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건국 외교’를 생각한다
최근 한국 외교가 거듭된 낭패를 보고 있는 가운데, 오는 15일 건국(정부 수립) 60주년과 광복 63주년을 맞게 된다. 60년이 지난 지금 국제 정세는 많이 변했지만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 중요성 등 지정학적 특성은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국가 발전의 확실한 목표 아래 외교 정책을 펴나가야 하는 것도 그때나 마찬가지다.
60년 전, 열강들 간 세력확장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독립국가로 살아남은 것은 피를 말리는 ‘초읽기 외교’에서 수(手)를 제대로 읽었다는 뜻이다. 당시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조국은 반드시 남북이 통일된 독립국가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매우 높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건국 외교는 확실히 걸출한 면이 있다. 그는 국제정치 역학의 대세를 냉철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라도 독립을 해야겠다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신탁통치를 결정했고 민족진영이나 좌우익 할 것 없이 일제히 이를 반대했으나,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승만은 당시 세계정세는 이미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냉전 대결로 접어들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연정이 공산화로 가는 등 동구제국의 공산화가 확산되는 상황을 보고, 통일정부 수립은 무망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소 공동위에 매달린 하지 미군사령관의 좌우합작 노력은 결국 세월을 허비하다가 남한마저 공산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미 국무성을 상대로 단독정부라도 세우기 위한 외교 교섭에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소 파워게임 틀 속에서 남북분단이 불가피했다면 차선책으로나마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민 누구나가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 구 등 수많은 민족진영 지도자들도 단독정부를 반대했는데 이를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 때부터 항일독립운동을 펴왔던 애국심, 미국 유수한 대학을 두루 수학하면서 체득한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과 냉철한 현실 판단에 입각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외교는 이승만의 건국 외교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나마 그 영역을 확대해왔다. 박정희정부 때는 미국과의 동맹외교로 일관한 가운데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탈냉전시대 전야였던 노태우정부에서는 북방외교의 문을 열었다.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으로 한국 외교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김대중정부 들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대북정책의 틀을 크게 바꾸었다.
역대 정부가 나름대로 외교적 지평을 넓혀왔지만 특히 이승만의 건국 외교가 지금 외교적 난관에 처한 이명박정부에게 줄 수 있는 시사점은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국제 정세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건국 외교는 거의 이승만 1인 외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혼자서 많은 결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훨씬 덜하다. 물론 최종 순간엔 대통령이 결정을 해야겠지만 국제 정치에 해박하고 안목 높은 인물들을 찾아 참모로 앉히면 된다. 지금 외교 난국은 문제를 너무 미시적으로 보는 외교관 출신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 아닌지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확실한 외치 철학 아래 냉철한 현실주의로 재무장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논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외교에서 이상과 명분보다는 현실과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번 아세안안보포럼(ARF)에서 금강산 피격사건과 10·4선언이 모두 빠진 것은 의장국으로서 싱가포르가 남북을 같은 무게로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이 원상회복을 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독도를 주권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한 이면에는 같은 동맹이라도 한·미동맹과 한·일동맹 간에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실용주의도 따지고 보면 현실주의다. 그렇지만 일관된 외치의 철학적 뒷받침이 약한 현실주의다. 동맹이 대북관계를 포함한 외치를 모두 해결해주는 마스터 키가 될 수는 없다. 남북관계는 또 하나의 외치 영역이다. 최근 와서는 이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신호가 분명치 않다. 북·미 관계 진전과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식 등 남북관계·대북정책을 동북아 안보의큰 틀에서 역사 발전의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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