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편지> - 낙동강 5(구미에서 대구까지)

지역내일 2008-10-20
<그림편지> - 낙동강 5

도동서원에서 ‘완벽한 건축’을 만나다
구미에서 대구까지 … 구미에서 2급수, 대구에서 3급수로

강 이야기 가운데 제일 재미없는 게 ‘수질오염’ 문제지만 오늘은 수질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상주까지 거의 1급수를 유지해왔던 낙동강이 구미와 대구를 지나며 물빛이 달라지거든요.
흔히 강을 ‘젖줄’이라고 표현하지만 강은 젖줄이 아니라 ‘핏줄’입니다. 백두대간을 비롯한 산줄기들이 한반도의 골격이라면, 강줄기는 구석구석 물을 공급해주는 핏줄입니다. 낙동강의 수질이 중요한 것은 이 일대 1300만 피붙이들의 식수원이기 때문입니다.
상주를 지난 낙동강은 1·2·3·4공단으로 둘러싸인 구미로 내려옵니다. 구미공단 최종 방류수는 구미하수처리장을 거쳐 BOD(생물학적 산소요구량) 1ppm(1급수) 수준으로 깨끗하게 정화되어 배출됩니다.
이렇게 잘 처리해서 배출한다면 낙동강 수질의 변화가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구미시 상수원 취수장까지 낙동강은 2007년 연평균 BOD 1ppm(강정)을 유지하지만 구미를 지난 뒤부터는 1.6ppm(구미), 2급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왜관에서 1.7ppm으로 더 떨어진 수질은 결정적으로 대구를 지나면서 3.3ppm(화원나루), 3급수 수준으로 악화됩니다.

대구에서만 하루 40.4톤 BOD 배출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화원나루는 낙동강 본류와 금호강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곳엔 유명한 화원유원지가 있습니다.
대구의 길목이자 낙동강 내륙수로의 중간기착지였던 화원나루는 산천경개가 수려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가야산 너머 해가 지면(伽倻落照)/ 금호강엔 어부들의 피리소리(金湖漁笛)/ 늙은 강에 계수나무 솟은 듯(老江月桂)/ 낙동강으로 돛단배가 돌아오네(洛水歸帆)
― 작자미상 ‘배성십경’(盃城十景) 중에서

그러나 화원나루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다운 나루가 아닙니다. 대구와 성주를 잇는 사문진교 위로는 자동차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사문진교 아래에서는 퀴퀴한 시궁창 냄새가 납니다. 화원동산에서 보면 회색의 낙동강과 진회색의 금호강, 시커먼 진천천이 합수되는 적나라한 광경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국립환경과학원의 ‘낙동강수계 시·군별 배출부하량’ 자료에 따르면, 대구 일대의 BOD 배출부하량은 하루 40.4톤이나 됩니다. 인구나 도시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태백시의 BOD 배출부하량이 1.2톤, 공단이 밀집해 있는 구미시가 12.3톤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부하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근래 들어 대구 금호강 수질은 상당히 개선되고 있습니다. 금호강 최하류인 강창교 지점의 수질은 2007년 연평균 3.8ppm을 기록했습니다. 100ppm까지 올라갔던 80년대와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변화입니다.
대구 염색공단 폐수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정화됩니다. 염색공단 공동폐수처리장 최종배출수는 달서하수처리장으로 전량 유입돼 BOD 2~3ppm 수준으로 정화된 뒤 금호강으로 배출되고 있습니다. 실제 눈으로 보면 수돗물 색깔과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맑습니다.

1984년 금호강 BOD 111ppm까지 치솟아

금호강의 수질 개선은 2001년 임하댐-영천댐 도수로가 개통돼 금호강의 수량이 하루 4만톤에서 30만톤 이상으로 늘어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금호강은 원래 낙동강과 함께 ‘대구의 생명선’으로 불리던 강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금호강 상류에 총저수량 8000만톤 규모의 영천댐이 들어서면서 금호강은 ‘죽음의 강’으로 변해갔습니다.
영천댐은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공업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었죠. 대구 쪽으로 흘러야 할 하루 22만톤의 물이 포항으로 흐르면서 금호강은 하천의 자정작용이 안 일어날 정도로 말라붙었고 1989년 5월 강창교 하류의 BOD는 무려 114ppm까지 치솟았습니다.
금호강 수질은 1994년엔 13ppm으로 개선됐고, 2007년에는 3.9ppm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금호강을 살리기 위해 들어간 예산은 약 1조원 가량 됩니다.
또 다른 변화는 포스코에서 일어났습니다. 포스코가 영천댐에서 공급받는 공업용수는 하루 17만톤에서 1만톤 수준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공장폐수를 완벽하게 재처리해서 98%까지 재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수처리 안 거치는 지천들이 문제

