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대통령과 지식인, 미테랑의 교훈(장행훈)
장행훈/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5월 파리에서는 이미 작고한 지 5년이 지난 프랑솨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회고가 언론의 화제였다. 왜 갑자기 미테랑인가? 5월 10일에 사회당 서기장 미테랑이 81년 대통령에 당선, 23년간 집권해온 우파 정권을 교체한 지 20년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미테랑은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대통령일 뿐 아니라 재임 14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을 주기적으로 회고하며 역사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기는 프랑스 언론이 정권교체 20주년을 맞아 미테랑 집권의 공과와 정치인 미테랑을 다시 점검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5·16 군사 쿠데타 40주년을 맞고서도 한 신문을 제외하고는 사설 하나 싣지 않고 넘긴 한국의 주요 신문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스무해 전 미테랑이 경쟁자인 지스키르 데스텡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을 현지에서 목격했던 필자로서는 23년간의 보수정권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과 중산층 노동자들이 밤새 자동차 클랙슨을 울리고 거리에서 춤을 추며 정권교체를 축하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미테랑은 집권 이후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집권기간은 바로 “변화의 시대”였다. 모로아 총리의 사회-공산당 연립내각은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지방자치를 확대했으며 기업내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강화했다. 미테랑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구조를 개혁했고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변화에 대한 저항에 맞서 신문의 시장독점을 제한하는 신문법을 만들었다.
국민 삶의 질 높인 미테랑의 개혁정책
고등교육을 개혁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소비를 증진하고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 경기부양 정책을 실시했다. 노동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9시간으로 줄였으며 유급휴가를 4주에서 5주로 늘렸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정년 연령을 65에서 60세로 단축했다. 다가올 대변화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사회당의 정책은 인플레만 자극하고 실업자 수는 계속 증가했다. 그 결과 불과 2년 사이에 사회당 정권은 프랑화를 3차례나 평가절하 해야했다. 개혁은 한동안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미테랑 정권은 지지자들로부터는 미진한 개혁으로 자본주의와 완전히 단절못했다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보수세력으로부터는 변화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불평을 들었다. 오늘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다. 2대 파비우스 내각은 경제 긴축정책으로 선회했으나 국민의 불만은 보수 야당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게된다. 86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보수정당에 패하고 대통령은 사회당 출신이나 내각은 보수우익이 장악하는 이른바 좌우익 ‘동거정부’ 시대를 맞게 된다. 미테랑은 재임 중 두 차례나 ‘동거’를 경험한다. 정치적으로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미테랑은 헌법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동거정권을 잘 운영해 그의 정치 지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정권교체의 전통을 살려나갔다. 미테랑은 집권 초의 과격한 개혁정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대학생 수를 200만으로 크게 늘리고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으며 유럽통합을 주도해서 ‘새 프랑스’를 건설한 치적을 평가받고 있다.
미테랑은 추종자도 많지만 적도 많았다. 그에 관해서 나온 책이 백권을 넘는다. 정치는 비판 경쟁의 장(場)이다. 이런 상호비판을 신문이 조장한다. 미테랑은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피에르 베레고보아 총리가 파리의 아파트구입을 위해 백만 프랑(1억6000만원)을 친구로부터 빌려 쓴 사실을 알게되자 연일 그를 공격, 결국 그로 하여금 자살하게끔 몰아붙인 신문을 호되게 질타했다. 미테랑은 신문과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의 14년 집권기간중 그의 측근들이 연루된 여러 가지 부패관련 사건들이 드러나 좌파정권 이미지에 상처를 입혔다. 미테랑은 남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정치인도 못된다. 그는 항상 ‘왕처럼 행동하는’ 공화국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왕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지식인, 여론주도층과의 가교역할에 성공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미테랑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인기가 아직 높다는 사실이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용인술에 있다는 게 파리 정치대학 알랭 제라르 슬라마 교수의 지적석이다. 미테랑은 주변에 지식인들을 많이 두고 있다. 이들은 지스카르 대통령 때와 달리 어떤 문제를 맡아 처리하고 자문하는 가장 우수한 두뇌라기보다 대학과 언론계 지식인 예술인 등 여론 주도층과 대통령을 연결시켜 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미테랑은 이들 지식인 오피니언 리더들을 통해 그의 이미지를 만들고 미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통치기간 뿐 아니라 역사를 내다보면서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지식인들을 주변에 두고 활용한 것이 별로 호감을 못 주는 미테랑을 죽은 후에도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만든 비법인 것 같다.
