려운 생각이 나네요.
최민영(40)
아르바이트로 DJ했었습니다. 대학 앞에서. 저는 뭐 데모 같은데 끼어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았습니다.
사실 이게 더 와 닿다, 저게 더 와 닿다 그런 건 없고요. 별로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저는 IMF 터질 때는 공무원 이었거든요. 지금도 보면은 이제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지만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게 뭐 비슷비슷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 이름은 모두 가명임
이 여론조사는
20년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4054세대의 정치적 인식을 알아보기 위한 이번 여론조사는 2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 정량조사(Quanti-tative Research)는 수도권(서울 성남 부천 안양 용인 광명 시흥 군포 하남 의왕 과천 고양 의정부 구리)에 거주하는 해당세대 유권자 700명을 대상으로 했다.
먼저 4054세대로 연령대를 잡은 이유는 당시 6월항쟁의 주역들이 20~34세의 학생·직장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지역적으로 수도권, 엄밀하게 말하면 서울과 인근도시로 한 이유는 이 지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이라는 점이 우선 고려됐다. 여기에 내일신문이 그동안 이 지역을 중심으로 몇 차례 조사를 했기 때문에 기존의 데이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참조했다.
이 조사는 5월 30~31일 양일간 이뤄졌다. 표본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 ±3.7%P이다. 이 조사결과는 4~5일 이틀간 연재됐다.
2단계 정성조사(Qualitative Research)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40대 남성 화이트칼라 집단을 집단 심층토의(FGD:Focus Group Discussion) 방식으로 조사했다. 모두 6명이 참석한 FGD 조사는 6월1일 이뤄졌다. 이 조사결과는 7~8일 이틀간 연재된다.
이 조사 전체는 내일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디오피니언에 의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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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얘기를 꺼내자 “전두환 대통령이 ‘본인은…’하면서 TV에 생중계됐어요” “그거 끝나자 전국이 벌떼처럼 일어났었죠” “시청이 꽉 찼었죠” “서울역 앞에 엄청난 군중들” 등 봇물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이 세대들이 서로간의 동질감을 확인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문신’으로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방황” = FGD 참석자들은 20년 전인 87년 6월을 다양한 입장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맞이했다. 대학생, 군인, 제대후 직장을 가지기 전, 또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6월을 맞이했다. 당시 청년층의 스펙트럼이 드러났다. 일부는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군부독재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한 경우도 있었다.
교육직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기환씨는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최루탄엔 맞아봤다. 박씨는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역시 직장인이었던 박준영씨는 “기성세대가 못하는 걸 젊은 세대가 해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정경식씨는 당시 군대에서 진압군 훈련을 받으면서 시위대 안에 북한의 불순분자가 섞여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경우다.
중소기업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장선중씨는 불어나는 시위대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군대 막 제대하고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저걸(데모) 해야 되나,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참 개인적으로 방황한 그런 시기를 보낸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땐 불안했지만 지금은 사회 변화” =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6월 항쟁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자유, 인권, 민주화 등 사회적으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때는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 있었나 참 놀랍다”(박기환)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로서는 민주화 등이 만개한 것에 비해 경제 등 기대에 미흡한 부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준영씨는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났다”면서 “자기 주장을 해야 되는 건 맞는데 아직 우리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는 상황인데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속도조절’이 안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최민영씨는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는데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20년전 6월항쟁, 10년전 IMF, 다음엔 무엇? = 이들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된 것은 현재의 어려움도 있지만 대부분 첫 아이를 막 낳았거나 이제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는 때 겪은 97년 IMF외환위기의 경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큰애가 97년 12월생인데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냐. 그때 마트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난다”(배성규) “직장이 과연 살아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하면서 직장을 다녔다”(박준영) 등의 발언은 이들이 그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준다. 배씨는 “6월은 정신이고, IMF는 우리에게 닥치는 의식주”라고 정리했다.
20년 전에 민주화를 이뤄낸 이들 세대는 10년 전엔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시점의 고통을 공유했다. 이제 이들은 그 다음은 무엇이 와야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6월항쟁 당시 본인 상황과 평가
장선중(44)
군대를 막 제대하고 부산 동아대 근처 그 쪽에서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툭하면 학교 근처에 최루탄 가스들이 회사 공장에도 막 날라오고… 막연히 간첩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고, 저 학생들이 진짜 옳은 것인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87년도는 개인적으로 혼란을 느꼈다고 하지만 뭐 제가 영향을 받고 그런 건 사실 없었죠. 정치 하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이나 저쪽 부류의 일들이다 이렇게 하고 나는 내가 할 일 열심히 하면 된다 이랬는데, MF라는 것은 그야 말로 피부로 확 와 닿는 그런 시기였거든요. 봉급이 제 때 안 나오고 소비도 줄여야 되고 우리 거래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부도나서 문 닫는 일이 속출하고 그랬죠.
