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민주화운동 참여한 것은 지금도 삶의 원동력
부제 : 현 단계 우리사회 과제 해결하는 게 개혁 … 세계화된 경제질서 속 실사구시 필요
송해주
-1959년 전남 장흥생.
-전남대 79학번.
-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항쟁 기간 내도록 참여.
-항쟁 후 한달 뒤 군 입대.
-87년 6월 항쟁 당시 범한화재보험(현 LIG손해보험) 근무.
-명동성당 농성에 이틀간 참여.
-사무전문직 노동운동(노조 부위원장 역임)
-현 LIG손해보험 RFC본부 상무 : 30대 초반의 핵심 영업사원으로 구성된 조직
홍순계
-1957년 경북 안동생.
-연세대 76학번.
-80년 5월 광주항쟁 때는 군인.
-87년 6월 항쟁 때는 현대해상화재보험 근무
-명동성당 농성 참여
-사무전문직 노동운동(노조 위원장 역임)
-현 현대해상화재보험 전략채널본부장 : 카드사, 홈쇼핑, 이동통신사, 포털, 은행(방카슈랑스) 등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새로운 채널을 발굴하고, 협력관계를 맺는 일.
<광주항쟁이 삶에="" 미친="" 영향은="">
내일 : 1980년 5월 광주와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7· 8월 노동자대투쟁은 2007년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큰 축이다. ‘1987년 체제’를 해석하고 미래의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볼 때 지난 세월 두 사람의 경험은 실사구시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한 사람은 호남출신으로 광주항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은 영남출신으로 군복을 입고 있었다. 광주항쟁이 본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홍순계 : 나는 3사관학교 병원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자대 배치를 막 받을 때 광주항쟁 터졌다.
우리 또래 얘기해보면 누구나 박정희 체제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상태가 있었고 나도 그랬다. 그러나 대학 들어와서 박정희 신화가 깨졌고 방황하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친구나 선·후배들이 데모하고 구속될 때 현실도피 비슷하게 군대를 갔다. 4학년 때였다.
논산훈련소 있을 때 박정희 죽었다는 소리 듣고 충격이 컸다. 저렇게 쉽게 죽는구나…. 갑갑하고 부끄러웠다. 역사의 현장에서 밀려나있는 것 같고, 부채의식을 갖고 군대 생활했다. 그런 부채의식이 6월 항쟁 때 열심히 한 바탕이 되기도 했다.
송해주 : 나는 대학교 2학년 때였다. 5월 13~14일까지 거의 매일 시내 가두시위에 참석했다. 5월 17일 계엄군이 학교에 진입하면서 학생 가두시위보다 시민이 참여한 형태로 바뀌었다. 17일 이후에는 학생이 주축이 되기보다 시민이 직접 나서서 싸웠다. 군인들이 진주한 상황에서 서로 총을 잡고 싸우는 상황이 되다 보니 학생인 나 같은 경우는 뒤로 빠지게 됐다.
17일부터 항쟁이 끝날 때까지 현장을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했다. 매일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도청에 진주한 계엄군과 총격전 하는 장면도 목격했었다. 그러다가 7월이 돼서 2학년 1학기를 못 마친 채 군대 갔다.
홍 본부장이 부채의식을 말했는데, 5월 그때를 직접 겪은 사람은 5월이 되면 이상한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 부채의식이 있으니까 직장에서 노조를 하면서 이거라도 잘해야지 생각했고, 그래서 때로는 격렬해진 면도 있다.
홍순계 : 광주에 있었어도 부채의식이 있었나.
송해주 : 나 같은 구경꾼이 아니라 앞에 나서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도 있었으니까.
<명동성당 농성을="" 이끈="" 힘은="">
내일 : 1987년 6월 두 사람은 한 자리에 섰다. 항쟁이 대중적으로 폭발한 구심에는 명동성당 농성이 있는데 당시 농성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나.
홍순계 : 6월 10일 밤 학생들이 경찰 진압에 쫓겨 명동성당에 들어가면서 농성이 시작됐다. 우리는 15일부터 들어갔다.
당시 명동성당이 구심점이 돼 참 든든했다. 남대문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 점심시간이 되면 명동에 밥 먹으러 가자며 직원들 데리고 나와 김밥으로 대충 때우고 시위에 참여했다. 낮에는 넥타이 맨 남자직원이 많았다면 저녁에는 여직원들도 많이 참여했다.
