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언덕 위에 풀빛 푸른데 /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 해마
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이 시는 고려 시대의 천재 시인 정지상이 지은 <님을 보내며="">(送君)라는 절창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이 얼마나 많이 대동강에 보태어지는지 그 강물이 결코 마를 리 없다는, 함축적 표현의 묘를 얻
었다.
이별 눈물 마를 날 없는 민족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강제된 이별, 생이별의 눈물은 많고도 많았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도 이별
에 애끓는 서정적 표현은 너무도 많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기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그러하
며, 고려가요 <가시리>와 민요 <아리랑>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진달래꽃>에서는 님이 떠나가시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역설적 어법으로 이에 대한 절대반
대의 심경을, <가시리>에서는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것이 서운하여 아니올까봐 보내드리오니 가시자
마자 생각을 바꾸어서 돌아오라는 간곡한 탄원을, 그리고 <아리랑>에서는 10리길 안에 발병이 나서
아예 떠날 수 없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미련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타계한 지 오래인 작가 이병주의 장편 산하 초입에는, "정을 두고 떠날 때 산하의 그 아름이
란!"과 같은 기막힌 문장이 있다. 기실 우리는 이와 같은 수사 하나에도, 또는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
와 부합되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도, 얼마나 깊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힘이 있는가를 깨우
치게 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나 '러브 스토리' 같은 영화는, 마지막 대목에 사별의 문제를 매설하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는 "나는 죽지 않아. 당신과 함께 가는 거지", "(죽음 앞에서도) 사랑은 미안하다
고 말하지 않는 거야"와 같은 유명한 결어를 남기고 있어서, 아직도 젊은날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한
다.
백성의 눈물 닦아주는 정치
미상불 눈물은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정화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카
타르시스 문학론'의 요목으로 공포와 연민의 눈물을 내세웠던 것이다. 서양속담에는, "몸으로 나타나
지 않은 슬픔은 위장이 그 점수를 매긴다"는 표현법이 있다.
그러기에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낙담과 마주하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막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울어야 할 때는 울도록 내버려두어야 옳다.
그러나 그 눈물의 세월이 반백년을 훨씬 넘어섰다면, 이것은 간단하지 않다.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자기 몫의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눈물로 위안을 삼는 것은 매우 개별적인 차원의 문제이
지만, 이 백성들을 섬기고 또 치리하는 지도력에 있어서는 공적인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노력의 총괄적 표현이 아닐까? 한 나라
의 위정자가 그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부차적인 것으로, 구성원들을 편안하
고 행복하게 하는 노력을 중점적인 것으로 할 때가 아니겠는가?
이산가족의 눈물 보살펴야
이 나라의 일천만 이산가족들은 곧 돌아오마 손짓하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와서 반세기가 지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인위적 장벽 앞에 그동안 쏟은 통한의 눈물이 무릇 얼마인
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이처럼 생이별한 가족과 강제로 격리된 고향을 그리는 눈물에 저 장벽이 떠밀려 갈 때도 되었음직 한
데, 더욱이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을 내놓고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는 물꼬가 터졌
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이산가족을 위한 문안과 재회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산가족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이 시대의 남북 지도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이 민초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생사확인과 안부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신교환, 판문점이든 금강산이든 어디
든지 좋으니 이산가족의 면회소 설치 등을 조속히 실현해야 한다.
고향의 문전옥답을 두 발로 밟아보거나, 선산을 찾아 성묘하거나, 더 나아가 재결합해 함께 살기까지
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선 눈앞에 있는 기본적인 것부터 먼저 해결해 보여야 할 터이다. 고령의 이
산 1세대들에게 남은 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금의 진전도 없다면, 그 책임있는 이 모두
가 존경받는 지도자이기를 포기해야 마땅할 듯하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 / 경희대 교수아리랑>가시리>진달래꽃>아리랑>가시리>진달래꽃>님을>
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이 시는 고려 시대의 천재 시인 정지상이 지은 <님을 보내며="">(送君)라는 절창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이 얼마나 많이 대동강에 보태어지는지 그 강물이 결코 마를 리 없다는, 함축적 표현의 묘를 얻
었다.
이별 눈물 마를 날 없는 민족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강제된 이별, 생이별의 눈물은 많고도 많았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도 이별
에 애끓는 서정적 표현은 너무도 많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기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그러하
며, 고려가요 <가시리>와 민요 <아리랑>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진달래꽃>에서는 님이 떠나가시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역설적 어법으로 이에 대한 절대반
대의 심경을, <가시리>에서는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것이 서운하여 아니올까봐 보내드리오니 가시자
마자 생각을 바꾸어서 돌아오라는 간곡한 탄원을, 그리고 <아리랑>에서는 10리길 안에 발병이 나서
아예 떠날 수 없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미련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타계한 지 오래인 작가 이병주의 장편 산하 초입에는, "정을 두고 떠날 때 산하의 그 아름이
란!"과 같은 기막힌 문장이 있다. 기실 우리는 이와 같은 수사 하나에도, 또는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
와 부합되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에도, 얼마나 깊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힘이 있는가를 깨우
치게 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나 '러브 스토리' 같은 영화는, 마지막 대목에 사별의 문제를 매설하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는 "나는 죽지 않아. 당신과 함께 가는 거지", "(죽음 앞에서도) 사랑은 미안하다
고 말하지 않는 거야"와 같은 유명한 결어를 남기고 있어서, 아직도 젊은날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한
다.
백성의 눈물 닦아주는 정치
미상불 눈물은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정화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카
타르시스 문학론'의 요목으로 공포와 연민의 눈물을 내세웠던 것이다. 서양속담에는, "몸으로 나타나
지 않은 슬픔은 위장이 그 점수를 매긴다"는 표현법이 있다.
그러기에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낙담과 마주하여,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막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울어야 할 때는 울도록 내버려두어야 옳다.
그러나 그 눈물의 세월이 반백년을 훨씬 넘어섰다면, 이것은 간단하지 않다.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자기 몫의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눈물로 위안을 삼는 것은 매우 개별적인 차원의 문제이
지만, 이 백성들을 섬기고 또 치리하는 지도력에 있어서는 공적인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는 노력의 총괄적 표현이 아닐까? 한 나라
의 위정자가 그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부차적인 것으로, 구성원들을 편안하
고 행복하게 하는 노력을 중점적인 것으로 할 때가 아니겠는가?
이산가족의 눈물 보살펴야
이 나라의 일천만 이산가족들은 곧 돌아오마 손짓하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와서 반세기가 지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인위적 장벽 앞에 그동안 쏟은 통한의 눈물이 무릇 얼마인
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이처럼 생이별한 가족과 강제로 격리된 고향을 그리는 눈물에 저 장벽이 떠밀려 갈 때도 되었음직 한
데, 더욱이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을 내놓고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는 물꼬가 터졌
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이산가족을 위한 문안과 재회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산가족들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이 시대의 남북 지도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이 민초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생사확인과 안부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신교환, 판문점이든 금강산이든 어디
든지 좋으니 이산가족의 면회소 설치 등을 조속히 실현해야 한다.
고향의 문전옥답을 두 발로 밟아보거나, 선산을 찾아 성묘하거나, 더 나아가 재결합해 함께 살기까지
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선 눈앞에 있는 기본적인 것부터 먼저 해결해 보여야 할 터이다. 고령의 이
산 1세대들에게 남은 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금의 진전도 없다면, 그 책임있는 이 모두
가 존경받는 지도자이기를 포기해야 마땅할 듯하다.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사무국장 / 경희대 교수아리랑>가시리>진달래꽃>아리랑>가시리>진달래꽃>님을>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