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읽기’ ‘정치타협’ 무시하면 결국엔 역풍
효율·성과 못지않게 중요한 국민통합 … ‘갈등의 리더십’ 경계해야
이명박 당선인의 새 내각명단 발표를 강행했다. 통합민주당과의 정부조직법 협상이 결렬됐다는 이유가 뒤따랐다. 취임도 하기 전에 정치권과의 타협보다는 ‘내 갈 길을 간다’는 고집을 보여줬다.
이 당선인 나름의 이유는 있어 보인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첫 걸음이 작은 정부이고, 새 정부출범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다 크게는 지난 10년의 질서와 다른 ‘효율과 성과’ 위주의 국정운영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기존 질서의 변화는 5년 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절실한 숙제였다. 개혁을 화두로 삼은 노 대통령은 기득권 해체와 사회주류세력의 교체를 ‘개혁과 변화’로 표현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기반은 진보와 보수로 다르지만, 각 진영내부에서 비주류였다는 점은 닮은꼴이다. 노 대통령은 김대중-김영삼 시대의 비주류 정치인이 개혁의 상징으로 급부상했고, 이 당선인은 보수진영 주류인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경제의 상징으로 대선승리를 이뤘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청와대는 비주류 출신 대통령의 정치운용 방식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 안에서도 우려하는 ‘정무적 판단의 부재’는 물론, 타협보다 원칙을 앞세운 대결정치, ‘내편’과 ‘네편’을 가르는 편가르기를 활용한 갈등의 리더십 등이 교차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 부재’의 한계 =
참여정부 청와대가 ‘정무기능 부재’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는 2006년 7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대연정 제안은 한나라당과 민노당 등 야당의 철저한 외면은 물론 여당 내 전반의 반발, 호남과 개혁성향층 등 주요 지지기반의 붕괴를 부를 소재였다. 7월 공개제안 전 당·정·청 7인 수뇌부 모임에서도 절대다수가 반대했던 구상을 ‘나홀로’ 밀어붙인 결과는 참담했다. 민심이반의 거대한 물결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유력 정치인들과 청와대 참모들은 무력했다. 집권 초기부터 ‘정무적 판단능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청와대에서는 당시 “청와대의 실질적인 정무수석은 대통령”이란 자조까지 나왔다.
청와대의 정무 부재, 정치 부재 현상은 노 대통령이 ‘당정분리’를 선언한 집권 초기부터 드러났다. 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 라인을 교체하고 정무수석제를 폐지하면서 각종 국정현안에 민정수석실이 직접 나섰지만 화물연대 파업사태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전예방, 위기감지 능력 부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집권기간 내내 불거졌던 당·청갈등에서 여당측의 1순위 요구는 ‘정무수석제 부활’이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목표 좋아도 ‘편가르기’ 정치는 폐해 =
정치부재와 편가르기, 대결정치는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서 나타났다. 탄핵총선으로 과반정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그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입법 처리를 놓고 한나라당과 극한대치를 벌였다. 그해 9월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기폭제가 됐다. 폐지와 개정을 놓고 당론을 정하지 못하던 열린우리당에서 폐지론이 득세하면서 12월엔 여당의원 70여명의 국회농성으로 번졌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간 4자회담이 열려 폐지 후 보완입법으로 타협점을 찾았지만, 천 원내대표가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결렬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의 격한 반대와 여론이 돌아서면서 국보법은 자구하나 고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자기 편을 열광하게 하고, 반대편은 자극하는 갈등의 리더십을 자주 활용했다. 당시 청와대 한 참모가 “펠로우십 리더십(fellosship leadership)”이라고 정의했듯이 여론의 편을 갈라 전선을 세우는 분열의 정치였다. 부동산 정책을 비판한 조선 중앙 등을 겨냥 “광화문에 빌딩을 가진 언론사가 반대한다”며 갈라 쳤고 과거사청산, 행정수도 이전 등의 의제로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 강남지역을 타깃으로 삼은 부동산 정책은 대표적 사례다. 이런 정치는 소재에 따라 사회를 둘로 쪼갰고 ‘지지, 반대’가 아니나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으로 몰아갔다.
◆이 당선인 행보, 짙어지는 ‘노란불’ =
이명박 당선인은 경제분야 과제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정치분야 과제로 국민통합을 제시했다. 통합은 정책수요자인 국민의 심리를 읽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경쟁세력과의 조정, 협상능력이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최근 이 당선인의 몇 개 행보는 이와 거리가 있다. “국민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발언이나 지난 주 “국정운영 워크숍에 장관 내정자를 참석시키겠다고 했다”가 번복하는 등 정무판단 능력에 ‘노란불’이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정부조직개편 협상에서 통합민주당-한나라당간 잠정 합의안을 직접 뒤엎고 각료 인선 발표를 강행한 과정에서는 ‘효율’은 중시됐지만 양보와 타협을 전제로 하는 협상의 민주적 절차는 뒷전으로 밀렸다.
