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형칼럼>
손 흔드는 북 어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가는 내내울적함과 연민 같은 감정이 뒤섞여 착잡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계단식 밭, 헐벗은 민둥산,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을, 폐가 같은 가옥들이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개성 시내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부지런히 타고 가는 여성들, 손을 흔들면 무표정한 어른들과는 달리 밝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겨우 안도했다.
개성 관광길이 열린 지 한 달이 되던 지난 5일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일원을 9시간 동안 둘러봤다. 박연폭포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이어 개성공단에도 들렀다.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박연폭포는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수로 패인 고모담 서쪽 기슭에는 용바위가 있었는데 표면에 이태백의 시 ‘飛流直下三千尺疑視銀河落九天(날아 흘러 곧추 떨어지는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하구나)’이 초서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중년 여성인 안내원은 구성진 목소리로 송도 명기 황진이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자신의 머리채로 이 시를 단숨에 썼다면서 “그 동안 아무도 글 뜻을 몰랐는데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뜻풀이를 하여 인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연폭포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관음사로 가는 길목에 대흥산성이 있었다. 성벽의 북문에 오르면서 안내원은 성곽 축대로 사용된 큰 돌들을 가리키며 “요즘 같았으면 ‘장비 보내 달라 뭐 보내 달라’고 하느라 이런 성을 쌓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기계도 없이 이런 성을 쌓은 것은 축조기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조국 사랑과 애국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개성 시내 공장건물 간판은 ‘00전투장’으로 되어 있고 벽에는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라는 붉은 글씨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북한체제의 유훈통치와 선군정치의 단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10여대의 대형관광버스 행렬이 개성 시내를 통과하는 길가에는 제복을 입고 완장을 찬 군인들이 띄엄띄엄 배치돼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선죽교와 표충비를 걸어서 관광할 때는 길 건너 북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관광버스에 2명씩 배치된 북측 안내요원들은 이동 중에는 외부 촬영을 할 수 없으며 참관지의 유물유적을 배경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인민들의 거주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북한이 남한 관광객에게서 외화벌이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모기’를 차단하기 위해 북한사회에 ‘우리식 사회주의’의 모기장을 쳐야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삼 남북 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고려성균관 건물과 부지를 활용하여 지난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에 들렀다.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려인들의 얼과 예술혼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국보급 고려청자 앞에서 울컥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조명도 없는 초라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유물들의 모습은 오늘을 어렵게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개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현대아산 사옥 옥상에 올랐다. 주위는 구릉과 평야로 광활했다. 이곳에 500년 도읍지를 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의 첫 경제특구로 오늘날 급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던 선전(심천)은 1979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개혁·개방 20여년 만에 인구 700만의 산업중심도시로 탈바꿈했고 중국 번영의 시범지역이 되었다.
개성공단을 포함한 개성은 ‘북한의 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중국대륙과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인천-개성은 지리적으로 환황해권의 3각 허브 지역으로 손색이 없다. 남북이 함께 한강과 임진강을 준설하고 이 일대에 ‘나들섬’ 같은 물류기지를 만들면 새로운 남북협력시대를 여는 것은 물론 이 지역을 새로운 동북아시장의 물류중심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때 통일부를 외교부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남북관계의 상징성과 특수성을 감안하여 존치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다. 북한을 결코 외국의 하나로 간주할 수는 없다. 개성 시내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은 비록 남북의 과거는 긴장과 불신으로 점철되어왔지만 미래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임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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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형칼럼>
손 흔드는 북 어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으로 가는 내내울적함과 연민 같은 감정이 뒤섞여 착잡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계단식 밭, 헐벗은 민둥산,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마을, 폐가 같은 가옥들이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러다가 개성 시내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부지런히 타고 가는 여성들, 손을 흔들면 무표정한 어른들과는 달리 밝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겨우 안도했다.
개성 관광길이 열린 지 한 달이 되던 지난 5일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 일원을 9시간 동안 둘러봤다. 박연폭포 관음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 등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이어 개성공단에도 들렀다.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박연폭포는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수로 패인 고모담 서쪽 기슭에는 용바위가 있었는데 표면에 이태백의 시 ‘飛流直下三千尺疑視銀河落九天(날아 흘러 곧추 떨어지는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하구나)’이 초서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중년 여성인 안내원은 구성진 목소리로 송도 명기 황진이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자신의 머리채로 이 시를 단숨에 썼다면서 “그 동안 아무도 글 뜻을 몰랐는데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께서’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뜻풀이를 하여 인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연폭포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관음사로 가는 길목에 대흥산성이 있었다. 성벽의 북문에 오르면서 안내원은 성곽 축대로 사용된 큰 돌들을 가리키며 “요즘 같았으면 ‘장비 보내 달라 뭐 보내 달라’고 하느라 이런 성을 쌓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기계도 없이 이런 성을 쌓은 것은 축조기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조국 사랑과 애국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개성 시내 공장건물 간판은 ‘00전투장’으로 되어 있고 벽에는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라는 붉은 글씨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북한체제의 유훈통치와 선군정치의 단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10여대의 대형관광버스 행렬이 개성 시내를 통과하는 길가에는 제복을 입고 완장을 찬 군인들이 띄엄띄엄 배치돼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선죽교와 표충비를 걸어서 관광할 때는 길 건너 북 주민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관광버스에 2명씩 배치된 북측 안내요원들은 이동 중에는 외부 촬영을 할 수 없으며 참관지의 유물유적을 배경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인민들의 거주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북한이 남한 관광객에게서 외화벌이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모기’를 차단하기 위해 북한사회에 ‘우리식 사회주의’의 모기장을 쳐야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삼 남북 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고려성균관 건물과 부지를 활용하여 지난 1988년에 개관한 고려박물관에 들렀다.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려인들의 얼과 예술혼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국보급 고려청자 앞에서 울컥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조명도 없는 초라한 진열장에 놓여있는 유물들의 모습은 오늘을 어렵게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개성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현대아산 사옥 옥상에 올랐다. 주위는 구릉과 평야로 광활했다. 이곳에 500년 도읍지를 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의 첫 경제특구로 오늘날 급성장의 견인차가 되었던 선전(심천)은 1979년 인구 3만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개혁·개방 20여년 만에 인구 700만의 산업중심도시로 탈바꿈했고 중국 번영의 시범지역이 되었다.
개성공단을 포함한 개성은 ‘북한의 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중국대륙과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인천-개성은 지리적으로 환황해권의 3각 허브 지역으로 손색이 없다. 남북이 함께 한강과 임진강을 준설하고 이 일대에 ‘나들섬’ 같은 물류기지를 만들면 새로운 남북협력시대를 여는 것은 물론 이 지역을 새로운 동북아시장의 물류중심으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때 통일부를 외교부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남북관계의 상징성과 특수성을 감안하여 존치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다. 북한을 결코 외국의 하나로 간주할 수는 없다. 개성 시내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은 비록 남북의 과거는 긴장과 불신으로 점철되어왔지만 미래는 평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임을 알리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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