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3월 17일 프랑스에서 국장으로 치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850만명의 프랑스병사들 중 유일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라자르 폰티첼리(Lazare Ponticelli 사진)가 110세로 3월12일에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고 프랑스일간지 르 몽드가 전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전쟁의 마지막 증인이 사라지는 것이며 역사의 기억도 과거라는 안개 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은 전쟁의 잔인함을 침묵의 벽 안으로 감금해 놓는가 하면 그는 반대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전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에 대한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잊혀진 사람들, 동료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되풀이할 때마다 매번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소리 없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려 내렸다. 90년을 거슬러 오르는 눈물인 것이다.
라자르의 삶은 4년간의 전쟁기간에서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표본으로 남았다.
그것은 문맹의 이탈리아 이민자 이야기이며 대기업의 대 소유주로 변한 한 어린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897년 이탈리아의 베톨라(Bettola)에서 빈곤한 가정의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난 그는 6년 후에 닥친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이어 떠나버린 어머니로 인해 형제들과 다 흩어져 살게 되었다. 큰 누나는 남동생 몇 명을 데리고 일을 구할 수 있다는 ‘천국’ 파리로 떠났으나 그 이후로 소식이 끊기자 9살에 형제들을 찾아, 살던 이탈리아 마을을 떠나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다. 역 근처에서 3일간을 헤매는 그 어린아이를 가여워한 한 이탈리아 출신 가족의 도움으로 몇 달간 그들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라자르는 이어서 굴뚝청소부, 신문판매로 일을 시작했다. 16세가 되던 1914년에 전쟁이 시작되자 나이를 속여 지원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외인부대 ‘라 레지용 에트랑제(La Legion Etrangere)’에서만 그를 받아들였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형 셀레스트(Celeste)와 재회를 하게 되었다.
첫 몇 달은 전쟁의 카오스를 경험했고 이어 ‘대살육’을 직접 겪게 되었다. 소속군단에서는 3주 만에 병사의 4분의 1을 잃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싸우는 건지도 몰랐고 탄알도 부족하기만 했다. 매번 동료들이 한 명씩 죽을 때면 우리는 입을 다문 채 다음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한번은 한 전장(No Man’s Land)에서 부상당한 독일군 위로 넘어졌다. “그는 내게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였다. 나는 그것이 그가 아이들이 둘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고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다.” 라자르는 그를 부축해 독일군지역까지 데려다 주었고 총을 쏘기 시작하는 독일군들에게 그 부상병은 소리를 질러 멈추라고 외쳤다. 고맙다고 말하는 독일인부상병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전쟁과 총알에 쓰러지던 이름모를 적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그에게 늘 떠도는 생각이 있다.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총을 쏜다. 네가 나한테 나쁜 짓이라도 했다면 내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텐데….”라고. 늘 그의 가슴을 누르는 이 혐오스런 전쟁에 대한 증오의 무게를 벗을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나고 두 형 셀레스트와 봉피스(Bonfils)와 함께 굴뚝청소와 쇠 그릇을 만드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39년에 그는 프랑스국적을 취득하고 다시 1년 후 지원병으로 자원했으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입대는 거절된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3형제가 세운 폰티첼리 그룹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원유 채취업 투자에 이어 세계적 기업으로 커갔다. 그리하여 연 4억5000유로의 수익과 3800명을 고용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70년에 이르러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동료들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왔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었다. 누구든 살아남는 자는 먼저 떠난 자를 끝까지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최후의 생존자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고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을 위해 산 사람들 앞에서 죽기 전까지 기꺼이 그들의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여러 번 제안됐지만 거절해왔던 국장을 결국 사망 몇 주 전에야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3월17일에 파리의 인발리드(Invalide)에서 그의 국장이 치러진다. 프랑스대통령 사르코지(Sarkozy)는 “새 삶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고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했던 이탈리아 아이”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로마 이탈리아 = 전명숙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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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850만명의 프랑스병사들 중 유일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라자르 폰티첼리(Lazare Ponticelli 사진)가 110세로 3월12일에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고 프랑스일간지 르 몽드가 전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전쟁의 마지막 증인이 사라지는 것이며 역사의 기억도 과거라는 안개 속으로 깊이 스며들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은 전쟁의 잔인함을 침묵의 벽 안으로 감금해 놓는가 하면 그는 반대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전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에 대한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잊혀진 사람들, 동료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되풀이할 때마다 매번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소리 없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려 내렸다. 90년을 거슬러 오르는 눈물인 것이다.
