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짜 변화하고 있나
94·2000·2007년 … 같은 형식, 다른 풍경
당세포 비서대회 … 전쟁위협 대응에서 개방준비로
대외관계 … 클린턴 말기 학습효과 “이번엔 다르다”
지난 26~27일 평양에서 열린 ‘전국당세포비서대회’는 94년 이후 14년 만에 두 번째로 열린 조선노동당의 대규모 행사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90년대 초반 불거지기 시작한 1차 핵위기로 미국의 영변핵시설 공습이 예고되던 94년의 한반도 정세와 북미관계 정상화가 속도를 내고 있는 현재 정세의 질적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의장, 김영일 내각 총리가 잇따라 해외순방길에 오르며 대외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모습도 2000년과 유사하지만 짚어볼 측면이 많다.
◆김정일 위원장식 변화 대비 =
당세포는 70년대 전국 기층단위에서의 ‘당 영도’를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확대된 조직체계로 3대혁명소조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를 뒷받침했다. 조선노동당 중앙당에도 별도의 당세포가 있을 정도로 이중 삼중의 그물망식 통제를 정착시킨 북한사회의 근간이기도 하다.
94년 당세포 비서대회는 북한사회의 위기 대응방식을 그대로 보여줬다.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영변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외과수술식 공습 예고는 사상적, 안보적 위기를 불러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결속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조선노동당의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회를 통해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당세포 비서대회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택했다. 측근과의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 많았던 김일성 주석의 통치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당세포 비서대회 개최는 정세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판단이 녹아있다. 현재를 94년만큼이나 중요한 정세의 변곡점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당세포 비서대회가 시작된 26일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현재의 정세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새로운 전환적 국면을 맞이하였다”고 평가하면서 “(당세포 비서들이) 선군사상교양, 사회주의교양을 진공적으로 벌려 … 우리의 사상과 제도, 우리의 위업을 견결히 수호해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물론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정치국 후보위원과 중앙위원회 비서 다수가 참석하고 중앙위원회 명의의 축하문을 보냄으로써 당세포 비서대회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한 것도 잊지 않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실장은 “개방을 하면 할수록 역으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북한 체제의 특성”이라며 “당세포 비서대회는 개방이 가져올 역작용을 통제하고 개방에 대비하겠다는 차원에서 열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트남과의 관계강화는 ‘커다란 사변’ =
50년만에 이뤄진 베트남공산당 서기장의 방북에서도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농 득 마잉 서기장과 만난 김정일 위원장이 베트남의 20년 간에 걸친 도이모이(革新) 정책의 성취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베트남의 ‘귀중한 경험’을 거울로 삼기 위해 베트남 측의 답방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대목(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의 28일자 보고, 팜 자 키엠 베트남 부총리 겸 외교장관 인터뷰)은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베트남 관계정상화와 정치체제는 유지하되 경제는 개혁하는 베트남의 경험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북한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다. 대베트남 관계강화에 대해 북한이 ‘커다란 사변’이라고 평가(노동신문 16일자 사설)한 것도 외교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장을 중시하는 스타일인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 50주년이 되는 내년 베트남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여기에다 최근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의장, 김영일 내각총리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잇따라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고 올해 들어서만 아랍에미리트연합을 비롯해 6개 국가와 국교를 정상화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미국과 국고 수립 직전까지 갔던 클린턴 정부 말기였던 2000년에도 북한의 외교관계는 숨가쁘게 진행된 바 있다. 1월 선진 7개국(G7) 최초로 이탈리아와 국교를 맺은데 이어 4~8월까지는 3차례에 걸쳐 일본과 수교 교섭을 벌였다. 5월에는 24년간 동결됐던 호주와 관계정상화에 성공했고 1994년부터 미적거렸던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도 가입했다. 북한은 그 동안 ‘ARF 회원국과 모두 국교를 맺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겠다’며 버텼었다.
◆“북미관계 정상화 실패 안된다” … 절박한 북한 =
대외활동 측면에서 2000년과 2007년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부시 행정부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 피그미 등으로 폄하하며 클린턴 행정부의 성과를 깡그리 무시하지만 않았더라도 북-미 관계는 지금과 현격히 달랐을 것이다.
북미관계 정상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임기를 1년여밖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2000년과 똑같은 결말로 이어질 수 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는 다르다.
우선 북한이 2000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가장 큰 차이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지적했듯이 ‘돌이킬 수 없는 북미관계 정상화’의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북미가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대부분 소진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지난해 10월 핵실험은 북한이 미국을 비롯해 국제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렛대였다. ‘이번에는 북미관계 정상화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북한의 자발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수십년 동안 적들의 봉쇄 속에서 살아왔다고 하지만 그 규모와 분야, 그 수법에 있어서 최근 시기처럼 강도 높고 비열한 제재가 가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노동신문 29일자 사설)는 북한 스스로의 표현처럼 ‘금융제재의 효과’를 절감했다는 점도 달라진 지점이다.
물론 북한의 변화에 대해 모두가 공통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전문가들도 상당하다.
