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7~8월 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머리를 강제로 깍지 말라’ ‘식당에 선풍기를 달아 달라’ ‘화장실 문을 달아 달라’ ‘욕을 하지 마라’ ‘때리지 말라’ ‘식당밥을 개선하라’ ‘안전화를 지급하라’ ‘임금을 인상하라’ ‘노조를 인정하라’ ‘법정공휴일을 유급으로 하라’ ‘상여금 차등지급을 금지하라’ 등 100여 가지의 요구를 제시했다 .
울산의 경우 현대그룹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해 투쟁하면서 ‘재벌타도’의 구호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 정문에는 경비들이 안전모와 군화를 착용하고 헌병처럼 서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용모를 검사했다. 머리가 길면 그 자리에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지각하면 군대처럼 벌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결혼해 자식을 낳은 아버지였던 노동자들의 치욕감과 분노는 심각했다.
식당도 이른바 ‘함바집’으로 더위에는 밥을 물에 말아 속으로 밀어 넘기고는 식당 밖으로 뛰쳐나와야 했다.
그나마 식당도 생산직과 사무직들이 나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이 없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작업장에서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감독자들의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반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20대 젊은 관리직들이 40대 가장들에게 반말하고 욕하는 광경이 다반사였다.
당시 월 근로시간은 기본 240시간에 오버타임이 150~200시간이었다. 이 경우 임금은 대기업이 20만~30만원이었고 대부분 노동자들은 10만원대였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는 8만원 정도 받았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노조를 결성하면서 내건 요구조건을 보면 △안전 재해자에 대한 목욕탕, 이발소 운영권 인계 △ 안전 재해자 평생 생활대책 보장
△ 출근시간 아침8시로 실시(춘하추동) △식사 처우 개선 △ 작업 전 체조, 작업시간 인정 및 중식시간 체조 1시에 실시 △ 훈련소 출신과 공채 입사자의 임금 격차 해소 △두발 자율화 △3박 4일 하기휴가 유급·소급실시 △임금인상 25% △상여금차등제 폐지 등이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강경흠 정재철 윤여운 송진휴 기자
생산현장에서 울려퍼진 ‘늙은 노동자의 노래’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 “야! 야! 야야야야! 꽃 바구니 옆에 끼고 ~~” 늙은 노동자의 노래와 아리랑 목동이 울려 퍼지면 어김없이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간간이 노래가 끈기면 애국가도 단골 매뉴였다.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10Km가 넘는 거리를 행진하며 몇 번을 불러도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현대정공 양규석(47)씨는 “당시 노동자의 신세가 늙은 군인과 같았고 대부분 군을 제대한 사람들이라 인기있었던 같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노조 설립의 산증인인 이상범(49)씨는 “조합원 어깨에 무등을 타고 ‘어용노조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전 공장을 순회하던 중 갑자기 마른 하늘에 장대비를 보면서 ‘과연 조합원들이 모일까’ 걱정했지만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구름같이 몰려드는 조합원들을 보며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들리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정말 심장을 멎게 했다.” 이씨의 당시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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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경우 현대그룹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해 투쟁하면서 ‘재벌타도’의 구호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 정문에는 경비들이 안전모와 군화를 착용하고 헌병처럼 서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용모를 검사했다. 머리가 길면 그 자리에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지각하면 군대처럼 벌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결혼해 자식을 낳은 아버지였던 노동자들의 치욕감과 분노는 심각했다.
식당도 이른바 ‘함바집’으로 더위에는 밥을 물에 말아 속으로 밀어 넘기고는 식당 밖으로 뛰쳐나와야 했다.
그나마 식당도 생산직과 사무직들이 나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화장실 문이 없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작업장에서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감독자들의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반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20대 젊은 관리직들이 40대 가장들에게 반말하고 욕하는 광경이 다반사였다.
당시 월 근로시간은 기본 240시간에 오버타임이 150~200시간이었다. 이 경우 임금은 대기업이 20만~30만원이었고 대부분 노동자들은 10만원대였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는 8만원 정도 받았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노조를 결성하면서 내건 요구조건을 보면 △안전 재해자에 대한 목욕탕, 이발소 운영권 인계 △ 안전 재해자 평생 생활대책 보장
△ 출근시간 아침8시로 실시(춘하추동) △식사 처우 개선 △ 작업 전 체조, 작업시간 인정 및 중식시간 체조 1시에 실시 △ 훈련소 출신과 공채 입사자의 임금 격차 해소 △두발 자율화 △3박 4일 하기휴가 유급·소급실시 △임금인상 25% △상여금차등제 폐지 등이다.
특별취재팀 = 문진헌 백만호 강경흠 정재철 윤여운 송진휴 기자
생산현장에서 울려퍼진 ‘늙은 노동자의 노래’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 “야! 야! 야야야야! 꽃 바구니 옆에 끼고 ~~” 늙은 노동자의 노래와 아리랑 목동이 울려 퍼지면 어김없이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간간이 노래가 끈기면 애국가도 단골 매뉴였다.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10Km가 넘는 거리를 행진하며 몇 번을 불러도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현대정공 양규석(47)씨는 “당시 노동자의 신세가 늙은 군인과 같았고 대부분 군을 제대한 사람들이라 인기있었던 같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노조 설립의 산증인인 이상범(49)씨는 “조합원 어깨에 무등을 타고 ‘어용노조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전 공장을 순회하던 중 갑자기 마른 하늘에 장대비를 보면서 ‘과연 조합원들이 모일까’ 걱정했지만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구름같이 몰려드는 조합원들을 보며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들리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정말 심장을 멎게 했다.” 이씨의 당시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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