이런 수많은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미와 대구를 지나면 낙동강 수질이 왜 나빠질까요?
문제는 하수처리를 거치지 않고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오염된 지천들입니다. 구미나 대구시의 하수처리율은 90% 이상에 방류수질은 1ppm 수준이지만 이런 수치는 그야말로 공식적인 통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미 일대는 물론, 성주·칠곡·달성 등 농촌 지역의 지천들도 상황은 심각합니다. 특히 화원나루에서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진천천은 성서공단 하수처리장 물을 희석시킨 상태에서도 심한 하수구 냄새가 납니다. 화원나루 낙동강 본류에서 나는 퀴퀴한 시궁창 냄새의 근원은 바로 진천천입니다.
10년 동안 수질이 제자리인 팔당수계에 비해 낙동강의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최악에서 조금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지 낙동강 수질이 팔당호와 비슷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낙동강 수계 전체로 볼 때 구미와 대구 일대의 오염부하 총량을 줄여야 한다는 원칙적인 지적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구 화원나루에서 금호강을 만난 낙동강은 시커멓게 멍이 든 상태로 부산을 향해 힘겹게 흘러내려갑니다.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에서 낙동강은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앞을 지납니다.

“죽음으로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도동서원은 건축사학자들로부터 ‘갖추어야 할 규범을 완벽하게 구현한 서원건축’이란 평을 듣는 빼어난 건축물입니다.
도동서원 강당 마루 깊숙이 앉아 정면을 바라보면 ‘완벽한 건축이란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곧게 선 두 기둥 사이로 정료대, 환주문, 수월루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고 기둥 밖으로는 동·서재 두 건물의 지붕이 같은 길이로 눈에 들어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엄격한 대칭적인 질서가 인공적인 건축물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세히 보면 낙동강 건너 북쪽에 있는 안산(案山)이 수월루 용마루 중심에, 잠미나루 양쪽의 산들이 강당 기둥에 거의 대칭으로 걸립니다. 이런 완벽한 대칭을 만들기 위해 도동서원은 남향이 아닌 북동향을 바라봅니다.

도동서원은 엄격한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을 기념하여 창건되었다. 그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연산군의 사약을 달게 받은 전형적인 사림이다. 창건주는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학파 예론(禮論)의 최고봉인 한강 정 구였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이라 할까?
- ‘도동서원/성리학의 건축적 담론’. 김봉렬

원래의 동선을 따라 수월루에서 중정당(강당)으로 올라와보면 도동서원이 구현하고 있는 성리학적 건축규범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월루 누각 밑에 서서 환주문을 바라보면 강당 앞을 밝히는 조명대인 ‘정료대’, 그 위의 ‘중정당’과 ‘도동서원’ 현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옵니다. 좁은 돌층계를 오르면 환주문, 갓을 쓴 선비라면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높이죠.
고개를 숙이면 환주문 문설주에 있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조각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게 하고, 강당 앞마당으로 다시 좁은 포장로가 나타납니다. 박석을 깔아 만든 포장로 끝에는 해태 모양의 돌조각이 길을 두 갈래로 나누고, 그 양쪽에는 강당으로 오르는 좁은 돌층계가 놓여 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은 21세 때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고 정몽주­김종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맥을 계승했습니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사림 출신답게 홍문관 등 주로 언론 계통의 벼슬을 역임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된 그는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조광조 김안국 성세창 등의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김굉필은 당당하게 복권됩니다. 이후 김굉필은 이언적, 이 황, 정여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되어 문묘에 배향됩니다. 도동서원 앞에 있는 ‘신도비명’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선생은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서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하였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되었고,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죽어서 이런 감동적인 비명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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