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 대투쟁 경제민주화의 서막 열다]대투쟁 이끈 주역들
①대공장 노조의 투쟁을 이끈 현대엔진노조 초대 사무국장 사영운씨
지역내일
2007-07-11
(수정 2007-07-11 오후 3:06:32)
“너나없이 함께 한 것이 대투쟁 원동력”
“87년 당시 조합원들의 표정은 환희와 승리의 기쁨 그 자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는 사영운(49)씨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사영운(49)씨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열었던 현대엔진 노조 창립의 주역이자 초대 사무국장이었다.
◆꿈의 직장이던 현대는 지옥으로 변하고 = 사영운씨와 함께 현대엔진 노조를 설립했던 주역들은 1978년 전후에 입사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충북 청원군이 고향이었던 사씨는 7남매 중 맏이였다. 공고를 졸업하고 방위사업체로 입사해 병역특례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에게 현대는 꿈의 직장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때 봤던 울산 현대는 입사 자체가 출세로 생각됐다. 그런 현대에 훈련생으로 들어와 병역특례로 5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현실 앞에 무너졌다. 특례 기간에 찍히면 그대로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에 항상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월 400시간 노동에 3만원을 받았다. 당시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그와 비슷한 삶의 경로를 걸었다.
그가 입사할 당시 현대중공업 엔진사업부였던 현대엔진은 78년 10월에 독립해 87년 당시 3000여명을 거느린 대형 사업장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회사가 아니라 사실상 군대” = 시키면 시키는대로 살아왔던 이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다. 사씨와 그 친구들은 대부분 30세 전후의 팔팔한 나이였다. 더구나 이들은 현대엔진이 독립할 때쯤 들어온 회사내 최고참들이었다. 사씨 자신도 2개조를 하나로 묶은 팀의 반장이었다.
사씨는 “세월이 지나도 회사의 분위기는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정문 앞에서 경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원들의 머리카락 길이 검사를 했다. 현장의 안전관리원은 군대의 헌병과 같은 위세였다.
무엇보다 연말에 주어지는 성과급은 철저하게 상대평가를 통해 7등급으로 나눠서 지급됐다. 같은 팀안에서 어떤 직원은 성과급을 500%를 받지만 어떤 직원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잘해도 반드시 직원들간에 등급을 정해야 했다. 결국 팀원은 서로 대립하고 위화감이 조성됐다.
역설적으로 이런 회사 분위기는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에게 튼튼한 토대가 됐다.
◆꿈틀대기 시작한 85~86년 = “권용목씨가 입사동기이며 친구인데 85년부터 독서모임을 추진했어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는 모임이었죠. 석탑노동연구원쪽 사람들과 연결이 돼 공부했어요.”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는 것이라도 챙기자는 게 그들의 희망이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그동안 회사측에서 임명하던 노사협의회 위원이 되는 것이었다. 법에 따르면 노사협의회 위원은 노동자가 선출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이들은 노사협의회 위원 직선제를 관철시켰다. 그 때만해도 회사측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영운씨 역시 이 때 노동자 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
87년 1월 상여금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엔 항상 회사측에 찍혔던 권용목씨가 반장으로 있던 반이 문제였다. 반장이 찍혀 제대로 상여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노사협의회가 열렸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들은 점심시간 식사하러 식당에 온 직원들 작업복에 ‘차등지급 철폐’라는 쓴 종이를 붙였다.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항의는 곧 항명이라는 군대식 분위기가 절대적이었던 회사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등급은 7단계에서 3단계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한푼도 상여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그것은 소중한 승리의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그해 여름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조합원들의 강력한 지지가 가장 큰 힘 = “노조설립 보고대회에 가져간 가입서 1000장이 단숨에 동이 났어요. 직원들이 얼마나 간절히 노조를 원했는지. 그 힘이 노조결성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현대엔진노조는 87년 7월 5일 창립됐다. 나이트클럽에서 노조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설립신고를 하고 회사에 들어가 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가졌다. 전광석화같은 일처리였다. 이들은 이 날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상태였다. 3~4개월 동안 준비가 진행됐다. 납치되면 어떻게 할지, 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갈지 등 세세한 일까지 점검대상이었다. 회사측은 경악 그 자체였다. 너무나 당황해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들의 노조결성은 이후 현대 계열사로 확대됐다. 그리고 현대그룹측의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설립에 맞서 8월 17일, 18일 현대그룹의 모든 노동자가 울산 공설운동장에 모였다.
“메가폰 5~6개로 4만여명을 인솔했어요. 그 어떤 사고도 없었습니다. 대열이 4km까지 이어졌는데 끝까지 앞의 지시가 전달될 정도였어요. 울산 시민들도 나와 박수를 쳐줬습니다.”
