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L교수를 만나러 영주로 향한다. 당초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바꾸어 영주행 기차를 탔다. 5월5일을 낀 이틀의 연휴는 입석도 남지 않을 만큼 붐비게 하였다. 다행히 역무원께서 김천까지 입석권을 끊어주시며 기차를 타고 영주까지 연장하라고 일러주신다.
■ 태백의 성쇠와 함께 한 영주역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점촌(문경시)에 가서야 한산해진다. 2시간이 넘는 밤의 기차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것은 학생으로 여겨지는 총각, 처녀의 얘기들과 휴대폰으로 연신 장난을 치는 모습들이다. 지난 10년간 기차 객실의 풍속도도 무척이나 바뀌었다. 한 노인도 젊은 아가씨로부터 열심히 휴대폰의 다양한 기능에 대한 강의를 받는다.
밤 11시를 넘은 시각. 한 때 흥청거리던 영주역전도 예전 같지 않다. 강원도로 가던 길목이던 이 곳이 이제는 그 노릇을 많이 접은 탓이다. 태백이란 새로운 도시를 만든 숫한 사람들이 영주역을 거쳐갔다. 태백 일대의 숱한 탄광이 문을 닫고 그 여파는 영주역의 한산함으로 나타난다.
■ 동이를 잉태한 물레방아간
20년 전 오대산 소금강을 다년 온 후, 아마도 강원도에는 처음 가는 길인 것 같다. 그 이후에도 한 두 번쯤 강릉에는 다녀온 듯도 한데, 기억이 분명치 않은 것은 소금강의 기억이 너무 강렬한 탓이거나, 그 이후의 강원도 방문이 사무적이었던 모양이다. 남들이 ‘모래시계’ 이후 ‘정동진이다’ ‘설악산이다’ 할 때도 전혀 움직이지 못하다가 탄광 때문에, 또 명태 덕장 때문에 강원도 여행을 여러 번 계획했으나 매번 결행치 못했다. 이번 일정은 평창의 이효석 생가 → 강릉 오죽헌, 허난설헌 생가 → 천안 아우내 장터, 대개 이런 코스로 예정되었다.
강원도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기호는 심심찮게 눈에 띄는 버려진 겹집들이다. 우인들간에 ‘집 전공’이라 불리는 선배 L교수는 전통적인 농가에 가끔 눈길을 주며 겹집에 관한 설명도 덧붙여 준다. 평창강을 만나자 동강이 더불어 이야기된다. 복원한 듯한 나무다리와 나루터 주막을 카메라에 담는다. 천석이 좋은 이 곳에도 벌써 서울 사람들이 점유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평창이다. 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그 평창이다.
이곳에서 효석의 생가를 찾기로 하였다. 생가를 찾아 들어가는 길에 만난 면소재지에서 점심을 해결할 곳을 눈여겨봐 둔다. 옛 장터인 듯 한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식당이 보인다. 우선 효석의 생가를 돌아보고 점심은 나중에 먹기로 하였다.
평창군이 효석을 문화관광상품으로 팔아먹기로 단단히 작정한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소설의 무대인 물레방아간을 복원하고 그 앞에는 조각도 하나 세워 놓았다. 그 보다 초입에는 돌배나무에 둘러 쌓인 효석의 흉상이 자리잡은 기념공원이, 그 맞은 편에는 효석문화제(메밀꽃 축제)의 본부로 마련한 간이 건물들이 손님을 맞는다.
효석이 나서 자란 집은 강원도 산골의 집들이 대개 그렇듯이 외딴집이다. 원래는 너와집이었던 듯 한데 함석으로 지붕개량을 하였다. 집주인 황씨는 ‘사람 좋은’ 강원도 사람이었다. 친절히 자신의 집과 처한 상황을 설명해 준다. 집 앞에는 보기 드물게 큰 엄나무가 두 그루 서있다.
엄나무는 잡귀를 쫓는다하여 그 가지를 잘라 대문에 걸어두기도 한 가시가 돋힌 나무이다.
자녀를 데리고 온 한 아주머니는 엄나무 잎으로 반찬을 해 먹었다고 열심히 설명한다. 봄이지만 초여름의 햇살 같은 따가운 볕 아래 선 생가의 뒤 산자락에는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모두들 그 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주인은 ‘산배나무(돌배나무)’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선산에서 돌배나무를 보았지만 이렇게 군락을 이룬 것은 처음 본다. 효석 생가 곁에는 찾아드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새로 지은 식당도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이효석(李孝石·1907. 2. 23∼1942. 5. 25)
호 가산(可山). 강원 평창 출생. 경성 제1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동반작가(同伴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희(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 교수가 된 후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화분〉외에도 〈벽공무한(碧空無限)〉, 〈창공(蒼空)〉 등의 장편이 있으나 그의 재질은 단편에서 특히 두드러져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메밀꽃>
■ 태백의 성쇠와 함께 한 영주역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점촌(문경시)에 가서야 한산해진다. 2시간이 넘는 밤의 기차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것은 학생으로 여겨지는 총각, 처녀의 얘기들과 휴대폰으로 연신 장난을 치는 모습들이다. 지난 10년간 기차 객실의 풍속도도 무척이나 바뀌었다. 한 노인도 젊은 아가씨로부터 열심히 휴대폰의 다양한 기능에 대한 강의를 받는다.