15일 명동성당에 들어간 것은 장명국 당시 석탑노동연구원장이 “지금 너희가 나서야 할 때”라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85년 1월 노조를 만들었는데 잘 안 됐다. 단체협상도 안 될 정도로 노조가 안 되는 게 사회 민주화가 안돼서 그런 것이고 직장 민주화보다 사회민주화 정치민주화가 더 중요하다는 의식이 있었다.
80년 광주항쟁 때 부채를 탕감한다는 차원에서도 열심히 나섰다. 당시 우리는 노조활동을 하면서 연대했던 경험이 있었다. 송 상무도 6월 항쟁 전에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알았다. 당시 범한화재(현 LIG손해보험) 노조는 내부가 분열돼 거의 와해된 상태였는데 연대활동을 통해 범한화재 이상재씨를 복직시켰다. 한 사업장의 힘만으론 안 되지만 연대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무슨 일만 있으면 몰려다녔다. 명동성당 농성도 조합에서 단련된 조합원이었기에 가능했다. 주체적인 힘을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송해주 : 이상재씨 복직투쟁하면서 노조하는 사람들의 네트웍이 정비가 됐다.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한국노총에서 호헌지지를 표명했을 때 반발하면서 네트웍이 확산됐다. 6월 항쟁이 터졌을 때는 노조에서 상근자 중심으로 참여하다 명동성당 들어가서 저녁에 합류하고 할 때는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낮에는 넥타이가 최루탄 쏘지 마라, 잡아가지 마라고 하면 시민들이 참여했다.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보면 시민들이 빵과 우유를 시위대에 막 쏟아 넣어줬다. 넥타이 부대가 간접적으로 참여해가는 형태가 됐다.
<그해 6월과="" 7·8월의="" 관계는="">
내일 : 85년에는 노조 하나 만들기 참 어려웠지만, 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생겼다. 대기업, 사무직 등 전 분야로 노조가 확산됐다. 특히 사무직들은 6월 항쟁과 7· 8월 투쟁의 주체였다. 두 투쟁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홍순계 : 전두환 하야가 목표였는데 6·29선언이 나와서 김이 빠졌다. 나중에 보니 6·29도 큰 승리였는데 당시에는 허전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2년 동안 못했던 단체협상도 이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부들 중심으로 단협을 체결하라며 단식농성을 했고 조합원들이 자꾸 모여들면서 성공했다. 그때가 7월초인데, 이게 소문이 났다. 광화문에서 넥타이 맨 사무직이 노조한다는 게 울산지역 생산직노동자에게 알려졌고, 그들에게 자극을 줬다는 말을 들었다.
조합원들의 역량이 성숙해 그 힘으로 단협이 잘 됐다. 자신감을 갖고 사회민주화에서 다시 직장민주화로 내실을 다지는, 구체적인 우리 문제로 돌아오는 계기가 7·8월 대투쟁이었다. 사무직에서 생산직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송해주 : 7·8월 대투쟁은 너무 산재하고 밀린 숙제가 많아서 불가피하게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조가 있긴 했지만 형태만 존재했고 노·사는 형식상 평등도 없었다.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민주화가 화두가 돼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수평적 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87년 체제="" 비판에="" 대해서="">
- 이른바 ‘87년 체제’가 형성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진보와 개혁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후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과 함께 87년 체제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념대립의 고조, 부의 양극화 심화에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자칭 평화개혁진보세력은 최근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잇따라 외면당하고 있다.
‘민주화 세력 무능론’이든 ‘진보적 이념의 몰락’으로 표현하든 87년 체제는 실패한 것인가.
홍순계 : 그것은 분명 아니라고 본다. 87년 체제는 잘못된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에 기여했다고 본다. 국민의정부에서 참여정부로 이어오면서 많은 발전을 해왔다.
민주적 제도가 정착되고 많이 투명해졌다. 권위주의도 타파됐다. 언론과 긴장관계도 높아지니까 작은 부패도 바로 드러나는 상황이다. 독재 기준으로 보면 획일적이고 일사불란한 질서에 대한 향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민주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다. 혼란이라고 보는 것은 극단적인 평가다.
그러나 양극화가 심화됐다. 이것은 87년 체제의 한계라기보다 세계화시대의 문제점이다. 보수적이거나 수구적인 정부가 집권했어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양극화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
당시 양김씨가 후보를 단일화했으면 우리 사회 발전을 더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민주세력의 분열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게 아쉽다.