◆우유와 빵 하나가 가져다 준 기쁨 = 이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처음 한 일은 ‘간식투쟁’이었다. 당시 현대엔진은 2시간 일을 더하면 저녁식사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상 저녁이 늦었던 직원들은 대부분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노조는 회사에 간식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태업으로 이어졌고 결국 회사는 손을 들었다. ‘우유와 빵 하나’. 그것이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에 담긴 조합원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노조를 만들어 거둔 첫 성과였다.
그 다음은 연월차가 없었던 일용공과 생리휴가가 없었던 여직원, 잔업수당이 없었던 비생산직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 이들은 소수였지만 모든 노조원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나섰다.
사영운씨는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으면 당연히 싸워줘야지 하는 것이 현장 노동자들의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직장 = 사영운씨는 87년 12월 해고됐다. 그 전인 9월 14일 구속된 권용목 위원장 석방을 위해 서울 상경투쟁을 한 것이 빌미가 됐다.
88년 2월 해고된 4명이 복직을 위해 현대엔진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여기에 800여명이 20일을 함께 했다. 그 와중에 돌발사태가 터졌다. 점거농성 20일째인 3월 16일 청경 한 명이 점거농성단이 던진 돌에 숨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농성을 풀었고 1년여의 수배생활을 하게 됐다. 그것이 87년 초대 현대엔진 노조 신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후 89년 4월 현대중공업 파업 때 사영운씨는 구속됐다.
이상훈(51)
당시 현대중공업
7~8월 대투쟁은 엄청난 인원이 함께한 다수의 투쟁이다. 가두행진 때 시민들이 물과 빵을 갖다 주고 대단한 호응이 있었다. 감동이었다. 지금은 소수 위주의 노동운동이 되지 않았나 싶어 가슴 아프다.
박종석(50)
당시 현대미포조선
현장에서 일하면서 노조 초대 쟁의부장으로암울한 시대에서 한줄기 빛을 봤다. ‘노동법해설’ 같은 책을 접하면서 권리의식에 눈을 떴다.고용과 복지를 위해서라도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하부영(48)
당시 현대자동차
어용노조 타도투쟁을 보고 동참하다보니 선두에 서게 됐다. 노조만 만들어지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했는데,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노조가 사회적인 대의명분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허태혁(45)
범한금속
미조직 노동자들이 조직노동자들에 비해 소외돼 있다.
그들이 상태는 87년 당시 노동자들의 상태보다 더 열악한 것 같다.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문제가 노동운동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김춘백(41)
당시 한국중공업
조합원들이 개인주의화 됐다. 당시는 노조깃발 아래 모였는데 요즘은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다. 고용문제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현 직장을 나서면 생활이 어렵게 된다. 고용안정이 최대의 관심사다.
특별취재팀 = 윤여운 백만호 문진헌 강경흠 정재철 송진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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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당시 조합원들의 표정은 환희와 승리의 기쁨 그 자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는 사영운(49)씨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사영운(49)씨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열었던 현대엔진 노조 창립의 주역이자 초대 사무국장이었다.
◆꿈의 직장이던 현대는 지옥으로 변하고 = 사영운씨와 함께 현대엔진 노조를 설립했던 주역들은 1978년 전후에 입사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충북 청원군이 고향이었던 사씨는 7남매 중 맏이였다. 공고를 졸업하고 방위사업체로 입사해 병역특례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에게 현대는 꿈의 직장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때 봤던 울산 현대는 입사 자체가 출세로 생각됐다. 그런 현대에 훈련생으로 들어와 병역특례로 5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현실 앞에 무너졌다. 특례 기간에 찍히면 그대로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에 항상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월 400시간 노동에 3만원을 받았다. 당시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그와 비슷한 삶의 경로를 걸었다.
그가 입사할 당시 현대중공업 엔진사업부였던 현대엔진은 78년 10월에 독립해 87년 당시 3000여명을 거느린 대형 사업장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회사가 아니라 사실상 군대” = 시키면 시키는대로 살아왔던 이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였다. 사씨와 그 친구들은 대부분 30세 전후의 팔팔한 나이였다. 더구나 이들은 현대엔진이 독립할 때쯤 들어온 회사내 최고참들이었다. 사씨 자신도 2개조를 하나로 묶은 팀의 반장이었다.
사씨는 “세월이 지나도 회사의 분위기는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정문 앞에서 경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원들의 머리카락 길이 검사를 했다. 현장의 안전관리원은 군대의 헌병과 같은 위세였다.
무엇보다 연말에 주어지는 성과급은 철저하게 상대평가를 통해 7등급으로 나눠서 지급됐다. 같은 팀안에서 어떤 직원은 성과급을 500%를 받지만 어떤 직원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모두가 잘해도 반드시 직원들간에 등급을 정해야 했다. 결국 팀원은 서로 대립하고 위화감이 조성됐다.
역설적으로 이런 회사 분위기는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에게 튼튼한 토대가 됐다.