라자르의 삶은 4년간의 전쟁기간에서뿐만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표본으로 남았다.
그것은 문맹의 이탈리아 이민자 이야기이며 대기업의 대 소유주로 변한 한 어린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897년 이탈리아의 베톨라(Bettola)에서 빈곤한 가정의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난 그는 6년 후에 닥친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이어 떠나버린 어머니로 인해 형제들과 다 흩어져 살게 되었다. 큰 누나는 남동생 몇 명을 데리고 일을 구할 수 있다는 ‘천국’ 파리로 떠났으나 그 이후로 소식이 끊기자 9살에 형제들을 찾아, 살던 이탈리아 마을을 떠나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다. 역 근처에서 3일간을 헤매는 그 어린아이를 가여워한 한 이탈리아 출신 가족의 도움으로 몇 달간 그들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라자르는 이어서 굴뚝청소부, 신문판매로 일을 시작했다. 16세가 되던 1914년에 전쟁이 시작되자 나이를 속여 지원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외인부대 ‘라 레지용 에트랑제(La Legion Etrangere)’에서만 그를 받아들였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형 셀레스트(Celeste)와 재회를 하게 되었다.
첫 몇 달은 전쟁의 카오스를 경험했고 이어 ‘대살육’을 직접 겪게 되었다. 소속군단에서는 3주 만에 병사의 4분의 1을 잃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싸우는 건지도 몰랐고 탄알도 부족하기만 했다. 매번 동료들이 한 명씩 죽을 때면 우리는 입을 다문 채 다음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한번은 한 전장(No Man’s Land)에서 부상당한 독일군 위로 넘어졌다. “그는 내게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였다. 나는 그것이 그가 아이들이 둘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고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다.” 라자르는 그를 부축해 독일군지역까지 데려다 주었고 총을 쏘기 시작하는 독일군들에게 그 부상병은 소리를 질러 멈추라고 외쳤다. 고맙다고 말하는 독일인부상병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전쟁과 총알에 쓰러지던 이름모를 적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그에게 늘 떠도는 생각이 있다.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총을 쏜다. 네가 나한테 나쁜 짓이라도 했다면 내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텐데….”라고. 늘 그의 가슴을 누르는 이 혐오스런 전쟁에 대한 증오의 무게를 벗을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나고 두 형 셀레스트와 봉피스(Bonfils)와 함께 굴뚝청소와 쇠 그릇을 만드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39년에 그는 프랑스국적을 취득하고 다시 1년 후 지원병으로 자원했으나 나이를 이유로 그의 입대는 거절된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3형제가 세운 폰티첼리 그룹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고 원유 채취업 투자에 이어 세계적 기업으로 커갔다. 그리하여 연 4억5000유로의 수익과 3800명을 고용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70년에 이르러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동료들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왔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었다. 누구든 살아남는 자는 먼저 떠난 자를 끝까지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최후의 생존자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고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을 위해 산 사람들 앞에서 죽기 전까지 기꺼이 그들의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여러 번 제안됐지만 거절해왔던 국장을 결국 사망 몇 주 전에야 전쟁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3월17일에 파리의 인발리드(Invalide)에서 그의 국장이 치러진다. 프랑스대통령 사르코지(Sarkozy)는 “새 삶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고 프랑스인이 되기를 원했던 이탈리아 아이”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로마 이탈리아 = 전명숙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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