송해주 : 정치의 민주화는 상당히 진전되었고, 그 진전되는 과정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정치문제만큼 문제의 본질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미흡했다는 생각을 한다. 외환위기 이후 거세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흐름을 구조적
으로 통찰해 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경제체질을 바꾸고, 국가의 미래 과제에 힘을 모으는 게 필요했지만 민주세력이 이 문제에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 듯 하다. 이 순간에도 세계화의 흐름은 나름대로 법칙성을 가지고 진전되고 있는 것 아닌가.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내일 : 민주세력에 대한 불만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작용하는 것인가. 여론조사 방식으로 다수 여론을 보면 진보개혁보다 먹고사는 문제나 경제문제를 앞세우는 지도자상을 이야기하는데.
홍순계 : 일자리가 문제다 양극화가 문제다 하면 그것을 해결하는 게 시대정신이고 그것 해결하는 게 개혁이다.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 것 같다는 이미지는 주지만 봐야 안다.
문민정부 이후 15년간 집권한 시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졌다. 그런데 현실에서 문제를 시원시원하게 풀어가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젠 각 부문의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해야 한다. 각 부문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권을 다투다 보니 늦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 누르지 못한다. 70~80년대는 빨리빨리 문화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업도 그런 것 아닌가. 지금 고객을 만족시켜도 고객은 곧 더 높은 만족도를 요구하고, 이것을 기업은 충족시켜줘야 한다.
송해주 : 뭐랄까. 민주세력이 의도는 좋은데, 전략적인 면에서 좀 약한 것 아닌가. 개혁하려면 속도와 힘의 집중이 중요하다. 과거사정리 같은 의제보다 더 절박한 현실적 과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서 속도를 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권자들은 현실성보다 당위성의 논리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의제설정부터 문제해결 방법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아닐까.
내일 : 개혁과 평화가 우리 사회를 좀 더 지탱해야 하고, 이를 굳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는데 평화 민주 개혁세력은 특정한 정치인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 아닌가.
송해주 : 막연한 얘기지만 그런 것 같다. 머릿속에서 평화민주개혁을 그리면서도 어떤 때는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할 때도 있다. 굉장히 전략적이어야 한다.
홍순계 :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나가고 있다. 혁명을 했다면 일거에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개조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점진적인 개혁을 했고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혁명이라면 10년 5년 안에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혈혁명이 아닌 개혁의 과정에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은 너무 짧다. 그래서 민주세력의 단일화가 필요하고 한 번 더 집권하는 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실사구시에 입각해서 개혁을 더 진전시키고, 뒤로 물러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안정기를 형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내일 : 혹자는 87년 체제에 대한 분석을 한 후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게 지금처럼 불명예가 된 때는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 삶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고 보는가.
홍순계 :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명망가가 그런 말을 한다면 패배주의다. 우리같은 민초는 어디 가서 민주화운동했다고 자랑도 안하지만 민주화에 참여한 기억은 뿌듯한 자부심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이분법이 아니라 우리가 민주화 산업화과제를 안고 가야 한다.
나는 지금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운동 내부에 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노조운동 속에 새로운 귀족이 형성되고, 노조 간부로서 활동이 끝났으면 다시 현업에 복귀해야 한다.
이젠 노사가 아니다. 기업엔 노도 있고 사도 있고, 고객과 협력업체도 있다. 노사보다 더 중요하다. 노사가 조직 이기적으로 나가면 소비자에게 피해가 가고 협력업체에 피해가 간다. 그렇게 되면 비정규직과 외국인노동자를 쓰게 된다. 이게 노조의 이기주의다.
민주화 세력이 일자리도 만들고, 양보하면서 민주화도 이루고 갈등도 해결해야 시대정신을 안고 가는 것이다.
송해주 :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한미 FTA등 세계화의 진전과 한국의 사회 경제상황이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변모해 갈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세계화와 한국경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각계각층의 폭넓은 공유를 바탕으로 분열보다는 통합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치들이 만들어 지기를 바란다. 노사관계도 생각의 차이가 통합되고, 정부와 기업도 정책적 관점의 차이가 통합되어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할 새로운 통합마인드로 작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에겐 아직도 통합의 힘이 너무 약하다.