장행훈/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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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행훈/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5월 파리에서는 이미 작고한 지 5년이 지난 프랑솨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회고가 언론의 화제였다. 왜 갑자기 미테랑인가? 5월 10일에 사회당 서기장 미테랑이 81년 대통령에 당선, 23년간 집권해온 우파 정권을 교체한 지 20년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미테랑은 프랑스 최초의 사회당 대통령일 뿐 아니라 재임 14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을 주기적으로 회고하며 역사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기는 프랑스 언론이 정권교체 20주년을 맞아 미테랑 집권의 공과와 정치인 미테랑을 다시 점검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5·16 군사 쿠데타 40주년을 맞고서도 한 신문을 제외하고는 사설 하나 싣지 않고 넘긴 한국의 주요 신문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스무해 전 미테랑이 경쟁자인 지스키르 데스텡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을 현지에서 목격했던 필자로서는 23년간의 보수정권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과 중산층 노동자들이 밤새 자동차 클랙슨을 울리고 거리에서 춤을 추며 정권교체를 축하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미테랑은 집권 이후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집권기간은 바로 “변화의 시대”였다. 모로아 총리의 사회-공산당 연립내각은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지방자치를 확대했으며 기업내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크게 강화했다. 미테랑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구조를 개혁했고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변화에 대한 저항에 맞서 신문의 시장독점을 제한하는 신문법을 만들었다.
국민 삶의 질 높인 미테랑의 개혁정책
고등교육을 개혁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소비를 증진하고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 경기부양 정책을 실시했다. 노동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9시간으로 줄였으며 유급휴가를 4주에서 5주로 늘렸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정년 연령을 65에서 60세로 단축했다. 다가올 대변화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사회당의 정책은 인플레만 자극하고 실업자 수는 계속 증가했다. 그 결과 불과 2년 사이에 사회당 정권은 프랑화를 3차례나 평가절하 해야했다. 개혁은 한동안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미테랑 정권은 지지자들로부터는 미진한 개혁으로 자본주의와 완전히 단절못했다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보수세력으로부터는 변화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불평을 들었다. 오늘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다. 2대 파비우스 내각은 경제 긴축정책으로 선회했으나 국민의 불만은 보수 야당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게된다. 86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보수정당에 패하고 대통령은 사회당 출신이나 내각은 보수우익이 장악하는 이른바 좌우익 ‘동거정부’ 시대를 맞게 된다. 미테랑은 재임 중 두 차례나 ‘동거’를 경험한다. 정치적으로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미테랑은 헌법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동거정권을 잘 운영해 그의 정치 지도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정권교체의 전통을 살려나갔다. 미테랑은 집권 초의 과격한 개혁정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대학생 수를 200만으로 크게 늘리고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으며 유럽통합을 주도해서 ‘새 프랑스’를 건설한 치적을 평가받고 있다.
미테랑은 추종자도 많지만 적도 많았다. 그에 관해서 나온 책이 백권을 넘는다. 정치는 비판 경쟁의 장(場)이다. 이런 상호비판을 신문이 조장한다. 미테랑은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피에르 베레고보아 총리가 파리의 아파트구입을 위해 백만 프랑(1억6000만원)을 친구로부터 빌려 쓴 사실을 알게되자 연일 그를 공격, 결국 그로 하여금 자살하게끔 몰아붙인 신문을 호되게 질타했다. 미테랑은 신문과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의 14년 집권기간중 그의 측근들이 연루된 여러 가지 부패관련 사건들이 드러나 좌파정권 이미지에 상처를 입혔다. 미테랑은 남에게 그렇게 호감을 주는 정치인도 못된다. 그는 항상 ‘왕처럼 행동하는’ 공화국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왕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지식인, 여론주도층과의 가교역할에 성공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미테랑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인기가 아직 높다는 사실이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용인술에 있다는 게 파리 정치대학 알랭 제라르 슬라마 교수의 지적석이다. 미테랑은 주변에 지식인들을 많이 두고 있다. 이들은 지스카르 대통령 때와 달리 어떤 문제를 맡아 처리하고 자문하는 가장 우수한 두뇌라기보다 대학과 언론계 지식인 예술인 등 여론 주도층과 대통령을 연결시켜 주는 가교역할을 했다. 미테랑은 이들 지식인 오피니언 리더들을 통해 그의 이미지를 만들고 미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통치기간 뿐 아니라 역사를 내다보면서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지식인들을 주변에 두고 활용한 것이 별로 호감을 못 주는 미테랑을 죽은 후에도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만든 비법인 것 같다.
장행훈/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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