노 대통령의 갈등의제 활용은 지지도 50%가 넘었을 땐 정치적 득을 주었지만 30% 안팎으로 밀리면서는 독이 되고 말았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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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과 못지않게 중요한 국민통합 … ‘갈등의 리더십’ 경계해야
이명박 당선인의 새 내각명단 발표를 강행했다. 통합민주당과의 정부조직법 협상이 결렬됐다는 이유가 뒤따랐다. 취임도 하기 전에 정치권과의 타협보다는 ‘내 갈 길을 간다’는 고집을 보여줬다.
이 당선인 나름의 이유는 있어 보인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첫 걸음이 작은 정부이고, 새 정부출범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다 크게는 지난 10년의 질서와 다른 ‘효율과 성과’ 위주의 국정운영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기존 질서의 변화는 5년 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절실한 숙제였다. 개혁을 화두로 삼은 노 대통령은 기득권 해체와 사회주류세력의 교체를 ‘개혁과 변화’로 표현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기반은 진보와 보수로 다르지만, 각 진영내부에서 비주류였다는 점은 닮은꼴이다. 노 대통령은 김대중-김영삼 시대의 비주류 정치인이 개혁의 상징으로 급부상했고, 이 당선인은 보수진영 주류인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경제의 상징으로 대선승리를 이뤘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청와대는 비주류 출신 대통령의 정치운용 방식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 안에서도 우려하는 ‘정무적 판단의 부재’는 물론, 타협보다 원칙을 앞세운 대결정치, ‘내편’과 ‘네편’을 가르는 편가르기를 활용한 갈등의 리더십 등이 교차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 부재’의 한계 =
참여정부 청와대가 ‘정무기능 부재’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는 2006년 7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대연정 제안은 한나라당과 민노당 등 야당의 철저한 외면은 물론 여당 내 전반의 반발, 호남과 개혁성향층 등 주요 지지기반의 붕괴를 부를 소재였다. 7월 공개제안 전 당·정·청 7인 수뇌부 모임에서도 절대다수가 반대했던 구상을 ‘나홀로’ 밀어붙인 결과는 참담했다. 민심이반의 거대한 물결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유력 정치인들과 청와대 참모들은 무력했다. 집권 초기부터 ‘정무적 판단능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청와대에서는 당시 “청와대의 실질적인 정무수석은 대통령”이란 자조까지 나왔다.
청와대의 정무 부재, 정치 부재 현상은 노 대통령이 ‘당정분리’를 선언한 집권 초기부터 드러났다. 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 라인을 교체하고 정무수석제를 폐지하면서 각종 국정현안에 민정수석실이 직접 나섰지만 화물연대 파업사태 등에서 나타난 것처럼 사전예방, 위기감지 능력 부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집권기간 내내 불거졌던 당·청갈등에서 여당측의 1순위 요구는 ‘정무수석제 부활’이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목표 좋아도 ‘편가르기’ 정치는 폐해 =
정치부재와 편가르기, 대결정치는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서 나타났다. 탄핵총선으로 과반정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그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입법 처리를 놓고 한나라당과 극한대치를 벌였다. 그해 9월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기폭제가 됐다. 폐지와 개정을 놓고 당론을 정하지 못하던 열린우리당에서 폐지론이 득세하면서 12월엔 여당의원 70여명의 국회농성으로 번졌다.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간 4자회담이 열려 폐지 후 보완입법으로 타협점을 찾았지만, 천 원내대표가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결렬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의 격한 반대와 여론이 돌아서면서 국보법은 자구하나 고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자기 편을 열광하게 하고, 반대편은 자극하는 갈등의 리더십을 자주 활용했다. 당시 청와대 한 참모가 “펠로우십 리더십(fellosship leadership)”이라고 정의했듯이 여론의 편을 갈라 전선을 세우는 분열의 정치였다. 부동산 정책을 비판한 조선 중앙 등을 겨냥 “광화문에 빌딩을 가진 언론사가 반대한다”며 갈라 쳤고 과거사청산, 행정수도 이전 등의 의제로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 강남지역을 타깃으로 삼은 부동산 정책은 대표적 사례다. 이런 정치는 소재에 따라 사회를 둘로 쪼갰고 ‘지지, 반대’가 아니나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으로 몰아갔다.
◆이 당선인 행보, 짙어지는 ‘노란불’ =
이명박 당선인은 경제분야 과제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정치분야 과제로 국민통합을 제시했다. 통합은 정책수요자인 국민의 심리를 읽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경쟁세력과의 조정, 협상능력이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최근 이 당선인의 몇 개 행보는 이와 거리가 있다. “국민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발언이나 지난 주 “국정운영 워크숍에 장관 내정자를 참석시키겠다고 했다”가 번복하는 등 정무판단 능력에 ‘노란불’이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정부조직개편 협상에서 통합민주당-한나라당간 잠정 합의안을 직접 뒤엎고 각료 인선 발표를 강행한 과정에서는 ‘효율’은 중시됐지만 양보와 타협을 전제로 하는 협상의 민주적 절차는 뒷전으로 밀렸다.
노 대통령의 갈등의제 활용은 지지도 50%가 넘었을 땐 정치적 득을 주었지만 30% 안팎으로 밀리면서는 독이 되고 말았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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