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들꽃은 아름다웠다
[6월 항쟁 그후 20년]6월을 일군 사람들 ⑧ 학생 60% 이상 참여한 총회의 주역들 박대승·김종삼씨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지역내일
2007-06-20
임각철(43) 공무원
군에서 제대한 후 대전 한남대학교 2학년에 복학했다. 4월 사법시험 1차 시험을 치렀는데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진 후 적극 참여했다. 수 많은 학생들이 집결할 때 시대가 변한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 뿌듯했다.
이순모(39) 사업
대전 목원대학교 1학년이었다.
3월부터 한원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6월에는 수천명이 대전시내로 몰려나갔다. 충남대 등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내에는 매일 5만명이 모였다.
정 일(42) 공무원
86년까지는 부산외대학교에서 집회를 할 때 두려움이 있었다. 학생들도 많이 모이지 않았다. 87년 6월엔 대부분 학생들이 다 참여했다. 총회를 통해 압도적인 다수가 모이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두려움도 사라졌다.
박종희(41) 회사원
경희대학교 본관 앞에 대형태극기가 걸려있고 매일 학생총회가 열렸다.
과총회와 단대총회를 거쳐 스크럼을 짜고 본관 앞으로 향할 때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 폴짝폴짝 뛰면서 봐도 끝이 없었다.
정승호(40) 회사원
신입생이었다. 부산외대 독일어과였는데 150명 정원에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총회에 참여했다. 학교 집회는 빨리 마치고 다들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서 경찰들이 막으면 보도블럭을 깨서 던지기도 했다.
서울지역 주요대학 ‘서대협’ 구성 대중노선 구사
일반학생들 대거 참여해 “호헌철폐” “독재타도”
87년 6월항쟁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대해 학생과 시민이 분노하면서 촉발됐지만 대규모 항쟁을 가능하게 한 조직적인 힘이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지역의 주요 대학교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해 대중노선을 구사했다. 감옥을 갈 각오를 한 소수의 학생운동권에 의한 운동을 일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시도였다.
주요 집회가 열리는 날은 어김없이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과총회 단대총회를 조직했다. 수업에 빠지기 일쑤이던 학생회간부들이 수업에 참석하고 과총회를 주도했다. 일반 학생들도 토론에 참석하고 정치집회를 위해 왜 수업을 거부해야 하는지 토론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수업과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다 함께 가두시위에 참석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 시립대 경희대 중앙대 등 서울지역 대부분 대학교에서 벌어진 이 현상은 역사를 바꿨다. 대규모 집회시위가 적었던 지역대학교들도 항쟁의 기운이 확산되면서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슬기로움 그대로 반영 = 이런 상황은 지방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87년 6월 10일 경북 경산에 있는 영남대학교 학생 1만여명이 20km를 걸어서 대구시내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 규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참여했다. 세 시간 넘게 논두렁을 지나 산을 넘어서 걸어온 길이었다. 대구 경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날 집회는 학생총회를 통해 이뤄졌다.
영남대는 87년 총학생회장을 직선으로 뽑았다. 영남대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직선으로 뽑힌 학생회장과 간부들이 4월 구속됐다. 학생들은 “우리가 뽑은 학생회장을 돌려달라”며 과별로 단대별로 총회를 열고 구속학생들을 석방할 때까지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 흐름은 6월항쟁에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박대승(44·시민단체·왼쪽 사진)씨도 과총회에 참석했다. 박씨는 “군에서 학생들이 좌경화돼 있고 데모하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복학해보니 수 천명의 학생들이 매일 데모를 하고 있었다”며 “대자보 등을 보면서 광주학살에 대해 알게 되고 새로운 환경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 언론이 통제돼 있던 상황이라 대자보가 한 장 붙으면 수 백명의 학생들이 몰려가 그것을 봤다”고 기억했다. 총회가 열리면 그는 적극 발언했다. 전투경찰로 군을 제대한 예비역 학생의 발언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과별 단대별 장기 드러나 = 부산대학교도 87년 6월항쟁 전 이미 들끓고 있었다. 1만 5000여명의 학생 중 1만여명이 참여하는 집회가 연일 열렸다.