대담 신명식 편집국장
정리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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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현 단계 우리사회 과제 해결하는 게 개혁 … 세계화된 경제질서 속 실사구시 필요
송해주
-1959년 전남 장흥생.
-전남대 79학번.
-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항쟁 기간 내도록 참여.
-항쟁 후 한달 뒤 군 입대.
-87년 6월 항쟁 당시 범한화재보험(현 LIG손해보험) 근무.
-명동성당 농성에 이틀간 참여.
-사무전문직 노동운동(노조 부위원장 역임)
-현 LIG손해보험 RFC본부 상무 : 30대 초반의 핵심 영업사원으로 구성된 조직
홍순계
-1957년 경북 안동생.
-연세대 76학번.
-80년 5월 광주항쟁 때는 군인.
-87년 6월 항쟁 때는 현대해상화재보험 근무
-명동성당 농성 참여
-사무전문직 노동운동(노조 위원장 역임)
-현 현대해상화재보험 전략채널본부장 : 카드사, 홈쇼핑, 이동통신사, 포털, 은행(방카슈랑스) 등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새로운 채널을 발굴하고, 협력관계를 맺는 일.
<광주항쟁이 삶에="" 미친="" 영향은="">
내일 : 1980년 5월 광주와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7· 8월 노동자대투쟁은 2007년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큰 축이다. ‘1987년 체제’를 해석하고 미래의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볼 때 지난 세월 두 사람의 경험은 실사구시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한 사람은 호남출신으로 광주항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은 영남출신으로 군복을 입고 있었다. 광주항쟁이 본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홍순계 : 나는 3사관학교 병원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자대 배치를 막 받을 때 광주항쟁 터졌다.
우리 또래 얘기해보면 누구나 박정희 체제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상태가 있었고 나도 그랬다. 그러나 대학 들어와서 박정희 신화가 깨졌고 방황하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친구나 선·후배들이 데모하고 구속될 때 현실도피 비슷하게 군대를 갔다. 4학년 때였다.
논산훈련소 있을 때 박정희 죽었다는 소리 듣고 충격이 컸다. 저렇게 쉽게 죽는구나…. 갑갑하고 부끄러웠다. 역사의 현장에서 밀려나있는 것 같고, 부채의식을 갖고 군대 생활했다. 그런 부채의식이 6월 항쟁 때 열심히 한 바탕이 되기도 했다.
송해주 : 나는 대학교 2학년 때였다. 5월 13~14일까지 거의 매일 시내 가두시위에 참석했다. 5월 17일 계엄군이 학교에 진입하면서 학생 가두시위보다 시민이 참여한 형태로 바뀌었다. 17일 이후에는 학생이 주축이 되기보다 시민이 직접 나서서 싸웠다. 군인들이 진주한 상황에서 서로 총을 잡고 싸우는 상황이 되다 보니 학생인 나 같은 경우는 뒤로 빠지게 됐다.
17일부터 항쟁이 끝날 때까지 현장을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했다. 매일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도청에 진주한 계엄군과 총격전 하는 장면도 목격했었다. 그러다가 7월이 돼서 2학년 1학기를 못 마친 채 군대 갔다.
홍 본부장이 부채의식을 말했는데, 5월 그때를 직접 겪은 사람은 5월이 되면 이상한 심리상태에 빠지게 된다. 부채의식이 있으니까 직장에서 노조를 하면서 이거라도 잘해야지 생각했고, 그래서 때로는 격렬해진 면도 있다.
홍순계 : 광주에 있었어도 부채의식이 있었나.
송해주 : 나 같은 구경꾼이 아니라 앞에 나서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도 있었으니까.
<명동성당 농성을="" 이끈="" 힘은="">
내일 : 1987년 6월 두 사람은 한 자리에 섰다. 항쟁이 대중적으로 폭발한 구심에는 명동성당 농성이 있는데 당시 농성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나.
홍순계 : 6월 10일 밤 학생들이 경찰 진압에 쫓겨 명동성당에 들어가면서 농성이 시작됐다. 우리는 15일부터 들어갔다.
당시 명동성당이 구심점이 돼 참 든든했다. 남대문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 점심시간이 되면 명동에 밥 먹으러 가자며 직원들 데리고 나와 김밥으로 대충 때우고 시위에 참여했다. 낮에는 넥타이 맨 남자직원이 많았다면 저녁에는 여직원들도 많이 참여했다.
