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20.> 호남 창평들의 원림과 정자들

대지와 하늘 사이에 세워진 소리와 시의 정원들

지역내일 2001-04-12 (수정 2001-04-13 오후 6:01:00)
굽어서는 대지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그 사이에 정자를 세워 호연지기를 일으키리
바람과 달 불러들이고, 산과 내를 끌어당겨
명아주 지팡이 짚고 한평생을 보내리라
- <면앙정삼언가>. 면앙정 송 순

중종 28년, 면앙정 송순(1493~1582)은 그의 나이 41세 때 전남 담양의 봉산 제월봉 언덕에 면앙정이란
정자를 짓고 이 시를 지었다.
송순이 누구인가. 어느 가을날 명종이 뜰에 핀 국화 한 떨기를 꺾어 옥당관에게 주고 노래를 지어 바
치라 했을 때, 옥당관 대신 ‘풍상에 섞어진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
오니 / 이화야 꽃인 체 말라 님의 뜻을 알괘라’라는 즉흥시조를 지어 왕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그는 27세 때 별과에 급제했는데, 당시 시험감독을 했던 조광조와 남곤은 송순의 대책 읽는 소리를
듣고 “김일손 이후에 이와 같은 문장은 일찍이 없었다”고 칭찬했다. 국문학자들은 송순의 면앙정
을 ‘호남지방 최초의 국문시사 가단이요, 깊이 보면 호남지방 모든 시가의 총본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모인 개혁사림파들
16세기 영남지방에서 도산서당이나 청암정 등의 성리학적 공간들이 세워질 무렵(본지 123호 참조), 호
남지방 곳곳에도 낙향한 선비들의 은둔적 공간들이 지어졌다.
이들 호남 사림들의 연원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 등으로 대표되는 고려말 ‘사학파’로 거슬러올라
간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후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학파’들
과는 달리, 이들은 절의를 중하게 여겨 은둔하거나 낙향해 학문 연마에 힘썼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지리산 산골에서 학문을 닦으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학문을 닦는 선비가 있으면 그 밑으로 제자들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에서 조
광조·최산두가 나왔고 이후 여러 갈래로 학맥이 형성되었다. 조광조와 교류했던 기준과 고운이 있
었으니 기준의 학맥은 기대승―정철로 이어졌고, 고운의 학풍은 고경명―고종후―고인후로 이어졌
다. 최산두의 학풍은 김인후―정철 등으로 이어졌다.
호남에서 길러진 사림파들은 이후 엄청난 인력풀을 형성, 성리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현실정치
의 모순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중종 대에 이르러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그룹, 이
른바 ‘개혁사림파’를 이루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모인 개혁사림파들은 중종을 도와 신유학을 장려하고 소학을 숭상하며 중국 요순
의 도를 현실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 또 성리학을 숭상하며 미신을 타파하고 유교 이념에 의한 개혁
을 단행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남도 정신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기득권을 쥐고 있던 왕실 내 훈구세력과 부딪쳐 끝내 기묘사화라는 조선조
최대·최악의 사화를 맞게 된다. 게다가 젊은 선비들의 기개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이들을 대부분 고
향(본인 혹은 부모의 고향)인 전라도로 유배를 보낸다.
전라도로 다시 돌아와 기약없는 전원생활을 하게 된 이들 ‘미완의 혁명가’들은 전라도의 정서와
자연을 담아 못다 한 혁명의 노래를 불렀으니, 무등산 뒤편 담양군 남면 일대에 면앙정 송강정 명옥
헌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등의 정자와 원림들이 조성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10년을 경영ㅎ여 초로 삼간 지여내니
니 한칸, 달 한칸, 청풍 한칸 맛져두고
강산은 들일듸 업스니 둘러두고 보리라
- 면앙정 송순
중앙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남도 선비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인 남도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남도의 정신을 다시 일구기 시작했다. 광산의 박상과 기대승, 장성의 김인후가 3대 산맥을 이루었
고, 그 뒤로 해남의 석천 임억령, 담양의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광산의 제봉 고경
명 등이 남도사림의 맥을 이어갔다.

자미탄을 2km 안에 다 모여 있어
무등산 북동쪽, 담양군 남면 광주호 상류 일대는 ‘별뫼(星山)’라는 작은 산을 끼고 있어 ‘별뫼’
혹은 ‘창평들’로 불리는 곳이다. 16~17세기 이곳에는 수많은 정자와 원림들이 지어졌으며 <>
곡>으로 대표되는 특별한 문화권을 형성했다.
별뫼지역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꼽히는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은 모두 자미탄(무등산에서 발원하여 광
주호로 흘러드는 증심천의 옛 이름)을 중심으로 2km 안에 자리하고 있다. 원림들은 모두가 독자적인
문학동아리들을 운영했다. ‘면앙정 가단’ ‘식영정 가단’ ‘환벽당 가단’으로 불리던 그들은 이
후 한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소위 ‘가사문학’이라는 것의 탄생 배경에는 남도 선비들의 격조높은 성리학적 성과, 도학적 기풍,
폭넓은 교유, 사림·절의정신으로 축약되는 남도정신의 성숙이 한몫 했다. (남도의) 지역정서와 풍
토 자체가 예술적이어서 또 하나의 문학장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붓으로 맺고="" 색으로="" 풀다="">. 남성숙
이렇듯 높은 철학적 경지와 자연과 교감하는 빼어난 안목으로 지어진 이곳 원림과 정자들은 그러나
요즘 들어 늘어나는 인파와 주변개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원림으로 가는 광주호 일대의 접근로는 각양각색의 디자인으로 멋을 낸 음식점들로 가득하다. 소쇄
원 주변의 대나무숲에는 온통 글씨가 새겨져 있고, 입장료가 없는 탓인지 무작정 몰려드는 행락객들
로 왁자지껄하다.
어떤 이들은 소쇄원 정자 마루 위에서 음식물을 먹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광풍각이
나 제월당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와서는 오곡문(소쇄원 제일 북쪽
담장에 있는 문)을 지나며 “소쇄원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돼요?” 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소쇄원을 다시 ‘소쇄(瀟灑)’하게 하려면 관람인원을 제한해야 한다. 고액의 입장료도 받고, 주차
료도 받고, 15대손 직강 설명회의 참가비도 받아야 한다. … 여기서 나오는 작은 잉여금이라도 소쇄
원 보존에 재투자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양씨 집안의 가훈에 한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볼 자
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말라’고.”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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