“대학신문을 학생기자 중심으로 운영하자”, “실험복을 넣어둘 사물함을 만들어 달라”며 시작한 학내 민주화운동에 절대 다수 학생들이 참여했다. 4월 말 대학총장은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힘은 6월항쟁에 그대로 이어졌다. 철학과 경제학과 등에서 “우리도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운동에 동참하자”며 총학생회에 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총학생회가 총회를 소집하자 바로 5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섰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종삼(43·한의사·오른쪽 사진)씨는 학생총회가 당시 대학과 사회를 바꾼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86년 말 새로운 학생회가 구성된 후 학생복지와 학생자치신문(학보)문제를 제기했는데 처음엔 학우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87년 3월 개학 후 학생총회가 열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 공사장에서 손수레에 마이크를 매달고 학교를 돌며 홍보활동을 했다. 이들은 또 단식농성도 벌였다. 이에 인문대 철학과와 상대 경제학과에서 총회를 열고 “단식학생을 구하자”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자”며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동아리 단대 총학 등의 간부들이 모두 과총회에 참석했다”며 “왜 학내민주화운동을 하는지 총회에서 직접 설명하고 토론했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호응했다. 공대 학생회는 총회를 통해 단식농성장에 차양막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단식농성하는 학생들에게 퇴약볕을 막아주자는 마음이었다. 인문대는 총회를 통해 시험을 거부하고 책·걸상을 모두 강의실 밖에 들어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비가 오면 책·걸상이 젖으니 비닐을 사와 덮자고 제안했고 총회에서 통과됐다. 김씨는 “과학생회 단대학생회가 스스로 고민하다 보니 다양한 방안이 나왔다”며 “총학생회에서 기획했다면 나올 수 없는 지혜였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총회는 거리시위 전술도 쪽지에 적어 공개했지만 오히려 경찰에 누출되지 않았다”며 “86년까지는 비밀리에 시위약속을 해도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집회를 봉쇄하곤 하던 것과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87년 6월항쟁은 이들의 삶도 바꾸었다. 예비역 복학생이던 박씨는 6월항쟁을 거치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고 89년 ‘임수경 방북 배후조종 및 각종 집회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박씨는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민주동문회 활동을 했고 지금은 대구경북지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공학과 학생이던 김씨는 졸업 후 취업을 위한 학교추천서를 받지 않았다. ‘총학생회장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받을 수 없다는 게 6월항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그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작은 금형회사에서 주임으로 일하다 한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김씨는 환자들에게 좋은 의료서비스를 하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6월정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 정연근 문진헌 김은광 윤여운 백만호 원종태 방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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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제대한 후 대전 한남대학교 2학년에 복학했다. 4월 사법시험 1차 시험을 치렀는데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진 후 적극 참여했다. 수 많은 학생들이 집결할 때 시대가 변한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 뿌듯했다.
이순모(39) 사업
대전 목원대학교 1학년이었다.
3월부터 한원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6월에는 수천명이 대전시내로 몰려나갔다. 충남대 등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내에는 매일 5만명이 모였다.
정 일(42) 공무원
86년까지는 부산외대학교에서 집회를 할 때 두려움이 있었다. 학생들도 많이 모이지 않았다. 87년 6월엔 대부분 학생들이 다 참여했다. 총회를 통해 압도적인 다수가 모이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두려움도 사라졌다.
박종희(41) 회사원
경희대학교 본관 앞에 대형태극기가 걸려있고 매일 학생총회가 열렸다.
과총회와 단대총회를 거쳐 스크럼을 짜고 본관 앞으로 향할 때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 폴짝폴짝 뛰면서 봐도 끝이 없었다.
정승호(40) 회사원
신입생이었다. 부산외대 독일어과였는데 150명 정원에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총회에 참여했다. 학교 집회는 빨리 마치고 다들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서 경찰들이 막으면 보도블럭을 깨서 던지기도 했다.
서울지역 주요대학 ‘서대협’ 구성 대중노선 구사
일반학생들 대거 참여해 “호헌철폐” “독재타도”
87년 6월항쟁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대해 학생과 시민이 분노하면서 촉발됐지만 대규모 항쟁을 가능하게 한 조직적인 힘이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울지역의 주요 대학교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해 대중노선을 구사했다. 감옥을 갈 각오를 한 소수의 학생운동권에 의한 운동을 일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시도였다.