15일 명동성당에 들어간 것은 장명국 당시 석탑노동연구원장이 “지금 너희가 나서야 할 때”라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85년 1월 노조를 만들었는데 잘 안 됐다. 단체협상도 안 될 정도로 노조가 안 되는 게 사회 민주화가 안돼서 그런 것이고 직장 민주화보다 사회민주화 정치민주화가 더 중요하다는 의식이 있었다.
80년 광주항쟁 때 부채를 탕감한다는 차원에서도 열심히 나섰다. 당시 우리는 노조활동을 하면서 연대했던 경험이 있었다. 송 상무도 6월 항쟁 전에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알았다. 당시 범한화재(현 LIG손해보험) 노조는 내부가 분열돼 거의 와해된 상태였는데 연대활동을 통해 범한화재 이상재씨를 복직시켰다. 한 사업장의 힘만으론 안 되지만 연대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무슨 일만 있으면 몰려다녔다. 명동성당 농성도 조합에서 단련된 조합원이었기에 가능했다. 주체적인 힘을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송해주 : 이상재씨 복직투쟁하면서 노조하는 사람들의 네트웍이 정비가 됐다.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한국노총에서 호헌지지를 표명했을 때 반발하면서 네트웍이 확산됐다. 6월 항쟁이 터졌을 때는 노조에서 상근자 중심으로 참여하다 명동성당 들어가서 저녁에 합류하고 할 때는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낮에는 넥타이가 최루탄 쏘지 마라, 잡아가지 마라고 하면 시민들이 참여했다.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보면 시민들이 빵과 우유를 시위대에 막 쏟아 넣어줬다. 넥타이 부대가 간접적으로 참여해가는 형태가 됐다.
<그해 6월과="" 7·8월의="" 관계는="">
내일 : 85년에는 노조 하나 만들기 참 어려웠지만, 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생겼다. 대기업, 사무직 등 전 분야로 노조가 확산됐다. 특히 사무직들은 6월 항쟁과 7· 8월 투쟁의 주체였다. 두 투쟁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홍순계 : 전두환 하야가 목표였는데 6·29선언이 나와서 김이 빠졌다. 나중에 보니 6·29도 큰 승리였는데 당시에는 허전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2년 동안 못했던 단체협상도 이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부들 중심으로 단협을 체결하라며 단식농성을 했고 조합원들이 자꾸 모여들면서 성공했다. 그때가 7월초인데, 이게 소문이 났다. 광화문에서 넥타이 맨 사무직이 노조한다는 게 울산지역 생산직노동자에게 알려졌고, 그들에게 자극을 줬다는 말을 들었다.
조합원들의 역량이 성숙해 그 힘으로 단협이 잘 됐다. 자신감을 갖고 사회민주화에서 다시 직장민주화로 내실을 다지는, 구체적인 우리 문제로 돌아오는 계기가 7·8월 대투쟁이었다. 사무직에서 생산직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송해주 : 7·8월 대투쟁은 너무 산재하고 밀린 숙제가 많아서 불가피하게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조가 있긴 했지만 형태만 존재했고 노·사는 형식상 평등도 없었다.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민주화가 화두가 돼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수평적 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87년 체제="" 비판에="" 대해서="">
- 이른바 ‘87년 체제’가 형성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진보와 개혁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후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과 함께 87년 체제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념대립의 고조, 부의 양극화 심화에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자칭 평화개혁진보세력은 최근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잇따라 외면당하고 있다.
‘민주화 세력 무능론’이든 ‘진보적 이념의 몰락’으로 표현하든 87년 체제는 실패한 것인가.
홍순계 : 그것은 분명 아니라고 본다. 87년 체제는 잘못된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에 기여했다고 본다. 국민의정부에서 참여정부로 이어오면서 많은 발전을 해왔다.
민주적 제도가 정착되고 많이 투명해졌다. 권위주의도 타파됐다. 언론과 긴장관계도 높아지니까 작은 부패도 바로 드러나는 상황이다. 독재 기준으로 보면 획일적이고 일사불란한 질서에 대한 향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민주사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다. 혼란이라고 보는 것은 극단적인 평가다.
그러나 양극화가 심화됐다. 이것은 87년 체제의 한계라기보다 세계화시대의 문제점이다. 보수적이거나 수구적인 정부가 집권했어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양극화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
당시 양김씨가 후보를 단일화했으면 우리 사회 발전을 더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민주세력의 분열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게 아쉽다.
