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28일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꽤 규모가 큰 유적지다. 그러나 대리석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마주한 기념비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기념비 글씨는 흐려서 잘 알아보기 힘들고 올라가는 길에 대리석이 여기저기 무너지고 깨져있어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라는 표지까지 서 있는 형편이다. 그간 전혀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기념비는 2001년 보훈처에서 3억5천만원을 지원해 조성한 것이다.
기념비 옆으로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에서부터 화룡, 용정에 이르는 중국의 변경지방을 개발하기 위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대규모 교각 건설작업이 한창이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연길을 통해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청산리항일대첩비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전에 부서진 부분은 고치고 관리자를 물색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다음으로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를 모신 대종교의 삼종사묘를 찾았지만 여기도 역시 관리문제가 있어 보인다. 철망을 치고 대리석 담장이 있어 주변에서 키우는 말 등이 침범하기는 어렵겠지만 묘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봉분의 흙이 흘러내려 이를 막으려는 듯 마대를 덮어놓은 것이 마음 아프다. 화룡시문화보호문물단위로 지정되어 있는데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문제다. 준비해간 과일과 술 한 잔을 올리고 간단한 추모식을 가졌다. 답사단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용정을 떠나는 길에 마을을 보니 몇 집 건너 한집씩 초가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와집의 경우 지붕의 형태에 따라 맛배지붕 집은 한족이 사는 집이고 팔작지붕집은 조선족 집이라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또한 벼농사를 하는 지역이 있으면 대체로 그곳은 조선족이 사는 지역이라고 보면 맞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벼농사보다는 밭작물이 더 많은 소득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경작의 형태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에 올랐지만 비바람에 천지를 내려다보는 행운은 얻지 못했다. 다만 장백폭포 옆으로 계단길을 통해 올라가 천지 일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동북 항일연군 총사령관이었던 중국인 항일명장 양정우열사능원은 우선 그 규모가 대단했다. 양정우 장군의 흉상이 있는 제일 안쪽 건물에는 그를 칭송하는 ‘인민영웅 양정우동지 영수불후’라고 쓴 주덕의 글씨며 김일성 김일 최헌 등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보낸 화환도 놓여있다. 1989년 4월에 준공된 이 열사능원의 동북항일연군 건제표에는 제2방면군 지휘를 김일성이 맡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능원 좌측 전시관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제1군전두서열표에 제1사장겸 정위에 이홍광이라는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지하에 설치된 동북항일연군 업적전시관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만주 항일연군의 구성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는 것을 여성대원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빈현 왕청문에서 양세봉 장군의 동상을 본 소감은 착잡하고 씁쓸함이었다. 양세봉 장군은 흑석동 국립묘지에도 가묘가 있고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도 묘가 있을 정도로 남북한에서 함께 인정한 항일독립투사다. 신빈현 왕청문진 정부에서 이 정도 규모의 동상을 세운 것을 봐도 그 활동을 높이 기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상 뒤편에는 지붕이 떨어져 나간 폐교 건물이 흉물스럽고 주변은 개의 배설물 등으로 지저분했다. 답사대원들이 동상앞에서 설명을 듣는 사이 김정동이라는 84세 된 노인이 관리를 맡고 있다고 하며 동상 입구문을 열어주었다. 양정우열사능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에 동상 외에 별다른 전시물이 없다는 점 때문에 많은 아쉬움이 있다.
화룡 신빈 = 김왕수 기자 kw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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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꽤 규모가 큰 유적지다. 그러나 대리석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마주한 기념비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기념비 글씨는 흐려서 잘 알아보기 힘들고 올라가는 길에 대리석이 여기저기 무너지고 깨져있어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라는 표지까지 서 있는 형편이다. 그간 전혀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기념비는 2001년 보훈처에서 3억5천만원을 지원해 조성한 것이다.
기념비 옆으로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에서부터 화룡, 용정에 이르는 중국의 변경지방을 개발하기 위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대규모 교각 건설작업이 한창이다. 이 도로가 완성되면 연길을 통해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청산리항일대첩비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전에 부서진 부분은 고치고 관리자를 물색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다음으로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를 모신 대종교의 삼종사묘를 찾았지만 여기도 역시 관리문제가 있어 보인다. 철망을 치고 대리석 담장이 있어 주변에서 키우는 말 등이 침범하기는 어렵겠지만 묘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봉분의 흙이 흘러내려 이를 막으려는 듯 마대를 덮어놓은 것이 마음 아프다. 화룡시문화보호문물단위로 지정되어 있는데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문제다. 준비해간 과일과 술 한 잔을 올리고 간단한 추모식을 가졌다. 답사단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용정을 떠나는 길에 마을을 보니 몇 집 건너 한집씩 초가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와집의 경우 지붕의 형태에 따라 맛배지붕 집은 한족이 사는 집이고 팔작지붕집은 조선족 집이라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또한 벼농사를 하는 지역이 있으면 대체로 그곳은 조선족이 사는 지역이라고 보면 맞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벼농사보다는 밭작물이 더 많은 소득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경작의 형태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에 올랐지만 비바람에 천지를 내려다보는 행운은 얻지 못했다. 다만 장백폭포 옆으로 계단길을 통해 올라가 천지 일부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동북 항일연군 총사령관이었던 중국인 항일명장 양정우열사능원은 우선 그 규모가 대단했다. 양정우 장군의 흉상이 있는 제일 안쪽 건물에는 그를 칭송하는 ‘인민영웅 양정우동지 영수불후’라고 쓴 주덕의 글씨며 김일성 김일 최헌 등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보낸 화환도 놓여있다. 1989년 4월에 준공된 이 열사능원의 동북항일연군 건제표에는 제2방면군 지휘를 김일성이 맡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능원 좌측 전시관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제1군전두서열표에 제1사장겸 정위에 이홍광이라는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지하에 설치된 동북항일연군 업적전시관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만주 항일연군의 구성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는 것을 여성대원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빈현 왕청문에서 양세봉 장군의 동상을 본 소감은 착잡하고 씁쓸함이었다. 양세봉 장군은 흑석동 국립묘지에도 가묘가 있고 북한의 애국열사릉에도 묘가 있을 정도로 남북한에서 함께 인정한 항일독립투사다. 신빈현 왕청문진 정부에서 이 정도 규모의 동상을 세운 것을 봐도 그 활동을 높이 기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상 뒤편에는 지붕이 떨어져 나간 폐교 건물이 흉물스럽고 주변은 개의 배설물 등으로 지저분했다. 답사대원들이 동상앞에서 설명을 듣는 사이 김정동이라는 84세 된 노인이 관리를 맡고 있다고 하며 동상 입구문을 열어주었다. 양정우열사능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에 동상 외에 별다른 전시물이 없다는 점 때문에 많은 아쉬움이 있다.
화룡 신빈 = 김왕수 기자 kw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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