주요 집회가 열리는 날은 어김없이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과총회 단대총회를 조직했다. 수업에 빠지기 일쑤이던 학생회간부들이 수업에 참석하고 과총회를 주도했다. 일반 학생들도 토론에 참석하고 정치집회를 위해 왜 수업을 거부해야 하는지 토론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수업과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다 함께 가두시위에 참석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한양대 시립대 경희대 중앙대 등 서울지역 대부분 대학교에서 벌어진 이 현상은 역사를 바꿨다. 대규모 집회시위가 적었던 지역대학교들도 항쟁의 기운이 확산되면서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슬기로움 그대로 반영 = 이런 상황은 지방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87년 6월 10일 경북 경산에 있는 영남대학교 학생 1만여명이 20km를 걸어서 대구시내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 규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참여했다. 세 시간 넘게 논두렁을 지나 산을 넘어서 걸어온 길이었다. 대구 경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날 집회는 학생총회를 통해 이뤄졌다.
영남대는 87년 총학생회장을 직선으로 뽑았다. 영남대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직선으로 뽑힌 학생회장과 간부들이 4월 구속됐다. 학생들은 “우리가 뽑은 학생회장을 돌려달라”며 과별로 단대별로 총회를 열고 구속학생들을 석방할 때까지 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 흐름은 6월항쟁에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박대승(44·시민단체·왼쪽 사진)씨도 과총회에 참석했다. 박씨는 “군에서 학생들이 좌경화돼 있고 데모하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복학해보니 수 천명의 학생들이 매일 데모를 하고 있었다”며 “대자보 등을 보면서 광주학살에 대해 알게 되고 새로운 환경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 언론이 통제돼 있던 상황이라 대자보가 한 장 붙으면 수 백명의 학생들이 몰려가 그것을 봤다”고 기억했다. 총회가 열리면 그는 적극 발언했다. 전투경찰로 군을 제대한 예비역 학생의 발언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호응했다.
◆과별 단대별 장기 드러나 = 부산대학교도 87년 6월항쟁 전 이미 들끓고 있었다. 1만 5000여명의 학생 중 1만여명이 참여하는 집회가 연일 열렸다.
“대학신문을 학생기자 중심으로 운영하자”, “실험복을 넣어둘 사물함을 만들어 달라”며 시작한 학내 민주화운동에 절대 다수 학생들이 참여했다. 4월 말 대학총장은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힘은 6월항쟁에 그대로 이어졌다. 철학과 경제학과 등에서 “우리도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운동에 동참하자”며 총학생회에 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총학생회가 총회를 소집하자 바로 5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거리로 나섰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종삼(43·한의사·오른쪽 사진)씨는 학생총회가 당시 대학과 사회를 바꾼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86년 말 새로운 학생회가 구성된 후 학생복지와 학생자치신문(학보)문제를 제기했는데 처음엔 학우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87년 3월 개학 후 학생총회가 열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 공사장에서 손수레에 마이크를 매달고 학교를 돌며 홍보활동을 했다. 이들은 또 단식농성도 벌였다. 이에 인문대 철학과와 상대 경제학과에서 총회를 열고 “단식학생을 구하자”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자”며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동아리 단대 총학 등의 간부들이 모두 과총회에 참석했다”며 “왜 학내민주화운동을 하는지 총회에서 직접 설명하고 토론했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호응했다. 공대 학생회는 총회를 통해 단식농성장에 차양막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단식농성하는 학생들에게 퇴약볕을 막아주자는 마음이었다. 인문대는 총회를 통해 시험을 거부하고 책·걸상을 모두 강의실 밖에 들어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비가 오면 책·걸상이 젖으니 비닐을 사와 덮자고 제안했고 총회에서 통과됐다. 김씨는 “과학생회 단대학생회가 스스로 고민하다 보니 다양한 방안이 나왔다”며 “총학생회에서 기획했다면 나올 수 없는 지혜였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총회는 거리시위 전술도 쪽지에 적어 공개했지만 오히려 경찰에 누출되지 않았다”며 “86년까지는 비밀리에 시위약속을 해도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집회를 봉쇄하곤 하던 것과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87년 6월항쟁은 이들의 삶도 바꾸었다. 예비역 복학생이던 박씨는 6월항쟁을 거치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됐고 89년 ‘임수경 방북 배후조종 및 각종 집회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박씨는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민주동문회 활동을 했고 지금은 대구경북지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공학과 학생이던 김씨는 졸업 후 취업을 위한 학교추천서를 받지 않았다. ‘총학생회장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받을 수 없다는 게 6월항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그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작은 금형회사에서 주임으로 일하다 한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김씨는 환자들에게 좋은 의료서비스를 하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6월정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 정연근 문진헌 김은광 윤여운 백만호 원종태 방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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