송해주 : 정치의 민주화는 상당히 진전되었고, 그 진전되는 과정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정치문제만큼 문제의 본질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미흡했다는 생각을 한다. 외환위기 이후 거세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흐름을 구조적
으로 통찰해 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경제체질을 바꾸고, 국가의 미래 과제에 힘을 모으는 게 필요했지만 민주세력이 이 문제에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 듯 하다. 이 순간에도 세계화의 흐름은 나름대로 법칙성을 가지고 진전되고 있는 것 아닌가.
<새로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내일 : 민주세력에 대한 불만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작용하는 것인가. 여론조사 방식으로 다수 여론을 보면 진보개혁보다 먹고사는 문제나 경제문제를 앞세우는 지도자상을 이야기하는데.
홍순계 : 일자리가 문제다 양극화가 문제다 하면 그것을 해결하는 게 시대정신이고 그것 해결하는 게 개혁이다.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 것 같다는 이미지는 주지만 봐야 안다.
문민정부 이후 15년간 집권한 시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졌다. 그런데 현실에서 문제를 시원시원하게 풀어가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젠 각 부문의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해야 한다. 각 부문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권을 다투다 보니 늦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 누르지 못한다. 70~80년대는 빨리빨리 문화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업도 그런 것 아닌가. 지금 고객을 만족시켜도 고객은 곧 더 높은 만족도를 요구하고, 이것을 기업은 충족시켜줘야 한다.
송해주 : 뭐랄까. 민주세력이 의도는 좋은데, 전략적인 면에서 좀 약한 것 아닌가. 개혁하려면 속도와 힘의 집중이 중요하다. 과거사정리 같은 의제보다 더 절박한 현실적 과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서 속도를 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권자들은 현실성보다 당위성의 논리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의제설정부터 문제해결 방법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아닐까.
내일 : 개혁과 평화가 우리 사회를 좀 더 지탱해야 하고, 이를 굳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는데 평화 민주 개혁세력은 특정한 정치인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 아닌가.
송해주 : 막연한 얘기지만 그런 것 같다. 머릿속에서 평화민주개혁을 그리면서도 어떤 때는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할 때도 있다. 굉장히 전략적이어야 한다.
홍순계 :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나가고 있다. 혁명을 했다면 일거에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개조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점진적인 개혁을 했고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혁명이라면 10년 5년 안에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혈혁명이 아닌 개혁의 과정에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은 너무 짧다. 그래서 민주세력의 단일화가 필요하고 한 번 더 집권하는 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실사구시에 입각해서 개혁을 더 진전시키고, 뒤로 물러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안정기를 형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내일 : 혹자는 87년 체제에 대한 분석을 한 후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게 지금처럼 불명예가 된 때는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 삶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고 보는가.
홍순계 :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명망가가 그런 말을 한다면 패배주의다. 우리같은 민초는 어디 가서 민주화운동했다고 자랑도 안하지만 민주화에 참여한 기억은 뿌듯한 자부심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이분법이 아니라 우리가 민주화 산업화과제를 안고 가야 한다.
나는 지금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운동 내부에 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노조운동 속에 새로운 귀족이 형성되고, 노조 간부로서 활동이 끝났으면 다시 현업에 복귀해야 한다.
이젠 노사가 아니다. 기업엔 노도 있고 사도 있고, 고객과 협력업체도 있다. 노사보다 더 중요하다. 노사가 조직 이기적으로 나가면 소비자에게 피해가 가고 협력업체에 피해가 간다. 그렇게 되면 비정규직과 외국인노동자를 쓰게 된다. 이게 노조의 이기주의다.
민주화 세력이 일자리도 만들고, 양보하면서 민주화도 이루고 갈등도 해결해야 시대정신을 안고 가는 것이다.
송해주 :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한미 FTA등 세계화의 진전과 한국의 사회 경제상황이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변모해 갈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세계화와 한국경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각계각층의 폭넓은 공유를 바탕으로 분열보다는 통합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치들이 만들어 지기를 바란다. 노사관계도 생각의 차이가 통합되고, 정부와 기업도 정책적 관점의 차이가 통합되어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할 새로운 통합마인드로 작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에겐 아직도 통합의 힘이 너무 약하다.
대담 신명식 편집국장
정리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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