통일부 당국자는 “정권유지를 위해 실리만을 추구할지,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일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김정일 위원장도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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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000·2007년 … 같은 형식, 다른 풍경
당세포 비서대회 … 전쟁위협 대응에서 개방준비로
대외관계 … 클린턴 말기 학습효과 “이번엔 다르다”
지난 26~27일 평양에서 열린 ‘전국당세포비서대회’는 94년 이후 14년 만에 두 번째로 열린 조선노동당의 대규모 행사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90년대 초반 불거지기 시작한 1차 핵위기로 미국의 영변핵시설 공습이 예고되던 94년의 한반도 정세와 북미관계 정상화가 속도를 내고 있는 현재 정세의 질적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의장, 김영일 내각 총리가 잇따라 해외순방길에 오르며 대외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모습도 2000년과 유사하지만 짚어볼 측면이 많다.
◆김정일 위원장식 변화 대비 =
당세포는 70년대 전국 기층단위에서의 ‘당 영도’를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확대된 조직체계로 3대혁명소조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를 뒷받침했다. 조선노동당 중앙당에도 별도의 당세포가 있을 정도로 이중 삼중의 그물망식 통제를 정착시킨 북한사회의 근간이기도 하다.
94년 당세포 비서대회는 북한사회의 위기 대응방식을 그대로 보여줬다.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영변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외과수술식 공습 예고는 사상적, 안보적 위기를 불러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결속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조선노동당의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회를 통해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당세포 비서대회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택했다. 측근과의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 많았던 김일성 주석의 통치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당세포 비서대회 개최는 정세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판단이 녹아있다. 현재를 94년만큼이나 중요한 정세의 변곡점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당세포 비서대회가 시작된 26일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현재의 정세를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새로운 전환적 국면을 맞이하였다”고 평가하면서 “(당세포 비서들이) 선군사상교양, 사회주의교양을 진공적으로 벌려 … 우리의 사상과 제도, 우리의 위업을 견결히 수호해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물론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정치국 후보위원과 중앙위원회 비서 다수가 참석하고 중앙위원회 명의의 축하문을 보냄으로써 당세포 비서대회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한 것도 잊지 않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실장은 “개방을 하면 할수록 역으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북한 체제의 특성”이라며 “당세포 비서대회는 개방이 가져올 역작용을 통제하고 개방에 대비하겠다는 차원에서 열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트남과의 관계강화는 ‘커다란 사변’ =
50년만에 이뤄진 베트남공산당 서기장의 방북에서도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농 득 마잉 서기장과 만난 김정일 위원장이 베트남의 20년 간에 걸친 도이모이(革新) 정책의 성취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베트남의 ‘귀중한 경험’을 거울로 삼기 위해 베트남 측의 답방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대목(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의 28일자 보고, 팜 자 키엠 베트남 부총리 겸 외교장관 인터뷰)은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북-베트남 관계정상화와 정치체제는 유지하되 경제는 개혁하는 베트남의 경험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북한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다. 대베트남 관계강화에 대해 북한이 ‘커다란 사변’이라고 평가(노동신문 16일자 사설)한 것도 외교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장을 중시하는 스타일인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베트남 방문 50주년이 되는 내년 베트남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여기에다 최근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의장, 김영일 내각총리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잇따라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고 올해 들어서만 아랍에미리트연합을 비롯해 6개 국가와 국교를 정상화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미국과 국고 수립 직전까지 갔던 클린턴 정부 말기였던 2000년에도 북한의 외교관계는 숨가쁘게 진행된 바 있다. 1월 선진 7개국(G7) 최초로 이탈리아와 국교를 맺은데 이어 4~8월까지는 3차례에 걸쳐 일본과 수교 교섭을 벌였다. 5월에는 24년간 동결됐던 호주와 관계정상화에 성공했고 1994년부터 미적거렸던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에도 가입했다. 북한은 그 동안 ‘ARF 회원국과 모두 국교를 맺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겠다’며 버텼었다.
◆“북미관계 정상화 실패 안된다” … 절박한 북한 =
대외활동 측면에서 2000년과 2007년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부시 행정부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 피그미 등으로 폄하하며 클린턴 행정부의 성과를 깡그리 무시하지만 않았더라도 북-미 관계는 지금과 현격히 달랐을 것이다.
북미관계 정상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임기를 1년여밖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2000년과 똑같은 결말로 이어질 수 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는 다르다.
우선 북한이 2000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가장 큰 차이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지적했듯이 ‘돌이킬 수 없는 북미관계 정상화’의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북미가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대부분 소진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지난해 10월 핵실험은 북한이 미국을 비롯해 국제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렛대였다. ‘이번에는 북미관계 정상화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북한의 자발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수십년 동안 적들의 봉쇄 속에서 살아왔다고 하지만 그 규모와 분야, 그 수법에 있어서 최근 시기처럼 강도 높고 비열한 제재가 가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노동신문 29일자 사설)는 북한 스스로의 표현처럼 ‘금융제재의 효과’를 절감했다는 점도 달라진 지점이다.
물론 북한의 변화에 대해 모두가 공통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전문가들도 상당하다.
통일부 당국자는 “정권유지를 위해 실리만을 추구할지,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일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김정일 위원장도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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