박기환(48)
한번은 청계천 쪽에 저녁에 술 취해 가지고 데모 피해 간다고 골목으로 가다 보는데 제 뒷머리를 딱 쏘대요. 지금도 흉터가 있어요. 뒷머리에. 제가 살아있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빨리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은 간절히 했죠.
6월 항쟁 그때 막 전국적으로 데모하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과연 솔직히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하고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걸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다 변화 돼 가지고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가 있었나 그게 참 놀랍고 그래요. 어쨌든 질서가 지금 제대로 장착이 됐냐는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로써는 그 과정에서 부지런히 지금 기반을 닦아 나가면서 전진하고 있다. 경제든, 사회 문화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준영(46)
그 당시에 학생들은 전면에 나서고 우리는 뒤에서 도로에서 응원하고 뭐 담배 갖다 주고 이런 것… 그때 생각하면 학생들이 기성세대가 못하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해준다.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 났었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근로자들이 이렇게 하려고 그래도 사실 못했던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 이후부터는 근로자들의 자기가 위상이랄까 입지를 많이 올릴 수 있는 것은 됐지만은 사실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IMF 때) 직장이 과연 살아 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를 하면서 직장을 다녔어요.
정경식(40)
제가 87년 7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그때 어땠냐면은 여기에 빨갱이가 있다. 얘네들을 속출해 내야 된다. 중대에서 사격술이 좋은 사람들을 가져다가 저격수가 있었죠. 각 중대마다 5명의 저격수가 있었어요.
사실 87년에 그렇게 이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다음 88올림픽인데. 올림픽이라는 것은 사실 세계적인 경기잖아요. 파티인데. 그런데 이걸 갔다가 치루기 위해서는 진짜 나라가 그렇게 혼란스러우면 치룰 수가 없잖아요. 뭔가 현실적으로 이 안 그러게끔 강압으로 누르던지, 뭔가 방법을 써야 됐을 때에요.
배성규(43)
당시엔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게 없었죠. 거의 안 보고 리포트로 대체하고 그랬었는데… 저희는 그렇게 심하게 하는 학과는 아닌데 초반기에 (학생들이) 잡혀가고 이러다 보니까 어수선하더라고요. 그 당시에 운동권이라든가 뭐 저기 국회의원 몇 명 가 있죠 지금. 지금 보면 참 아쉬운 게 그 당시에 그렇게까지 한 사람들이 실제 해보니까 또 그렇지 않거든요.
6.29라는 자체는 우리가 말하는 정신이죠. 정신. 인권 그것 때문에 하는 거고, IMF 실제 우리가 닥치는 의식주죠. 먹고 사는 게 걱정이 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저희 큰 애 97년 12월 생인데 그때 회사가 거의 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느날 갑자기 안 나오게 되면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에요. 그때 마트에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나요. 카드 갔다가 밀리면 안 되니까. 그런 어려운 생각이 나네요.
최민영(40)
아르바이트로 DJ했었습니다. 대학 앞에서. 저는 뭐 데모 같은데 끼어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았습니다.
사실 이게 더 와 닿다, 저게 더 와 닿다 그런 건 없고요. 별로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저는 IMF 터질 때는 공무원 이었거든요. 지금도 보면은 이제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지만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게 뭐 비슷비슷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 이름은 모두 가명임
이 여론조사는
20년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4054세대의 정치적 인식을 알아보기 위한 이번 여론조사는 2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 정량조사(Quanti-tative Research)는 수도권(서울 성남 부천 안양 용인 광명 시흥 군포 하남 의왕 과천 고양 의정부 구리)에 거주하는 해당세대 유권자 700명을 대상으로 했다.
먼저 4054세대로 연령대를 잡은 이유는 당시 6월항쟁의 주역들이 20~34세의 학생·직장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지역적으로 수도권, 엄밀하게 말하면 서울과 인근도시로 한 이유는 이 지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이라는 점이 우선 고려됐다. 여기에 내일신문이 그동안 이 지역을 중심으로 몇 차례 조사를 했기 때문에 기존의 데이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참조했다.
이 조사는 5월 30~31일 양일간 이뤄졌다. 표본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 ±3.7%P이다. 이 조사결과는 4~5일 이틀간 연재됐다.
2단계 정성조사(Qualitative Research)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40대 남성 화이트칼라 집단을 집단 심층토의(FGD:Focus Group Discussion) 방식으로 조사했다. 모두 6명이 참석한 FGD 조사는 6월1일 이뤄졌다. 이 조사결과는 7~8일 이틀간 연재된다.
이 조사 전체는 내일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디오피니언에 의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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