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비난받고 친일은 변명을 넘어 찬양으로까지 나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해방 62주년을 맞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기획을 마련했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 상실
정부, 희생자 고통 껴안아야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 물적자원을 수탈해 갔다. 시골농가의 부뚜막에 있는 숟가락부터 청년은 일본군대로 처녀는 일본군인의 성적 노리개로 끌려갔다. 그러나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징병징용자들의 한많은 삶은 한일 양국정부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남태평양 외딴섬에서 풀뿌리로 연명 = 대전에 사는 김종만(89)씨는 1941년 태평양 전쟁에 끌려갔다. 김씨가 일제에 강제로 징병을 당한 것은 스무살 때인 1938년이다. 군대에 안가면 가족들에게 지급되던 배급표를 빼앗겨야 하는 처지였다. 3년을 용산역 부근 부대에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김씨가 끌려간 곳은 호주 바로 위에 있는 뉴기니아 뉴브르벤토 뉴아이루란도 등 남태평양 3개 섬이다. 일본군이 궁극적으로 노린 곳은 이들 섬 너머에 있는 호주였다. 일본의 공격에 미군의 반격은 거셌다. 미군은 매일 9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엄청난 양의 폭탄을 이곳에 퍼부었다. 김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산이 무너지면서 5m 땅속에 묻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다친 척추가 이후 평생 김씨의 삶을 괴롭혔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이들 섬에서 완전히 고립됐다. 보급로가 완전히 끊긴 일본군은 섬에서 풀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김씨 등 50여명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1946년 10월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비행기 정비도 = 선태수(83)씨는 1943년 8월, 당시 대구직업학교 졸업반의 신분으로 일본 다구시마현 이스미 항공학교를 5개월만에 수료하고 10명의 조선인과 함께 가노야 항공기지에 배치됐다. 일본특공대의 비행기를 정비했던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굴속에서 생활했다. 선씨는 해방이 되고도 열흘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선씨는 1945년 9월 20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태평전쟁 기간동안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몇가지 단서를 통해서 추측할 뿐이다. (사)일제강제연행한국인생존자협회(회장 선태수)가 지난 2005년 공개한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은 중일전쟁 때 17만9212명, 제2차 세계대전 때 133만9930명 등 모두 151만9142명이 징용됐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지난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우리가 일본측에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생존자 93만명을 포함해 103만명이었다”며 “일본 자료를 보더라도 연인원 750여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올 6월까지 정부가 접수한 피해신고에 따르면 노무자가 13만769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군인 2만9946명, 군속 2만4576명, 위안부 303명 등 19만3836명이었다.
◆역대 한국정부 무관심 일관 = 태평양 전쟁 관련자의 고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됐다. 국가는 그들이 일본에 제기할 개인 청구권을 빼앗았다. 한일협정 협상당시 양국간에 오간 회의록은 최근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72년이다. 박정희 정권이 태평양 전쟁 희생 유족들에게 1인당 30만원씩 보상금을 지급한다며 신고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보상금액이 너무 적고 사망자한테만 지급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로 지적됐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를 면담했던 선태수씨는 “김 부총리가 ‘지금은 국가가 어려운 만큼 국민소득 2000달러가 되면 생존자들에게도 보상을 할 것’이라고 면담 때 약속했다”고 말했다. 선씨는 “유신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들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고 탄식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생존자들은 죽도록 고생했으면서도 일제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살아왔다”며 “생존자들 대부분이 80대 고령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이들의 명예를 국가가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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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 상실
정부, 희생자 고통 껴안아야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 물적자원을 수탈해 갔다. 시골농가의 부뚜막에 있는 숟가락부터 청년은 일본군대로 처녀는 일본군인의 성적 노리개로 끌려갔다. 그러나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징병징용자들의 한많은 삶은 한일 양국정부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남태평양 외딴섬에서 풀뿌리로 연명 = 대전에 사는 김종만(89)씨는 1941년 태평양 전쟁에 끌려갔다. 김씨가 일제에 강제로 징병을 당한 것은 스무살 때인 1938년이다. 군대에 안가면 가족들에게 지급되던 배급표를 빼앗겨야 하는 처지였다. 3년을 용산역 부근 부대에 있다가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김씨가 끌려간 곳은 호주 바로 위에 있는 뉴기니아 뉴브르벤토 뉴아이루란도 등 남태평양 3개 섬이다. 일본군이 궁극적으로 노린 곳은 이들 섬 너머에 있는 호주였다. 일본의 공격에 미군의 반격은 거셌다. 미군은 매일 9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엄청난 양의 폭탄을 이곳에 퍼부었다. 김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산이 무너지면서 5m 땅속에 묻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다친 척추가 이후 평생 김씨의 삶을 괴롭혔다.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은 이들 섬에서 완전히 고립됐다. 보급로가 완전히 끊긴 일본군은 섬에서 풀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김씨 등 50여명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1946년 10월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비행기 정비도 = 선태수(83)씨는 1943년 8월, 당시 대구직업학교 졸업반의 신분으로 일본 다구시마현 이스미 항공학교를 5개월만에 수료하고 10명의 조선인과 함께 가노야 항공기지에 배치됐다. 일본특공대의 비행기를 정비했던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굴속에서 생활했다. 선씨는 해방이 되고도 열흘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선씨는 1945년 9월 20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태평전쟁 기간동안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몇가지 단서를 통해서 추측할 뿐이다. (사)일제강제연행한국인생존자협회(회장 선태수)가 지난 2005년 공개한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은 중일전쟁 때 17만9212명, 제2차 세계대전 때 133만9930명 등 모두 151만9142명이 징용됐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지난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우리가 일본측에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생존자 93만명을 포함해 103만명이었다”며 “일본 자료를 보더라도 연인원 750여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올 6월까지 정부가 접수한 피해신고에 따르면 노무자가 13만769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군인 2만9946명, 군속 2만4576명, 위안부 303명 등 19만3836명이었다.
◆역대 한국정부 무관심 일관 = 태평양 전쟁 관련자의 고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됐다. 국가는 그들이 일본에 제기할 개인 청구권을 빼앗았다. 한일협정 협상당시 양국간에 오간 회의록은 최근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72년이다. 박정희 정권이 태평양 전쟁 희생 유족들에게 1인당 30만원씩 보상금을 지급한다며 신고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보상금액이 너무 적고 사망자한테만 지급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로 지적됐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를 면담했던 선태수씨는 “김 부총리가 ‘지금은 국가가 어려운 만큼 국민소득 2000달러가 되면 생존자들에게도 보상을 할 것’이라고 면담 때 약속했다”고 말했다. 선씨는 “유신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들은 관심 자체가 없었다”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고 탄식했다.
양순임 태평양전쟁유족회 회장은 “생존자들은 죽도록 고생했으면서도 일제에 부역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살아왔다”며 “생존자들 대부분이 80대 고령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이들의 명예를 국가가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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