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비난받고 친일은 변명을 넘어 찬양으로까지 나가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해방 62주년을 맞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기획을 마련했다.
국적없어 문화재급 500년 옛 집 방치 … 후손들 재산권 등 각종 민사상 권리 상실
지난 2005년 단재 신채호 선생이 국적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의 국적회복운동이 벌어졌다.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마친 선열들에 대한 국적회복 문제는 이후 국회에서도 논의됐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도 국적이 없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9명 배출한 ‘임청각’ =
경북 안동역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9명이나 배출한 집안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에서 따왔다는 ‘임청각’ 이 그곳이다. 이 집은 1519년 지어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안동 종갓집으로 보물 182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보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몸살을 앓아왔다. 중앙선이 생길 때는 집 주인과 친인척이 항일운동을 하는 인물이 많다고 해 마당으로 철길이 지나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이 집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한민국 국적자로 등록되지 못하면서 건물 등기가 불가능해 졌다.
◆임시정부 수반, 석주 선생 =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석주는 을미의병에 참여했다가 1910년 한일합방에 분노해 이듬해 정월 친인척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석주는 임청각을 떠나면서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향했다. 선생은 만주에서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단체인 산학협동의 경학사를 만들었고 무장투쟁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26년에는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뀐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기도 했다.
석주의 집안은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5촌 이내 9명의 독립운동 수훈자를 배출했다.
◆삼대가 호적거부, 외골수 삶 = 석주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을 한 아들 이준형 선생과 손자 이병화 선생은 1930년대에 일제치하에서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다며 호적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이준형 부자는 일제가 새로 도입한 등기제도에 따라 임청각의 소유권을 상실했다. 500년 가까이 된 99칸짜리 고택의 소유권이 없어지면서 이 집은 주인 없는 집이 됐다. 결국 호적을 가지고 있던 문중의 원로 4명이 대신 등기를 내야 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 선생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해다니다 1942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선생은 유서에서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자 이병화 선생은 귀국 후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형무소로 수감됐다. 하지만 이병화 선생 역시 해방 후 친일파와 협력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 1952년 피난지에서 울분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파악된 무국적 독립운동가만 200여명 = 해방이후 석주의 후손들이 호적을 얻고 임청각에 대한 등기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일제 때 불가피하게 문중원로 4명의 명의로 등기를 했지만 이후 문중 원로 4명의 후손이 4~5대를 지나면서 소유권은 갈수록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청각의 원래 주인을 찾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석주의 증손자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항증 감사는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져 임청각에 대한 관리 자체가 어렵다”며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아 국가에 헌납하고 싶어도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재급 고택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신채호 선생의 아들이 선생의 호적이 없어 재판을 통해 가호적을 만든 사실이 있다”며 “하지만 묘소 이장이나 재산권 등 지금도 민법상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유족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국적 없는 독립운동가만 200여명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독립운동가 선친을 뒀다는 이유로 이런 설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국가가 나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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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없어 문화재급 500년 옛 집 방치 … 후손들 재산권 등 각종 민사상 권리 상실
지난 2005년 단재 신채호 선생이 국적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의 국적회복운동이 벌어졌다.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마친 선열들에 대한 국적회복 문제는 이후 국회에서도 논의됐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도 국적이 없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9명 배출한 ‘임청각’ =
경북 안동역 인근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9명이나 배출한 집안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에서 따왔다는 ‘임청각’ 이 그곳이다. 이 집은 1519년 지어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안동 종갓집으로 보물 182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 집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보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몸살을 앓아왔다. 중앙선이 생길 때는 집 주인과 친인척이 항일운동을 하는 인물이 많다고 해 마당으로 철길이 지나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문제는 이 집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한민국 국적자로 등록되지 못하면서 건물 등기가 불가능해 졌다.
◆임시정부 수반, 석주 선생 =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분이다. 석주는 을미의병에 참여했다가 1910년 한일합방에 분노해 이듬해 정월 친인척 50여 가구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석주는 임청각을 떠나면서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향했다. 선생은 만주에서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단체인 산학협동의 경학사를 만들었고 무장투쟁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26년에는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뀐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맡기도 했다.
석주의 집안은 아들과 손자를 비롯해 5촌 이내 9명의 독립운동 수훈자를 배출했다.
◆삼대가 호적거부, 외골수 삶 = 석주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을 한 아들 이준형 선생과 손자 이병화 선생은 1930년대에 일제치하에서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다며 호적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이준형 부자는 일제가 새로 도입한 등기제도에 따라 임청각의 소유권을 상실했다. 500년 가까이 된 99칸짜리 고택의 소유권이 없어지면서 이 집은 주인 없는 집이 됐다. 결국 호적을 가지고 있던 문중의 원로 4명이 대신 등기를 내야 했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 선생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해다니다 1942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선생은 유서에서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자 이병화 선생은 귀국 후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형무소로 수감됐다. 하지만 이병화 선생 역시 해방 후 친일파와 협력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 1952년 피난지에서 울분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졌다.
◆파악된 무국적 독립운동가만 200여명 = 해방이후 석주의 후손들이 호적을 얻고 임청각에 대한 등기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일제 때 불가피하게 문중원로 4명의 명의로 등기를 했지만 이후 문중 원로 4명의 후손이 4~5대를 지나면서 소유권은 갈수록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청각의 원래 주인을 찾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석주의 증손자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항증 감사는 “소유권 자체가 불투명해져 임청각에 대한 관리 자체가 어렵다”며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아 국가에 헌납하고 싶어도 어렵다”고 말했다. 문화재급 고택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신채호 선생의 아들이 선생의 호적이 없어 재판을 통해 가호적을 만든 사실이 있다”며 “하지만 묘소 이장이나 재산권 등 지금도 민법상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유족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국적 없는 독립운동가만 200여명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독립운동가 선친을 뒀다는 이유로 이런 설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며 “국가가 나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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