밤 11시를 넘은 시각. 한 때 흥청거리던 영주역전도 예전 같지 않다. 강원도로 가던 길목이던 이 곳이 이제는 그 노릇을 많이 접은 탓이다. 태백이란 새로운 도시를 만든 숫한 사람들이 영주역을 거쳐갔다. 태백 일대의 숱한 탄광이 문을 닫고 그 여파는 영주역의 한산함으로 나타난다.
■ 동이를 잉태한 물레방아간
20년 전 오대산 소금강을 다년 온 후, 아마도 강원도에는 처음 가는 길인 것 같다. 그 이후에도 한 두 번쯤 강릉에는 다녀온 듯도 한데, 기억이 분명치 않은 것은 소금강의 기억이 너무 강렬한 탓이거나, 그 이후의 강원도 방문이 사무적이었던 모양이다. 남들이 ‘모래시계’ 이후 ‘정동진이다’ ‘설악산이다’ 할 때도 전혀 움직이지 못하다가 탄광 때문에, 또 명태 덕장 때문에 강원도 여행을 여러 번 계획했으나 매번 결행치 못했다. 이번 일정은 평창의 이효석 생가 → 강릉 오죽헌, 허난설헌 생가 → 천안 아우내 장터, 대개 이런 코스로 예정되었다.
강원도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기호는 심심찮게 눈에 띄는 버려진 겹집들이다. 우인들간에 ‘집 전공’이라 불리는 선배 L교수는 전통적인 농가에 가끔 눈길을 주며 겹집에 관한 설명도 덧붙여 준다. 평창강을 만나자 동강이 더불어 이야기된다. 복원한 듯한 나무다리와 나루터 주막을 카메라에 담는다. 천석이 좋은 이 곳에도 벌써 서울 사람들이 점유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평창이다. 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그 평창이다.
이곳에서 효석의 생가를 찾기로 하였다. 생가를 찾아 들어가는 길에 만난 면소재지에서 점심을 해결할 곳을 눈여겨봐 둔다. 옛 장터인 듯 한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식당이 보인다. 우선 효석의 생가를 돌아보고 점심은 나중에 먹기로 하였다.
평창군이 효석을 문화관광상품으로 팔아먹기로 단단히 작정한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소설의 무대인 물레방아간을 복원하고 그 앞에는 조각도 하나 세워 놓았다. 그 보다 초입에는 돌배나무에 둘러 쌓인 효석의 흉상이 자리잡은 기념공원이, 그 맞은 편에는 효석문화제(메밀꽃 축제)의 본부로 마련한 간이 건물들이 손님을 맞는다.
효석이 나서 자란 집은 강원도 산골의 집들이 대개 그렇듯이 외딴집이다. 원래는 너와집이었던 듯 한데 함석으로 지붕개량을 하였다. 집주인 황씨는 ‘사람 좋은’ 강원도 사람이었다. 친절히 자신의 집과 처한 상황을 설명해 준다. 집 앞에는 보기 드물게 큰 엄나무가 두 그루 서있다.
엄나무는 잡귀를 쫓는다하여 그 가지를 잘라 대문에 걸어두기도 한 가시가 돋힌 나무이다.
자녀를 데리고 온 한 아주머니는 엄나무 잎으로 반찬을 해 먹었다고 열심히 설명한다. 봄이지만 초여름의 햇살 같은 따가운 볕 아래 선 생가의 뒤 산자락에는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모두들 그 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주인은 ‘산배나무(돌배나무)’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선산에서 돌배나무를 보았지만 이렇게 군락을 이룬 것은 처음 본다. 효석 생가 곁에는 찾아드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새로 지은 식당도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이효석(李孝石·1907. 2. 23∼1942. 5. 25)
호 가산(可山). 강원 평창 출생. 경성 제1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동반작가(同伴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희(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 교수가 된 후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화분〉외에도 〈벽공무한(碧空無限)〉, 〈창공(蒼空)〉 등의 장편이 있으나 그의 재질은 단편에서 특히 두드러져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메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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