◆꿈틀대기 시작한 85~86년 = “권용목씨가 입사동기이며 친구인데 85년부터 독서모임을 추진했어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는 모임이었죠. 석탑노동연구원쪽 사람들과 연결이 돼 공부했어요.”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는 것이라도 챙기자는 게 그들의 희망이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그동안 회사측에서 임명하던 노사협의회 위원이 되는 것이었다. 법에 따르면 노사협의회 위원은 노동자가 선출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이들은 노사협의회 위원 직선제를 관철시켰다. 그 때만해도 회사측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영운씨 역시 이 때 노동자 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
87년 1월 상여금 문제가 불거졌다. 이번엔 항상 회사측에 찍혔던 권용목씨가 반장으로 있던 반이 문제였다. 반장이 찍혀 제대로 상여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노사협의회가 열렸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들은 점심시간 식사하러 식당에 온 직원들 작업복에 ‘차등지급 철폐’라는 쓴 종이를 붙였다.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항의는 곧 항명이라는 군대식 분위기가 절대적이었던 회사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등급은 7단계에서 3단계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한푼도 상여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그것은 소중한 승리의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그해 여름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조합원들의 강력한 지지가 가장 큰 힘 = “노조설립 보고대회에 가져간 가입서 1000장이 단숨에 동이 났어요. 직원들이 얼마나 간절히 노조를 원했는지. 그 힘이 노조결성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현대엔진노조는 87년 7월 5일 창립됐다. 나이트클럽에서 노조 창립총회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설립신고를 하고 회사에 들어가 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가졌다. 전광석화같은 일처리였다. 이들은 이 날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상태였다. 3~4개월 동안 준비가 진행됐다. 납치되면 어떻게 할지, 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갈지 등 세세한 일까지 점검대상이었다. 회사측은 경악 그 자체였다. 너무나 당황해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들의 노조결성은 이후 현대 계열사로 확대됐다. 그리고 현대그룹측의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설립에 맞서 8월 17일, 18일 현대그룹의 모든 노동자가 울산 공설운동장에 모였다.
“메가폰 5~6개로 4만여명을 인솔했어요. 그 어떤 사고도 없었습니다. 대열이 4km까지 이어졌는데 끝까지 앞의 지시가 전달될 정도였어요. 울산 시민들도 나와 박수를 쳐줬습니다.”
◆우유와 빵 하나가 가져다 준 기쁨 = 이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처음 한 일은 ‘간식투쟁’이었다. 당시 현대엔진은 2시간 일을 더하면 저녁식사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상 저녁이 늦었던 직원들은 대부분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노조는 회사에 간식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태업으로 이어졌고 결국 회사는 손을 들었다. ‘우유와 빵 하나’. 그것이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에 담긴 조합원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노조를 만들어 거둔 첫 성과였다.
그 다음은 연월차가 없었던 일용공과 생리휴가가 없었던 여직원, 잔업수당이 없었던 비생산직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 이들은 소수였지만 모든 노조원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나섰다.
사영운씨는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으면 당연히 싸워줘야지 하는 것이 현장 노동자들의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직장 = 사영운씨는 87년 12월 해고됐다. 그 전인 9월 14일 구속된 권용목 위원장 석방을 위해 서울 상경투쟁을 한 것이 빌미가 됐다.
88년 2월 해고된 4명이 복직을 위해 현대엔진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여기에 800여명이 20일을 함께 했다. 그 와중에 돌발사태가 터졌다. 점거농성 20일째인 3월 16일 청경 한 명이 점거농성단이 던진 돌에 숨진 것이다.
결국 이들은 농성을 풀었고 1년여의 수배생활을 하게 됐다. 그것이 87년 초대 현대엔진 노조 신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후 89년 4월 현대중공업 파업 때 사영운씨는 구속됐다.
이상훈(51)
당시 현대중공업
7~8월 대투쟁은 엄청난 인원이 함께한 다수의 투쟁이다. 가두행진 때 시민들이 물과 빵을 갖다 주고 대단한 호응이 있었다. 감동이었다. 지금은 소수 위주의 노동운동이 되지 않았나 싶어 가슴 아프다.
박종석(50)
당시 현대미포조선
현장에서 일하면서 노조 초대 쟁의부장으로암울한 시대에서 한줄기 빛을 봤다. ‘노동법해설’ 같은 책을 접하면서 권리의식에 눈을 떴다.고용과 복지를 위해서라도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하부영(48)
당시 현대자동차
어용노조 타도투쟁을 보고 동참하다보니 선두에 서게 됐다. 노조만 만들어지면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했는데,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노조가 사회적인 대의명분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허태혁(45)
범한금속
미조직 노동자들이 조직노동자들에 비해 소외돼 있다.
그들이 상태는 87년 당시 노동자들의 상태보다 더 열악한 것 같다.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문제가 노동운동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김춘백(41)
당시 한국중공업
조합원들이 개인주의화 됐다. 당시는 노조깃발 아래 모였는데 요즘은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다. 고용문제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현 직장을 나서면 생활이 어렵게 된다. 고용안정이 최대의 관심사다.
특별취재팀 = 윤여운 백만호 문진헌 강경흠 정재철 송진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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